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사람에게는 각자가 가진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신재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머리를 쓸어 넘기며 교황을 내려다봤다. 푸른색 눈동자에 숨기지 못한 오만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다크 카오스. 사람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이지 선택할 수 있다 해서 마치 신이라도 된 것 같으냐?”
“그 말을 네 입으로 듣고 싶진 않은데. 너희가 한 짓과 내가 한 짓, 어느 쪽이 더 악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에 든 잭나이프의 버튼을 눌러 칼날을 빼냈다가, 다시 접기를 반복하며 교황을 내려다봤다.
“넌 내가 또다시 실패할 거라고 말했지. 틀려… 난 실패 따위 하지 않아.”
“이곳으로 오기 위해 넌 뭘 걸었지?”
교황이 1분, 1초라도 더 살고 싶어서 말을 거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신재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
신재언이 서늘하게 웃으며 잭나이프를 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면… 도르레프. 이번에도 ‘지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으라고.”
교황이 세례명을 받기 전의 이름은 바티칸의 누구도 알지 못할 만큼 극비였지만, 신재언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부르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당연하게 불렀다.
@
약 10년 전, 스무 살의 신재언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나 상경했다.
그의 부모님은 매우 걱정하며 몇 번이고 근처의 지방대학을 다니는 것이 어떠냐 설득했지만, 재언의 뜻은 완고했다. 고등학교 시절 죽자 살자 공부했던 이유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전에 어머니가 서울에 놀러 가셨다가 괴한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으니 그 걱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언은 하피로서의 특징이 눈에 띄지 않으니 조심한다면 들킬 일도 없었다.
대학에 입학한 재언은 꾸준히 좋은 학점을 유지하며 기숙사에 들어가고 장학금도 빠트리지 않고 받았다. 잘생기고 체구도 좋은 편이라 1학년 때부터 학과에서 소위 ‘남신’이라고 불리는 인기인이었다.
2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 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아이돌 다음으로 유명해졌다. 오죽하면 다른 학과 후배들마저 재언을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재언이 학과에서 주최하는 MT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신입생들은 물론 취업 준비에 열중해야 할 4학년과 학점 수료생, 휴학생들까지 참여 문의가 빗발쳤다.
유례없이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학과 MT는 강원도의 어느 산 중턱에 있는 펜션에서 진행되었다.
버스로 가는 데 4시간이나 걸리는 아주 먼 곳이라 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장소를 선정했냐며 많은 이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과 대표는 4년마다 이곳을 방문하는 게 학과 전통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불만을 모두 묵살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어찌어찌 무사히 펜션에 도착한 재언은 짐을 나르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소주 짝에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얼마나 마시려고 저만큼 가져온 건지 모르겠다.
여기까진 여느 MT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재언을 골 때리게 만든 것은 과 대표가 말버릇처럼 말하는 그놈의 학과 전통이었다.
바로 늦은 밤에 으슥한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담력 시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녀 2인 1조로 움직여 길목 중간마다 있는 도장을 찍어 오는 게 미션이었다. 도장은 총 10개, 놓친 개수만큼 선배들이 주는 사랑의 술을 마셔야 한다는 미친 벌칙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여학생들은 눈에 불을 켜고 신재언과 같은 조를 짜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남학생들의 질투 어린 눈초리에 눈치를 보던 과 대표는 이때만큼은 현명하게 제비뽑기로 조를 결정하자는 의견을 냈다.
제비뽑기로 뽑힌 재언의 짝은 동기 여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을 때 재언에게 고백했던 동기였다.
물론 그때도 확고하게 게이였던 재언은 고백을 거절했었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녀가 고백을 거절했던 자신과 마주하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그런데 재언과 마주하자마자 발그레하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니 죄책감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어쨌든 선배들이 뭘 섞을지 모르는 술을 한 잔도 마시고 싶지 않았던 재언은 필사적으로 산을 오르며 도장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코너에 있는 도장을 찍는 곳으로 다가갔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에 의해 뒤로 주춤했다.
재언이야 이때쯤에 귀신 분장을 한 4학년 선배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예상했기에 그리 많이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재언의 옆에 있던 여학생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 버렸다.
문제는 도장 찍는 곳이 절벽에 가까운 코너였다는 것이고, 재언 팀이 두 번째로 출발했다는 점이었다. 이곳에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비록 가드레일로 막혀 있다고는 하지만, 무릎보다 조금 높은 높이였기에 그녀가 뒤로 넘어지면서 아예 지렛대처럼 머리부터 아래로 몸이 발라당 넘어가려고 했다.
재언은 생각하고 앞뒤 잴 것도 없이 뛰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빙글 돌렸다. 그 반동으로 여학생은 안쪽으로 내던져졌고, 재언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꺄아악!”
귀신으로 분장한 선배와 같은 팀이었던 여학생의 찢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재언은 그대로 추락해 정신을 잃었다.
.
.
.
톡, 토독-.
재언은 자신의 얼굴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꽤 높은 데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다친 곳 없이 정신을 차린 게 기적이었다. 나중에 와서 돌이켜 보면 이때 평생 쓸 ‘럭키’를 다 써 버린 게 아닐까, 그런 의혹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무성한 나무 때문에 바로 땅으로 떨어지지 않아 충격을 덜 받은 듯했다. 게다가 바닥도 바위가 아니고 부드러운 흙과 나뭇잎이 쌓여 있어 살아남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한밤중인 데다 설상가상으로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우 살았는데 이대로 멍하니 있다간, 저승길을 밟을지도 몰랐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살려 주세요!”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봤지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다. 게다가 온통 어둠으로 막혀 있는 시야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재언은 무작정 일어나 수풀을 헤치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친 발목이 부어서 걸을 때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원래라면 그 자리에서 가만히 구조를 기다려야 하는 게 맞으나 스물한 살의 겁에 질린 청년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몸이 이끄는 대로 걷던 재언이 걸음을 멈춘 곳은 또 다른 절벽으로 막혀 있는 휑한 공터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사람 형체가 들어왔다.
“어두운 산속에 가면 안 돼. 뭐가 널 끌고 갈지 몰라.”
재언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항상 해 주셨던 말이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저건 귀신이거나 인간이 아닌 미지의 생명체가 분명했다. 재언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다친 발목의 통증이 갑자기 심해져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덜덜 떨고 있는 재언의 귀에 절벽 아래에서 노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젊은이. 이리 와 보게.”
“…….”
귀신치곤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웠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재언이 경계하며 움직이지 않자 노인의 주변으로 불꽃이 하나둘씩 피어났다.
“…능력자?”
“맞아. 그러니 이리 와 봐.”
불꽃 덕분에 환해진 시야에 보이는 사람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이 온통 희게 센 노인은 절벽에 기대 재언에게 손짓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재언이 느릿하게 다가올 때까지 노인은 말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인의 곁에 다가간 재언은 따뜻한 온기를 담은 불꽃 덕분에 몸이 사르르 녹는 걸 느꼈다.
“…저, 혹시 할아버지도 조난 당하셨습니까?”
“글쎄? 어떨 것 같나.”
“…….”
“이런 야심한 밤에 우리 둘이 만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운명 일터, 이 노인의 마지막 부탁을 좀 들어주겠나.”
이렇게 갑자기?
무슨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조난 당한 산속에서 만난 노인이 운명이니 뭐니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노인이 조난 당한 두려움에 이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뭡니까?”
“내가… 사람 한 명을 찾고 있어.”
“사람이요?”
“그래. 정말 중요한 사람인데……. 그를 잃고 말았거든. 그러니 젊은이가 좀 찾아 주었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누군데요?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면 되는 건가요? 인적사항을 알려 주시면 제가 신고를…….”
말하는 와중에 노인이 갑자기 팔을 뻗었다.
일으켜 달라는 건가 싶어 재언은 노인을 부축하려 했다. 다리를 다쳐 누구를 도와주긴 힘들었지만, 노인이 부축해 달라는데 매정하게 굴 수는 없었다.
구조될 때까지 능력자인 그의 곁에서 도움을 받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노인의 손에서부터 어두운 안개 같은, 아니 그보다 더 검은 무언가가 솟아나더니 재언의 왼팔을 휘감았다.
“뭐야!?”
“이 힘을 네게 줄 테니, 넌 그를 찾아 주겠다는 내 약속을 꼭 들어줘야 해. 알겠지?”
노인은 깜짝 놀라 손을 놓으려는 재언의 팔을 악착같이 붙잡으며 웃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재언은 노인의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약속의 증표라는 듯 재언의 왼쪽 팔뚝에는 검은 용이 그려진 문신이 새겨졌고, 재언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있던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노인에게 받은 괴상한 능력이 바로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