133화
“그래요. 그 남자도 당신처럼 역겨운 얼굴이었죠.”
타락한 추기경은 자비로웠던 예전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라파엘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라파엘은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기만 했다.
멀리서 본다면 자비로운 성자가 겁에 질린 신자를 위로하는 아름다운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언은 타락한 추기경에게서 피어오르는 엄청난 증오심을 느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과연 그는 라파엘을 보고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을 뿐일까.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남자의 자식까지도 증오하게 된 것일까.
타락한 추기경이 라파엘의 가슴을 꿰뚫은 지팡이를 빼내고 다시 찌르기 위해 높이 들어 올린 순간,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형체가 사라졌다.
엔레이드맨이 끼어들어 라파엘을 둠 안에 감춰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한 것이다.
“…형제여, 각자의 복수에는 손을 대지 않기로 한 것이 아버지께서 정한 규율이 아니었습니까?”
타락한 추기경은 엔레이드맨이 타깃을 말도 없이 빼돌린 것에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해진 모습이었다.
다크 카오스의 여덟 자식은 각기 다른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뚜렷한 상하 관계는 없었다. 다만 다크 카오스에게 선택받은 순서대로 미미한 서열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서열은 형제라는 개념의 암묵적인 약속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타락한 추기경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형제는 엔레이드맨, 한 명뿐이었다.
그가 개성 강한 형제들을 통솔하고 제지하는 역할을 주로 맡아 왔기 때문이다.
“이자는 네 복수대상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아직 그에게 용건이 있으신 것 같으니 이번엔 네가 물러서라, 타락한 추기경.”
“…….”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엔레이드맨을 빤히 쳐다봤다. 마치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분위기에 지켜보던 재언도 덩달아 긴장했다.
요즘 제법 가까워져서 처음엔 그들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걸 재언도 잠시 잊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크게 싸웠을 때는 엔레이드맨이 이겨서 서열을 완벽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타락한 추기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능력이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엔레이드맨이 이길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울 것 같은 자식들을 염려해 재언이 ‘형제싸움은 절대 금지’라는 규칙까지 만들어 낼 정도였다.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던 분위기를 깨트린 건 두 번째 자식인 타락한 추기경이었다. 재언의 충실한 자식이자 한낱 종인 자신이 감히 그분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타락한 추기경은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물론 그의 기도 내용을 재언이 알 수는 없었다.
새하얀 빛의 무리가 타락한 추기경의 온몸을 한 바퀴 휘몰아쳤다. 기도를 올릴수록 그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은 더욱더 진해졌다. 이윽고 기도를 마친 타락한 추기경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자 엔레이드맨 또한 공손하게 인사한 뒤 모습을 감추었다. 곧이어 엔레이드맨의 둠(doom) 안에 감춰져 있던 라파엘이 나타났다.
그는 그 안에서 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들어가기 전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교황의 축복을 받은 이단 심문관들은 세뇌에 가까울 정도의 교육을 받아 정신력이 강하고 어지간한 일에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다더니 둠 안에서 본 것이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말해 주시겠어요? 원하는 게 무엇인지?”
“교황께서는… 바실리오 경의 시신을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악마의 신이시여, 과연 제가 한 일이 진정 그곳을 위한 길이었을까요.”
‘바티칸은 저번에 된통 혼났으면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네.’
타락한 추기경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바실리오의 정액을 이용해 임신을 시키다니, 이 정도면 비윤리적이고 악독한 짓을 하는 쪽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빌런보다도 더 지독한 놈들이었다.
혀를 쯧쯧 차는 재언의 귀에 라파엘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는 부정으로 태어난 자식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해 저를 가지는 바람에 꿈꾸던 수도자로서의 길을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라파엘이 자세를 바꿔 기도를 올리는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선 또다시 큰 죄를 저지르셨습니다. 그 뒤 어머니께선 저를 데리고 도피하셨고, 우리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생활했습니다.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지요. 그런 저를 불쌍하게 여기신 어머니의 지인께서 저만은 성당에 다닐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라파엘의 감은 두 눈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는 감히 하늘 아래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죄인이었기에 매일매일 기도하며 신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신께서 제게 기적을 내려 주셨고 덕분에 교황님의 눈에 띄어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열두 명의 추기경들은 각자의 성기사에게, 교황은 세 명의 이단 심문관에게 축복을 내리지. 은밀하게 뽑아 살인을 사주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기도를 올리는 자세 그대로 라파엘이 눈을 떠 다크 카오스의 가면에 새겨진 검은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교황청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바실리오 경의 성액을 독실한 신자님의 몸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임무를 받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그러하듯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일이기에 은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러던 중, 만난 사람이 김수지라는 여성입니다.”
역시, 김수지가 말했던 신의 지상 대리인이 라파엘이었다.
“그녀는 저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었고,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습니다.”
단순히 가까워졌다기엔 라파엘의 눈동자에 조금 특별한 감정이 섞였다. 재언이 봤을 때 그녀를 마음에 담았던 게 분명한데, 그런 지독한 짓을 저질렀다니 믿을 수 없었다.
“…교황님께서는 제가 마음속으로 그녀를 담았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과거에 ‘축복받은 추기경’과 그의 성기사가 그러했듯 미쳐 버릴 것이 분명하다고 하시며……. 김수지를 이번 작전의 타깃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는 명령을 받들어 그녀를 성당으로 불러냈고…….”
“그런데 신자들이 한 여성을 두고 강간을 했다?”
그에 라파엘이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것도 다크 카오스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진심으로 다크 카오스를 어둠의 신이라고 믿고 있는 걸까.
‘이 자식 사실 사이비인 거 아니야?’
이단 심문관이라는 사람이 별 해괴망측한 신을 믿는 것 같은 모습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재언은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기도하는 데 집중하는 라파엘이 눈을 뜨지 않아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촌스러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하니 차민재였다. 정말 귀신같은 사람이다.
재언은 일단 타락한 추기경을 불러내 라파엘을 감시하라고 한 뒤 성당 뒤쪽의 으슥한 곳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이상할 만큼 조용하네……. 라파엘 혼자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도 이상하고…….’
전화가 한번 끊기고 재언이 걸기도 전에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네, 신재언입니다.”
- 접니다.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아… 잠시 약속 때문에 밖이었어요. 혹시 무슨 일로…….”
그러자 차민재가 웃으며 속삭였다.
- 우리가 볼일 있어서 연락해야 하는 사이인가요? 서운해요.
“아, 아니죠……. 사실 저도 민재 씨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흠흠.”
- 후후, 기분 풀렸습니다.
목소리가 달다, 달아.
재언은 자신이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 중 민재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 김수지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바티칸에서 현상금을 내걸고 쫓는 그녀를 보호하면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는데도 레헬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김수지를 보호했다.
‘…의외로 진짜 히어로 같은 면모가 있네. 어쨌든 자기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녀의 신변을 보호하는 거잖아.’
하긴, 레헬쯤 되니까 바티칸의 압박 아래에서도 자신의 사무소에서 그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S급 히어로였다면 지금쯤 열두 명의 추기경과 성기사들의 추격을 버텨 내지 못하고 그녀를 내줬을 것이다. 거기다 이단 심문관까지 합세하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이상한 점이요?”
- 병원에서는 유산이라고 말했는데, 저희 쪽에서 따로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녀는 임신이 아니었어요.
“네? 하지만 전 그녀를 직접 본 적이 있어요. 배가 불러 있었고, 하혈까지 했는데 어떻게?”
- 글쎄요……. 이제 그 부분을 알아볼 차례에요.
임신이 아니라고 하면, 커다랗게 부풀었던 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녀가 믿고 있던 것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말 악마에 씌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말이 안 된다. 재언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골치 아픈 일에 자신이 휘말렸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채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민재 씨, 김수지의 주변 상황에 특별한 점은 없었어요?”
- 특별한 점이라… 있어요.
“뭐죠?”
- 그녀는 연쇄살인마의 딸입니다. 그 때문에 평생을 손가락질받으며 살았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자살했고 동생은 가출해 연락 두절 상태고요.
신재언은 범죄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이상 가해자의 가족이나 자식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인생이 망가진 피해자와 유족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라파엘이 그녀에게 끌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일까.
연좌제, 라파엘의 원죄는 연좌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