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35화 (135/324)

135화

놀랍도록 조용하군.

“…겠어요?”

조각난 장난감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라파엘이 없어지고 다음 날 성당에 들어온 신부 중 한 명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크 카오스의 가면을 가져갔다고 했다.

가톨릭에 몸담은 신부라면 그것이 누구의 가면인지, 다크 카오스와 교황청의 사이를 모를 리 없었다. 분명히 교황청에서 다크카오스, 혹은 타락한 추기경의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네……. 왜 이렇게 잠잠한 거지?’

“손님?”

“아… 네?”

“주문하시겠어요?”

재언은 의아한 듯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자신을 부른 카페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지금 자신이 카페 안 카운터 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걸 본 재언은 얼른 커피 주문을 끝내고 옆으로 물러났다.

주말에 주변 건물이 온통 사무실인데도 카페 안에는 손님으로 북적였다. 재언은 한참을 기다린 뒤 커피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쉬어야 할 주말임에도 레헬의 사무실을 방문하기 위해 나온 재언은 커피를 손에 든 채 으리으리한 건물을 한참 동안 올려다봤다.

이런 괴상한 능력을 ‘어떤 노인’에게 받은 뒤로 히어로 협회나 레헬의 사무실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질리도록 드나드는 것 같아서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이런 건물을 강남 대로변에 올리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재언은 질린 얼굴로 건물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당당하게 레헬의 사무실 정문으로 들어가는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앞의 두 번은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기에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언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신재언 님. 사장님 찾아오신 거죠?”

그녀는 레헬의 밑에서 5년 동안이나 비서 겸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비능력자이지만 머리가 상당히 비상해서 사무실을 굴리는 데 관심이 없는 사장을 대신해 레드-헬-파이어 사무실을 먹여 살리는 핵심 직원 중 한 명이었다.

어지간한 대기업 이사급보다 더 대우해 주니까 뼈를 묻는 거라고 그녀가 웃으며 말했던 게 새삼 떠올랐다.

“네. 안녕하세요. 이거 한잔 드세요.”

재언은 카페에서 가져온 커피 한 잔을 그녀의 책상에 올려놓고 짧게 안부를 나눈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레헬 사무실의 최고층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지만, 그녀는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었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불투명한 칸막이로 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레헬과 이레일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눈앞의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레헬은 답답했는지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껄렁하게 앉아 담배를 입에 문 채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이 화보가 따로 없었다.

재언은 실내에선 금연이라고 잔소리할 생각도 못 하고 인상만 잔뜩 찌푸렸다. 차민재의 옆에 서 있는 이레일이 사람인지 오징어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부작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레일로 추정되는 오징어가 재언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아, 신 선생님… 안녕하세요.”

“재언 씨.”

민재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재언을 보자마자 재빠르게 일어나 담배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자연스럽게 탈취제를 꺼내 몸에 뿌린 후 다가왔다. 정신을 차린 재언은 손을 잡아 오는 그와 눈인사를 하고 이레일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이레일의 안색이 그리 좋지 못한 걸 보니 김수지 일로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이었다. 재언은 사 들고 온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두 사람이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을 힐끔 쳐다봤다.

‘헉.’

모니터 안에는 침대 위에 결박된 채 누워 있는 여성의 모습이 6분할로 띄워져 있었다.

“그녀가 김수지입니까?”

“네.”

재언의 놀란 표정에 눈치를 보던 이레일이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까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신이 들면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자해를 해서요…….”

“아이를 찾는데 왜 자해를?”

“아이는 신의 자식인데 자신의 시련이 부족해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점점 작아지는 이레일의 목소리에 동정이 섞였다.

“그보다 그녀가 임신한 게 아니라는 소리는 대체 무엇인가요? 그녀는 분명 배가 불러 있었어요.”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김수지는 집단성폭행을 당한 게 분명합니다. 그때의 충격으로 신의 아이를 뱄다는 망상에 빠졌고, 상상임신을 한 것 같습니다. 여기 자료를 보면 그녀는 약 석 달 전까지만 해도 공장에 나와 일을 했거든요. 그땐 전혀 배가 부르지 않았어요. 선생님께서 본 것처럼 배가 부르기 시작한 건 대략 한 달 전쯤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뉴스에서 그녀가 유산했다고 하던데…….”

“거짓이죠.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쪽에서 손을 쓴 게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 사무실에도 계속 압박이 들어오고 있는 상태고요. 물론 사장님께서는 코웃음도 치지 않으셨지만.”

이레일은 재언이 사다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레헬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면 선생님도 오셨겠다, 사장님, 시작할까요?”

레헬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레일은 책상 위에 있는 마이크에 ON이라 쓰여 있는 버튼을 누른 채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수지 씨. 여긴 레드-헬-파이어 사무실입니다.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 안 돼! 안 돼, 그 아이는 신의 아이야. 난, 난 신의 자식을 임신했었어! 그 애는 예수야. 나는 홀로 성자를 임신해서 그 아이가 세계를 구할 메시아가 될 때까지…….

이레일이 말을 걸자 그녀가 갑자기 온몸을 버둥거리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며 혀를 깨물려 입을 앙다물었다.

그 모습에 이레일이 재빠르게 다른 버튼을 눌렀고, 일사불란하게 의료팀이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 정신을 잃고 잠잠해진 그녀의 모습이 담긴 모니터를 뒤로하고 이레일이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차민재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재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물렸다.

“계속 이런 식이에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저리도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니…….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 알아낸 건 있습니다. 그녀의 배 속에 아이는 없었지만, 바티칸에 있어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거예요.”

“어떤… 무언가?”

바실리오와 관련된 물건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긴 재언을 보며 차민재가 손에 들고 있던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네. 그건 바티칸에 직접 가면 확인 가능할 겁니다.”

“그렇군요. …민재 씨, 지금 어디 가시게요?”

마치 외출하려는 듯 코트를 입기에 사람을 불러 놓고 어디 약속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딱히 데이트하자고 약속을 잡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재언이 김수지가 걱정되어서 그녀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자 차민재가 선뜻 사무실로 초대해서 온 거였다.

손님을 두고 어디 가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차민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뜻밖의 이야기였다.

“네. 바티칸으로 갑시다.”

민재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재언의 손목을 잡고 부드럽게 끌었다.

“…저도요?”

재언의 뒤에서 이레일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듯 응원의 목소리를 냈다.

“김수지 씨를 보호하는 건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선생님!”

민재가 이끄는 대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 재언은 눈앞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헬기에 입을 떡 벌렸다.

이웃 동네에 산책 가는 듯이 바티칸에 가자고 말하기에 어느 세월에 공항에 가서 티켓을 끊고 출국심사를 받아서 가나 걱정했는데, 이걸로 공항까지 가려나 보다.

“…잠깐만요, 그런데 진짜 바티칸에 가는 거예요? 그 먼 곳을? 맙소사… 저번에 프랑스에 다녀와서 죽을 뻔했는데…….”

2박 3일 만에 다녀온 프랑스 여행의 여독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여행 다음 날 출근하면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는데, 이번엔 더할 수도 있었다.

재언은 핸드폰을 들어 이번 주 월요일에 연차를 또 쓸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심했다. 하지만 차민재는 그런 재언을 아주 귀엽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항까지 안 가도 되니까. 거기도 제 전용기가 있긴 한데, 굳이 여기로 올라온 건 ‘이것’ 때문이거든요. 한번 쓸 때마다 돈이 조금 들긴 한데, 그래도 한두 번은 여유롭게 쓸 수 있으니까요.”

민재는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재언에게 설명하는 대신 이끌고 헬기에 올라탔다. 얼결에 헬기에 탄 재언은 안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조종석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민재가 헬기 조종도 할 수 있는 걸까.

곧이어 재언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 이, 이 미친! 설마 텔레포트 이펙트를 이 헬기에, 그 먼 바티칸까지 쓴 거야? 이, 이건 여유롭게 쓴다는 개념이 아니잖아!’

‘텔레포트’ 이펙트는 히어로 협회에서 만든 ‘별 쓸모없지만 유용한 물건’ TOP 10위 안에 드는 물건으로, 텔레포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능력을 추출해 일회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거리가 멀수록, 이동하는 물건이 크면 클수록 가격이 몇 배로 뛰었다.

그러니까 이 헬기를 한 번에 바티칸까지 이동할 수 있게 하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해야 하므로 웬만한 대기업 총수들마저 엄두도 못 낼 돈지랄이었다.

재언이 옆에서 경악하든 말든 단번에 로마에 도착한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두둥실 떠올라 바티칸으로 향하는 헬기 안에서 재언은 속으로 소리쳤다.

‘레드-헬-파이어, 이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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