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을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한 재언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노인을 샅샅이 찾아다녔지만, 이미 그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뒤였다.
때마침 재언을 구하러 사람들이 도착해 치료를 받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증오’로 각성한 능력자가 사회에 무슨 도움을 주겠냐는 생각에 재언은 절대로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왼쪽 팔뚝에 새겨진 검은 용 문신이 너무나도 눈에 띄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게 신경 쓰였다. 히어로 협회에 찾아가 문의하니 ‘저주’받은 것 같다고 말해 줄 뿐, 어떤 대처도 해 주지 않았다.
재언이 해주를 요청하자 저주의 범위, 상태와 히어로 등급에 따른 금액 리스트를 내밀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저주가 강력할수록 지불해야 할 금액이 점점 커졌다.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고,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대학 생활을 이어 가야 하는 학생인 재언은 돈을 지불할 엄두도 못 내고 돌아서야 했다.
그리고 조금씩 돈을 모아서 가장 낮은 금액의 해주 의뢰부터 요청하기 시작했다. 물론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재언은 그 돈으로 집을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높은 금액의 해주 의뢰부터는 단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에 A급 히어로에게 해주를 받던 중 재언은 뜬금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불쑥 물었다.
“혹시 능력을 전이시키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러자 처음 보는 A급 히어로가 재언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능력은 그 사람의 안에 새겨진 영혼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런 일은 들어 본 적도 없고 사례도 전혀 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재언은 그런 사례가 눈앞에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믿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 능력을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역시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이후의 신재언은 능력을 아홉 번이나 사용했으며, 그가 각성시킨 빌런 자식이 여덟 명이나 되어 버렸다.
문득 떠오른 과거를 곱씹으며 신재언은 교황의 궁전 내부를 느릿하게 걸어 다녔다. 운이 좋은지 아닌지 그동안 어느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정말 끔찍하게 재미없는 일이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정교하고 절제 어린 아름다움이 특징인 궁전을 감상하던 그의 어깨를 갑자기 누군가가 잡아챘다. 신재언은 어깨를 잡은 손길에 매서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재언 씨? 왜 나와계십니까?”
“…아.”
재언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민재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곧이어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목이 메는지 헛기침을 몇 번 내뱉은 후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정신 차리니까 밖이네요.”
그의 대답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길 법한데도 차민재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와 재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조심스럽게 재언을 이끌고 밖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애정행각을 하려는 건 아니었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 때문인 듯했다.
존재감을 지워 주는 능력이 효력이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들키면 꽤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재언을 이끌고 궁 밖의 정원으로 나온 민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으로 가져다 댔다. 손바닥만 한 작은 피리같이 생긴 물건을 입에 대고 부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서 밧줄 사다리가 두 사람의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위쪽에 있는 헬기에서 내려온 겁니다. 먼저 올라가세요.”
이상하다. 분명 헬기 안에는 차민재와 자신 뿐이었고 둘은 밖으로 떨어졌으니 헬기 안에는 아무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마치 누가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바티칸 상공을 활보하다 때마침 사다리를 내려보내다니. 게다가 사다리만 보일 뿐, 위쪽에 있을 헬기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의문을 품은 채 재언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차민재는 뒤쪽에 눈길을 한번 준 뒤에 한 손으로 사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소리 나지 않는 피리를 다시 한번 불자 사다리가 위로 쑤욱 올라갔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사다리가 구름에 닿자 드디어 헬기의 모습이 육안으로 드러났다.
재언이 헬기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 잡은 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려다봤다.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조종하는 거예요?”
그러자 민재가 뒤이어 올라오면서 작게 웃었다.
“아무도 없지 않아요.”
“네?”
“지금 조종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B급 히어로예요. 그리 위협적인 능력은 아니지만, 제법 쓸모 있을 것 같기에 사무실에서 고용했어요.”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
히어로 협회에서 만든 아이템이거나 레헬의 사무실에서 다른 능력자가 원격으로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사실 한 명이 더 있었던 거였다니. 재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하긴, 한국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엄청난데 원격조종은 어려울 것이다. 그건 천하의 레헬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말씀해 주지 그랬어요.”
“조종석 옆에 타지 않아서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냥 문이 열려 있는 곳에 탄 건데, 저런 착각을 했을 줄이야.
“그래도 의식하기 시작하면 모습이 보일 거에요. 그의 히어로 명은 ‘투명한 마술사’입니다. 인사를 해도 받지 못할 거예요. 그는 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거든요. 이 특수한 소리를 내는 피리 소리만 들을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조종석에 앉아 있는 희미한 실루엣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존재감도 희미한데 귀도 들리지 않으니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눈과 관련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겐 통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광안의 성녀가 곤란에 빠진 그를 도와주고 내게 소개해주었습니다.”
헬기를 조종하고 바티칸에 몰래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던 아티팩트 능력의 주인공도 이 사람인 모양이었다. 상당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것보다 재언 씨, 쫓아갔던 수녀와 신부에게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대충 설명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차민재가 별안간 본론을 들이밀었다.
“무슨 일인데요?”
“지금 교황청 수뇌부 쪽에선 제법 심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성직자들의 신성력이 점점 사라지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그 대단하다는 주교급 추기경마저 일반 사제급에 지나지 않는 신성력을 가졌다 합니다.”
심각한 사항을 이야기하는 민재의 목소리가 매우 경쾌하고 즐거워 보였다. 하긴, ‘그’는 옛날부터 바티칸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아니, 좋아하긴커녕 싫어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몰락이 제법 기꺼운 모양이었다.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점에 재언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차민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예수가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여 준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고 싶어 했던 거죠. 머리가 360도로 돌아 있는 놈들 답게 멍청한 짓을 저질러 오히려 교황이 저주를 받고 말았지만요.”
“360도 돌았으면 제자리 아닌가요?”
“대가리가 돌아왔다고 목이 정상인 건 아니잖아요.”
뭐… 생각해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저주받은 교황의 피로 뭘 했던 거죠?”
“예수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했다는 ‘고귀한 술잔’에 성자의 피를 담아 마시면 일시적으로 교황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나 봅니다. 바티칸에서 자랑하는 주교급 추기경들은 언제나 대중에게 노출되어 있으니, 신의 축복이 사라졌다고 하면 큰 혼란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죠.”
하긴, 바티칸이 그렇게 자랑하는 신성력으로 히어로 협회를 거부하고 국력을 세웠으니, 그 사실을 더욱더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대중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교황의 피를 마시며 끝이 보이는 사기극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더 이상 바티칸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바닥이 보이니 급했던 모양이죠. 김수지를 찾아 바실리오라는 성기사의 영혼을 되찾으려 했다고 합니다.”
타락한 추기경도 그의 시신은 가져올 수 있었으나, 영혼까지는 구해 내지 못했다.
‘그럼 지금 김수지의 몸속에 있었던 것이 바실리오의 영혼이라는 소리인가? 이 얘기를 타락한 추기경이 듣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야.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바실리오를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큰일 날 뻔했어.’
가슴을 쓸어내리는 재언의 귀에 비웃는 듯한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김수지는 바실리오 성기사의 영혼을 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절벽에서 한걸음 남은 그들에게 그런 것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죠. 그들이 원하는 건 사실 바실리오 성기사보단 타락한 추기경일 테니까요.”
타락한 추기경은 비록 타락했지만, 아직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가진 능력이 시신을 망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넘치는 사기로 피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고귀한 술잔에 담을 진정한 성자의 피는 타락한 추기경일 테고, 김수지가 잉태해야 할 예수는 바실리오 성기사였을 테죠. 하지만 바실리오 성기사는 그들 생각보다 바티칸에 큰 미련이 없었나 봅니다. 김수지를 통해 그의 영혼이 이미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 그의 육신을 되찾아 영혼이 어디 있는지 찾을 예정이었겠지요.”
“…신이 그들을 버릴 만하네요.”
“그러게요. 신은 그들을 버렸지요.”
재언은 멍하니 비열하게 웃는 차민재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히어로보단 악당에 더 가까웠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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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남자가 피범벅이 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신재언은 멍한 얼굴로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봤다. 문득 남자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고통스러울 텐데도 오히려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
“…….”
“형, 만족해?”
불타오르는 도시.
어딜 가도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두 번 다시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