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선생님. 신 선생님! 신재언 선생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재언은 현실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네네. 이레일?”
- 사장님도 참 너무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설명 한마디 없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재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해 주는 이레일의 목소리가 조종석 쪽에서 들렸다.
그에 차민재가 못마땅한 얼굴로 스피커 쪽을 흘겼지만, 재언은 이레일의 말에 집중하느라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 신 선생님. 지금 한국에 있는 교황은… 가짜일 겁니다.
“네? 가짜요? 그러면 진짜는요?”
- 신 선생님께서 향하는 곳에 있을 확률이 높아요. 저희가 김수지 씨에 대해서 조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교황청에 대해 뒷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은 자료를 토대로 저희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고, 아마 사장님은 그걸 직접 확인하러 가시는 걸 거예요. 하지만 일반인인 신 선생님을 굳이 끼어들게 할 필요는 없…….
이레일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돌연 뚝 끊겼다.
“이레일?”
더 이상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아예 통신이 끊긴 듯싶었다. 재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니 차민재의 손가락 끝에 버튼이 하나 눌려 있는 것이 그가 통신을 종료해 버린 모양이었다.
“민재 씨, 세웠다는 가설이 뭔가요?”
자기가 직접 이야기할 생각으로 통신을 끊었겠지. 아니면 사람을 아무 설명도 없이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뾰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재언의 눈빛에 민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흠… 재언 씨, 지금 바티칸 내에서 가장 핫한 이슈가 무엇일까요?”
“…타락한 추기경 아닐까요? 그들이 이를 갈고 추격한다는 건 몇 년 전부터 유명하잖아요.”
바티칸과 타락한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는 재언이 다크 카오스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사실이었다. 모두 쉬쉬하며 말을 아끼지만, 교황청이 이를 갈고 바티칸의 수치인 타락한 추기경을 뒤쫓는단 사실은 지나가던 개도 알 정도였다.
재언은 틈만 나면 바실리오의 시신을 되찾고자 타락한 추기경을 건드는 교황청에 이미 질린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대체 이번이 몇 번째 부딪치는 건지 모르겠다.
타락한 추기경이 절대로 바실리오를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제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사실 가설일 뿐이고 확실하지 않은 거라 직접 확인하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차민재는 턱을 괴고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헬기 조종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그가 재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은 뭐라 말해 줄 수 없다고 하면, 재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무작정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사람치고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사실 레헬이 데려오지 않았더라도 타락한 추기경을 위해 한 번쯤은 교황청에서 작당하는 일이 무엇인지 살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재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김수지 씨가 걱정되기도 하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찝찝하니 같이 가도록 하죠, 뭐. 그런데 제가 위험해지는 건 아니겠죠? 민재 씨는 들켜도 괜찮겠지만 저는…….”
구시렁거리는 뒷말을 듣긴 한 건지 차민재가 부드럽게 웃으며 재언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그럼 재언 씨, 이리 오세요.”
“네?”
재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구겨 가며 조종석 쪽으로 옮기자 좁디좁은 자리에 두 사람이 완전히 포개졌다. 이러다가 버튼이라도 잘못 누르면 어떡하나 재언이 걱정하며 몸을 뒤틀고 있는데 헬기 문이 벌컥 열렸다.
프로펠러 소리가 귓속을 얼얼하게 만들 정도로 요란한데, 이상하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헬기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가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스쳐 지나가듯 시선이 금방 돌아갔다.
사람들에게 헬기가 보이지도 않고 요란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헬기가 로마 시내로 들어서며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새겨진 반원형의 회랑이 감싼 모양을 한 커다란 광장 위에 멈췄다.
8년 전, 여행으로 와 봤던 곳이었다. 그리고 당시 축복받은 추기경이었던 에렌 성을 처음 본 곳이기도 했다.
그때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이었는데, 하늘에서 본 탁 트인 광장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잊을 만큼 장관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풍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갑자기 민재가 재언을 끌어안고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낙하산 없이 맨몸으로 추락하는 느낌은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무서웠다.
곧이어 두 사람의 낙하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더니 중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 레헬의 복수 능력 중에 마지막인 ‘무중력’이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인 헬파이어 능력도 무시무시했지만, 재언은 그가 가진 능력 중 ‘무중력’이 가장 무섭고 섬찟했다.
무사히 아래로 내려온 두 사람은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재언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심장이 아직도 벌렁벌렁 뛰었다. 스펙터클한 액션 영화에서나 본 것을 자신이 할 줄은 몰랐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두 사람은 관광객과 외부에서 온 신자들로 북적이는 거대한 광장을 지나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에 헬기가 떠 있고,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것이 굉장히 낯설었다.
거기다가 외부인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곳까지 망설임 없이 들어가는데도 제지하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존재감을 흐리게 만들어 주는 건가?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군. 요즘 히어로 협회에서 이상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 내네. 돈이 썩어 넘치나?’
히어로들이 만들어 낸 물건이 빌런 자식들이나 자신에게 좋을 게 없으니 기억해 두어야겠다.
망설임 없이 신부복을 입은 사제들을 지나 대성당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차민재의 뒤를 따라가던 재언은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언제 한번 그와 이 길을 걸었던 것 같은 데자뷔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그와 바티칸에 함께 와서 대성당 내부를 몰래 잠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앞서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분명 어디서… 그땐 이렇게 몰래가 아니라 좀 더 당당하게…….’
생각에 빠져 있던 재언은 저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들리는 웅성거리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민재 역시 소리를 들었는지 재빠르게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재언 씨, 앞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천천히, 소리 내지 않고 갑시다.”
사람의 눈에 들키지 않도록 아이템을 썼어도 일반인이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는 신성력이 강한 사제들이 많았기에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했다. 사실 신재언이나 차민재나 혼자 있을 땐 조심할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
모퉁이를 지나자 신부복을 입은 사람들과 하얀 가운을 입은 의료계 종사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 조금 멀었기에 그들끼리 나누는 이야기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제법 다급한 표정으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이윽고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의 걸음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숨은 곳까지 사람들이 다가왔다.
“아직 바실리오 경의 시신을 되찾아 오지 못했는데, 그분께서 신의 곁으로 떠나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기둥 뒤로 숨은 재언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재언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차민재와 시선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어딘가를 향해 허겁지겁 뛰어가는 사람들의 뒤를 놓치지 않고 밟았다.
그들이 대성당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지나 도착한 곳은 교황이 집무를 보고 거주하기 위해 세워진 궁전 내부였다. 화려한 예술품으로 채워진 건축물을 감상할 틈도 없이 두 사람은 사람들을 쫓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방의 내부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는 넓은 침대와 침대를 에워싸고 서 있는 성직자들로 가득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침대 위에는 낯익은 노인이 한 명 누워 있었다.
한국에서 본 교황은 인자하고 생기가 넘쳤는데, 이곳에 누워 있는 노인은 이레일에게 미리 언질 받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초췌하고 엉망인 몰골이었다. 생기 없는 눈빛을 한 노인이야말로 악마에 씐 것만 같았다.
“중간에 악마가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김수지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분을 잉태해 낳아 주실 성모님이 되었을 텐데……. 그녀는 결국 악마의 자식을 태어나게 하고 말았습니다.”
“항상 절조를 지키시던 분들이 그런 과오를 왜 저질렀겠습니까? 그분들은 결국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번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대한 사항인지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이…….”
“아아, 그 때문에 교황께서 저주를 받았으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듣던 재언은 바티칸의 수뇌부들이 어쩜 이렇게까지 사이비 같은 발언을 할 수 있는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사이비였다.
교황이 저러고 있으니 당연히 그의 축복을 받은 이단 심문관이 이상한 걸 숭배하고 있지!
질린 표정을 짓는 재언의 귓가에 민재가 속삭였다.
“재언 씨. 과거의 그들은 오로지 믿음만으로 신을 숭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신께 기도를 올렸다고 하지요. 추기경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교황은 공정하게 투표로 선출되었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랬던 바티칸이 지금은 이 꼴이라니.’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신성력이라는 힘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신의 기적이라 믿은 그들은 주교급 추기경의 수를 제한하고 가장 강한 기적과 축복을 내릴 수 있는 자로 교황을 선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엇나가기 시작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