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그들이 김수지에게 성모의 역할을 원하는 것도, 메시아를 태어나게 하려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도 의문 하나가 풀리지 않았다.
왜?
과연 인간이 만들어 낸 성모가 진정한 신의 자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만약 메시아가 태어나는 데 성공한다면, 그를 내세워서 무슨 짓을 꾸미려는 것일까.
대체 그들이 바라는 결과가 무엇이기에 이런 파렴치하고 잔악무도한 짓을 벌이는 걸까.
그것도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구원자를 태어나게 한답시고 악마보다 더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재언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사이,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크고 화려한 보석함을 든 수녀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금으로 만든 테두리에 루비가 박힌 휘황찬란한 보석함이었다.
그러자 침대 곁에 있던 신부가 다가와 보석함을 열고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지? 잔인가?’
휘황찬란한 보석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많이 낡고 대접 같은 토기 잔이었다. 하지만 잔에서 풍기는 사념은 재언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강했다.
사제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가늘고 찢어져 있어 귀에 쿡쿡 박혔다.
“고귀한 술잔에 어서 교황님의 피를 담으세요. 이대로 가다가 우리는 모두 신의 축복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는 참담한 표정으로 성호를 긋더니 이번엔 보석함 안에서 막대기 같은 것을 꺼냈다. 자세히 보니 술잔만큼 낡은 나무못이었다.
재언은 못이라기엔 말뚝같이 기다란 물건으로 뭘 하려나 싶은 마음에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그러다 더 이상 놀랄 게 없다고 생각한 자신을 반성하며 경악에 빠졌다.
교황이 누워 있는 침대 곁에 선 사제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교황의 손을 잡고 손등에 못을 대고 망치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못이 손등을 뚫고 깊숙하게 들어갔다.
‘저게 거대 종교의 수장이자 바티칸시국의 군주인 사람에게 할 짓인가!?’
지켜보는 재언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전에 체어맨이 사냥감을 데려와 저런 식으로 고문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열 살 난 딸을 단돈 300달러에 사창가에 넘긴 파렴치한 부모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들에게 교황은 신의 지상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인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눈앞의 광경이 현실인지 도저히 믿어지질 않았다.
이윽고 못에 뚫린 교황의 손바닥 아래로 피가 뚝뚝 흘렀고, 그들이 말하는 고귀한 술잔에 한 방울씩 담기고 있었다. 이윽고 술잔에는 피가 찰랑거리도록 가득 담겼다.
그런데 저렇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의외로 지극히도 우울하고 비관적이었다. 본인들이 하는 짓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걸까.
검은색 사제복의 사제가 피를 가득 담은 술잔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교황에게 성호를 긋고 기도드리며 감사하다고 읊조린 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를 뒤따라 보석함을 들고 온 수녀는 교황의 손등에서 나무못을 뽑아 손수건으로 닦고 다시 원래대로 보석함에 넣은 뒤 허리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신부 몇 명과 의료인들만이 분주하게 뒷수습을 하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으윽… 저게 뭐 하는 짓일까요?”
나무못이 뚫렸던 교황의 손등은 술잔을 가득 채울 만큼 뚝뚝 떨어졌던 것이 무색하게 지금은 피가 흐르지 않았다. 못을 뽑아내면서 바닥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재언은 문득 아까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을 또다시 느꼈다.
분명히, 자신은 여기에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연코 이곳 바티칸 깊숙이, 그것도 교황의 궁전까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레헬과 함께는 더더욱.
‘이 악마야!’
눈앞에 마치 환각처럼 검은 남자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은 이곳을 지나며 웃고 있었다. 비웃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즐거워서 짓는 웃음도 아니었다.
‘이 악마야! 여긴 지나가지 못한다!’
다른 바티칸의 사제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런 두 사람의 발목을 잡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서려 애썼다. 재언의 눈앞에서 사제들이 불타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재언이 눈을 깜박이자 방금까지 보았던 아수라장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앞에서 의료인이 침대에 누워 있는 교황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 수액을 맞추는 중이었다.
“베드로 추기경. 만약 한 번 더 피를 뽑는다면… 교황님께선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 쇠약해지셨어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놀랍게도 추기경이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재언은 그가 평범한 신부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반드시 있어야 할, 추기경을 따르는 성기사가 보이지 않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대충 상황이 수습되자 추기경이 술잔을 든 채 허리 숙여 교황에게 인사한 뒤 방을 나가고, 그 뒤를 따라 보석함을 든 수녀도 함께 사라졌다.
저들을 저렇게 보내도 되나 고민하던 재언은 엔레이드맨에게 그들을 뒤쫓아 가라고 몰래 명령하려다가 민재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라 입을 닫았다.
“재언 씨, 저는 저들을 쫓아 저 피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주세요.”
“민재 씨 혼자 쫓아가게요?”
“네. 저 혼자 가서 입을 열게 할 생각입니다.”
천사 같은 얼굴로 내뱉는 말이 무섭기 짝이 없었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두고 어떻게 고문할까 고민하는 체어맨이 떠오를 정도였다.
때마침 다른 사제들과 의료진들도 전부 방을 빠져나가고 방 안은 송장처럼 누워 있는 교황 혼자 남았다. 하긴, 자신이 나서 봤자 짐일 테니 같이 움직이는 것보단 레헬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훨씬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재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차민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걸 쓰세요.”
손안에 건네받은 것을 살펴보니 잭나이프처럼 생긴 작은 주머니칼이었다. 접힌 부분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시퍼런 칼날이 확 펴졌다. 조금만 잘못 만져도 살이 베어나갈 것만 같았다.
“이런 걸 왜 주는 거예요?!”
“재언 씨한테 이상이 생기면 제가 바로 달려오긴 할 텐데, 그동안은 재언 씨도 몸을 지킬 수 있어야죠.”
혹시라도 재언이 칼날에 베일까 조심스럽게 칼을 접어 손바닥 위에 다시 올려 주며 수줍게 웃었다.
“이걸로 사람 두어 명 죽여도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산뜻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하네!’
말문이 막힌 재언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민재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주더니 방을 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재언은 민재가 부디 교황청이 꾸미는 일과 목적을 알아내 와 주길 바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제정신 아닌 내용일 게 분명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반, 대체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단에 타락한 추기경이 왜 포함되어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반이라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개미 한 마리 지나가는 소리 없이 정적에 휩싸인 방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재언은 조심스럽게 교황이 누워 있는 침대를 지나 창문으로 향했다.
‘너는 입을 잘못 놀려서 명을 재촉한 거야.’
갑자기 재언의 귓가에 한 남성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두통에 재언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휘청거렸다. 결국,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자 엔레이드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그마저도 환청의 일부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이대로라면 놀란 엔레이드맨이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아 재언은 다급하게 손을 들어 휘저었다.
일련의 소란 때문인지 죽은 듯 누워 있던 교황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재언은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숨을 죽이고 기척을 없애려 했다.
“거기 있나? 다크 카오스.”
적어도 교황이 이런 식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면 분명 완벽하게 기척을 숨겼을 것이다. 재언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침묵했다.
하지만 차민재가 걸어 준 ‘존재감을 숨기는 능력’의 효력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그것으로는 교황의 눈을 속일 순 없는 것인지 그의 푹 꺼진 눈동자가 재언의 얼굴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다크 카오스의 얼굴은 세계의 미스터리 TOP 3에 드는 것으로 그의 자식들이 아니면 정체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교황은 마치 익숙하다는 듯 재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치 처음부터 다크 카오스의 얼굴을 아는 사람 같았다.
“‘그곳’에서 죽기 전에 신께 축복을 받아 기억을 물려받을 수 있었지. 쿨럭… 이곳은 거기와는 달리 아주 평화로운 곳이야…….”
“…….”
“이곳에선 어쭙잖게 히어로 흉내나 내고 있나 보지……. 네 충실한 ‘개’를 히어로로 만들기까지 하고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너의 충실한 ‘개’와 함께 여기까지 찾아와 나를 죽였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두 바뀌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넌 네 ‘개’와 함께 날 찾아왔어……. 역시 운명은 바뀌지 않아.”
마치 오랜 친우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듯 교황의 목소리가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사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아, 다크 카오스……. 사람들은 언젠간 네가 오만하고 자신들을 기만했다는 걸 눈치채게 되겠지. 넌 또다시 실패할 거다.”
교황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신재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혼란스러운지, 아니면 뜻 모를 소리를 들었다는 듯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
짧은 한숨 소리를 내뱉으며 신재언은 천천히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솟아나 있었고 얼굴에는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또 명을 재촉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