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40화 (140/324)

140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바티칸에 왔을 때처럼 텔레포트를 이용했다. 몇억이 순식간에 그저 이동을 위해 증발해 버렸다.

두 번의 순간이동 금액을 합치면 재언이 사는 집의 매매가보다 높았다. 즉, 재언이 한 20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월급을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한국의 사무실 건물 옥상으로 도착한 차민재는 헬기에서 내리며 투명한 마술사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재언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참 식사 중이었던 이레일이 벌떡 일어나 둘을 반겼다.

“사장님, 신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이레일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이제 막 늦은 저녁을 먹는 걸 보니 종일 김수지가 잘 때까지 감시하느라 제대로 된 끼니도 챙기지 못한 듯했다. 레헬이 너무 지나치게 사이드킥을 부려먹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나중에 이레일의 연봉에 대해 듣게 된 재언은 그 정도면 영혼을 갈아 넣어도 될 만큼 충분하다고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능력만 있으면 내가 레헬의 사이드킥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장님, 뭐 알아 오신 것 있습니까? 가서 사고 치신 건 아니죠?”

궁금해하는 이레일에게 레헬은 바티칸에서 있었던 일과 알아낸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이레일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더니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자신이 들어도 기가 막힐 정도인데 이레일은 오죽할까. 끝까지 이야기를 들은 이레일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말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요?”

“바티칸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면 말리는 시늉이라도 할 사람이 나왔겠지. 하지만 정신 나간 놈들끼리 작당을 하는 데 누가 말리겠어. 그런 놈들이 수뇌부라는데.”

그 순간, 레헬의 넓은 사무실 벽에 설치된 벽걸이 TV에서 흘러나오는 히어로 뉴스 속보가 세 사람의 귀에 꽂혀 들어왔다.

볼륨을 최대한 작게 해 놨는데, 때마침 세 사람이 주목할 만한 속보가 흘러나왔다. 이레일이 리모컨을 조작해 TV의 볼륨을 높였다.

- 갈리스토 270대 교황이 오늘(30일) 한국 시각으로 저녁 서거했습니다. 방한 중에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가 원인입니다. oo 대학병원에서 교황의 사인은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당국은 귀빈을 위해…….

TV에서 눈을 떼고 마주 본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레일이었다.

“…한국에 내한했던 교황은 대리가 맞았죠, 사장님?”

“맞아. 진짜 교황이 바티칸에 있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교황 대리는 멀쩡하게 스케줄을 이행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죽은 걸 보면 바티칸에서 손을 쓴 게 분명합니다.”

“실제 교황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대리를 죽인 거겠지.”

차민재가 덧붙인 말에 이레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내밀었다.

“사장님! 정말 가서 아무것도 안 하신 거, 맞죠?”

“안 했어.”

차민재는 의심하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엉겨 붙으려는 이레일을 귀찮은 듯 성의 없이 밀어 버리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재언은 그런 둘의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면서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까 교황의 궁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갈리스토 교황은 마음에 들지 않는 세속적인 놈이었다. 신성력을 강하다는 것만 빼면 뭐 하나 잘난 것 없는데 사사건건 입에 발린 소리를 내뱉으며 뒤에선 구린 짓을 서슴지 않게 저질렀다.

자기보다 뛰어난 성직자가 나타나면 눈에 불을 켜고 없애려 드는데, 그게 어떻게 신을 모신다는 놈일 수가 있나. 그의 언행마다 신재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실 타락한 추기경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분명 갈리스토 교황은 신에게 사랑받으며 신자들에게 인기 있는 에렌 성을 질투했을 것이다.

에렌 성이 바실리오와 떨어졌고, 때마침 스토커가 바티칸 한복판에서 에렌 성을 납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하여 결국 에렌 성을 수장시키려고 했던 것까지 전부 누군가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에렌 성이 겪은 일련의 일들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금의 넌 죽일 가치도 없는 놈이지. 네 업보잖아? 이렇게 짐승처럼 가둬져서 신성력이나 쪽쪽 빨리는 인생이라니. 넌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뒈질 테니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네 목숨은 정말 보잘것없고, 내게 전혀 가치가 없거든.”

교황의 왼쪽 귀 옆에 칼을 꽂아 넣고 작게 속삭인 신재언은 힘없이 비명을 지르는 교황을 그대로 두고 방 밖을 빠져나갔다.

베개에 꽂힌 잭나이프를 뽑아 챙기고 신재언의 뒤를 엔레이드맨이 부랴부랴 따라오며 눈을 찌푸렸다.

- 아버지?

자신이 알고 있는 재언과 어딘지 다른 분위기라 엔레이드맨이 잔뜩 경계 어린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엔레이드맨을 바라보는 신재언은 방금까지 풍겼던 위험한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원래의 그로 돌아왔다.

어쨌든 자신은 교황을 죽이지 않았다. 만약 교황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시점은 자신이 방에서 나온 이후일 것이다. 부디 여기서 더 골치 아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재언은 마치 안개가 가득 낀 기억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려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교황 때문에 불완전하게 각성한 기억 때문에 지금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얼토당토않은 현실에 남들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못하겠다.

‘머리도 아프고, 뭔가가 떠오르려 하는데 마치 막에 씐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해.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저 남자와 거기에서도 잘 아는 사이였어. 그는 나를 기억하는 걸까? 대체 우리는 무슨 관계였던 거지? 그것 때문에 처음부터 나한테 접근한 거였어?’

차민재는 막무가내로 직진하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을 법한 일들을 저지르는 게 문제였지.

아무것도 뚜렷한 게 없지만, 머리가 아픈 만큼 이상하게 차가워졌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구는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가장 의문스러운 건 ‘그곳’의 자신 또한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고민하고 있어 봤자 명쾌하게 풀리는 것도 아니니 시간이 지나 기억을 모두 되찾으면 의문이 전부 풀릴지도 모른다.

생각에 빠진 재언을 현실로 끌어낸 건 TV로 뉴스 속보를 본 뒤에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던 이레일이었다.

“김수지를 강간했던 신자들을 찾았어요. 2명은 바티칸에서 직접 파견된 사제들이고 2명은 한국의 서울교구에 있는 신부였어요. 그중에서 3명은 이미 죽어서 시신으로 발견됐고, 1명은 경북에 있는 여관에서 발견되었답니다. 경찰이나 바티칸에서 발견하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써서 살릴 수 있었어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래서, 알아낸 게 있었나요?”

재언의 물음에 이레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복사기에서 이제 막 인쇄되어 나온 서류들을 가지고 와 내밀었다.

“그자의 말을 들어보면 교황청은 김수지에게 바실리오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그녀의 자궁에 주입했는데, 어느 순간 기억이 날아갔고 그녀를 겁간하고 있었다는군요. 본인은 악마에 씌었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저 변명일 뿐이에요.”

“파렴치한 놈들이네요. 김수지 씨 상태는 괜찮아지고 있는 게 맞나요? 아까 보니까 그리 좋아 보이진 않던데.”

“그래도 차근차근 나아지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레헬이 히어로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빌런에 더 어울린다고 종종 비난했다. 하지만 재언이 봤을 때 그는 충분히 히어로로서 어울리는 남자였다.

결국, 그는 곤란한 시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지금도 모든 귀찮음을 감수하고 김수지를 구했다. 그것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고 더 바빠지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바티칸은 건들면 귀찮은 놈들이라 다른 히어로들도 적으로 두기 꺼리는데 레헬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다음에 차도가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사실 이유가 없어도 전화하고 싶어요.”

재언을 집 앞으로 데려다준 차민재가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아 왔다. 그에 재언은 홀린 듯 멍하니 대답했다.

“그래요. 바쁜 일 끝나면 전화해요. 기다릴 테니까.”

재언의 대답에 차민재가 기쁜 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여 입술을 부딪쳐 왔다. 짧게 키스를 나눈 뒤 재언이 먼저 등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재언의 등을 바라보던 차민재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웃고 있던 표정을 지우고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온 재언은 방 안에서 그의 차가 저 멀리 사라지는 걸 지켜보다가 얼른 뒤를 돌아 체어맨의 문으로 들어갔다.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의 지하로 들어가 라파엘을 가둔 감옥으로 향했다. 그곳은 체어맨의 개인 공간이지만, 가끔 사람을 가둘 때 쓰기도 했다.

재언이 지하로 내려가자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아직도 기도하고 있었다. 저놈은 사이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저렇게 착실한 척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왠지 그가 기도드리는 대상은 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재언의 뒤쪽에서 엔레이드맨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자의 정신 상태는 매우 썩었습니다, 아버지. 둠(doom) 안에서 봤던 걸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요! 저놈의 얼굴 따위 더 보고 싶지도 않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후다닥 도망치는 엔레이드맨의 뒷모습을 황당한 얼굴로 지켜보던 재언은 고개를 돌려 라파엘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미친놈인 게 분명했다.

‘그 엔레이드맨을 쫓아내다니……. 이놈도 제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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