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자세히 살펴보니 라파엘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온몸에 생긴 자잘한 상처들과 핼쑥해진 얼굴에 특히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게 라파엘의 잘난 외모에 처연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어서 조금 짜증이 났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재언은 고민에 빠졌다. 바티칸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이 자식을 데려오긴 했는데, 교황이 급사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얼굴을 알게 돼 버린 그를 쉽게 놔줄 수도 없다.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지금부터 생각해 두어야 했다.
‘거기다 이단 심문관은 교황의 축복을 받고 있지. 교황이 죽었으니 그에게 내리던 축복도 사라졌겠군.’
라파엘은 자신이 순식간에 처치 곤란한 폭탄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문득 저런 정신 나간 놈이 신이라는 존재에게 무엇을 빌지 궁금해졌다.
“신에게 뭘 빌고 있었죠?”
라파엘이 신재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재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나직하게 읊조렸다.
“신이시여. 저는 죄를 지어 벌 받았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벌을 받았는데 왜 저는 신에게 버림받은 것인가요?”
재언은 교황이 죽지 않았더라도 그에게 내려지던 축복은 언젠간 사라졌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레헬과 이레일이 알아낸 사실이 정확하다면 바티칸의 성직자들은 점점 신성력을 잃고 있으니 축복을 받아야 하는 성기사나 이단 심문관의 존재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괴력이 사라진 라파엘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네가 무슨 벌을 받았는데요?”
“저를 믿고 정을 준 여성을 배신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저를 믿고 있었는데도 저는 그녀의 손을 내치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습니다.”
재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벌이 아니에요. 당신이 비열하다는 증거일 뿐이죠. 당신들이 한 짓은 성폭행이고, 김수지 씨는 그것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김수지와 정을 나눴다고 말했죠? 그렇다면 당신은 김수지의 연인 비슷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데, 정말 잔인한 짓을 했어요. 그건 당신에게 행해진 벌이 아니라 당신이 김수지에게 저지른 범죄입니다.”
재언의 말이 이어질수록 라파엘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이단 심문관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게 그의 나이 열네 살 때였던가. 상당히 어릴 때부터 교황의 아래에서 세뇌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원죄라고 생각할 정도니 어린 시절부터 죄의식에 빠져 살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가 불쌍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는 그의 사정일 뿐, 그가 저지른 짓은 용서받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김수지는 그런 당신이라도 의리를 지킨답시고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닫고 미친 척 발작한다고 하더군요. 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간절하게 믿으며 현실에서 도피하는데, 당신만큼은 지키고 싶어 한다니…….”
“그만!!!”
괴로운 듯 눈물을 흘리던 라파엘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재언은 아직도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교황이 죽었는데 라파엘이 살아 돌아가 봤자 어차피 바티칸에서 입막음을 위해 그를 죽일 테지. 이단 심문관이었을 때의 힘은 남아 있지 않을 테니 그들을 상대할 수도 없을 것이고. 내 정체를 발설할지도 모르는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한데…….’
그를 언제까지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 둘 수도 없었다. 지하에 가둔 놈이 누구인지 다른 자식들도 슬슬 궁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소식을 들은 마약왕이 무슨 악독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이른 시일 안에 처리하든, 풀어 주든 해야 했다.
지하에서 올라와 1층의 응접실로 들어온 재언은 고민하다가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라파엘이 김수지에게 가해자라면, 김수지는 조각난 장난감에게 가해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어쨌든 김수지의 아버지가 조각난 장난감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까.
“넌 어쩌고 싶니, 조각난 장난감? 난 네 선택을 존중하겠어. 그녀에게 죄는 없지만, 라파엘이 말한 대로 원죄라는 게 있을지도 몰라. 그녀에게는 널 이렇게 만든 남자의 피가 흐르고 있잖아. 그녀를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네 잘못이 아니야.”
재언은 물기가 가득한 눈알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조각난 장난감을 위로했다. 그때, 체어맨이 조용히 나타나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위대하신 아버지. 혹시 막내를 못 보셨는지요.”
“버드맨? 못 봤는데.”
“요즘 항상 밖에 외출하는 것 같습니다. 행선지가 한국인 것 같아 아주 걱정이 큽니다.”
한국에서 떨어진 수배령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기에 자칫 히어로에게 걸린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둘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자 귀신처럼 나타난 귀신들의 성녀가 웃으며 재언을 대신해 대답했다.
“오호호호… 체어맨 오라버니. 막내는 한국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든 모양이에요.”
이번엔 그녀의 말에 재언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친구라고? 어떻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요즘 매일같이 친구를 만나러 간답니다. 이제 한국에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늘 경고하는데도 귓등으로 흘리는 걸 보면 막내에게 사춘기가 왔나 봐요. 호호호호…….”
그렇게 뼈 있는 한마디를 남긴 그녀는 한기를 내뿜으며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버드맨이 무슨 일로 나가는지 알았으니 볼일이 끝났다며 체어맨도 나가고 방 안에는 조각난 장난감과 재언 둘밖에 없었다.
조각난 장난감은 마음을 정한 듯 토막 난 손목을 들어 올려 재언의 손등을 톡톡 쳤다.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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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바티칸에서 찾고 있는 건 사무실에서 보관하기로 했어요. 꾸준히 약을 복용해 조금씩 상태가 호전돼 이제 신의 자식을 임신했다고 소리치진 않아요. 다만 감정이 늘 침체되어 있는 게 우울증 검사도 받을 예정입니다. 어쨌든 저희는 그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울 거니까요.
바티칸의 정신 나간 놈들이 김수지의 자궁에 주입한 것은 바실리오의 머리카락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지금까지 보관해 온 것도 소름 끼치는데, 그걸 사람의 자궁에 넣고 신의 자식을 잉태하니 마니 굴었다는 게 가장 끔찍했다.
교황이 저주받아 신에게 버림받은 이유로 충분했다.
게다가 아직도 바티칸에선 타락한 추기경과 바실리오를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늘 끈질기고 이상하게 포기할 줄 모르는 놈들이었다.
아마 짧은 시간 내에 놈들과 또 부딪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황이 죽고 바실리오의 영혼을 데려오려는 계획이 수포가 되었으니 당분간은 내부를 수습하느라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이번에 라파엘을 만난 것 때문인지 타락한 추기경도 우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 안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고 계속 기도만 올렸다. 라파엘 또한 지하 감옥에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재언은 둘 다 멀쩡한 신이 아닌 자신에게 기도를 올렸단 사실이 매우 소름 끼쳤지만 말이다.
이레일과 통화를 끝내고 한숨을 푹 쉰 재언의 곁에서 체어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그 남자를 그대로 풀어 주어도 되었을까요?”
“피해자가 그를 감싸고 싶은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지. 게다가 타락한 추기경이 그놈을 볼 때마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데, 그대로 놔주는 게 나을 것 같아.”
물론 멀쩡한 모습으로 내보낸 건 아니었다. 그는 아마 평생 말을 할 수 없고 얼굴의 반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채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신재언이나 자식들이 그렇게 만든 건 아니었다. 그가 스스로 벌을 받겠다며 자해한 결과물이었다.
아침부터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정말 기절할 뻔했다. 역시 사이비답게 밑도 끝도 없이 미친놈이었다.
“이제 그를 용서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야. 김수지가 병원에서 퇴원해 그와 마주하는 날, 그의 진정한 벌이 정해지겠지.”
바티칸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연고도 없는 오지의 한국 땅에서 살아가야 했다. 학력도, 신분도 없는 그가 멀쩡히 살아가기에 한국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다.
만약 김수지가 그를 용서한다면 사람 구실은 하며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녀마저 외면하면 그는 불법체류자로 정착할 곳도 찾지 못한 채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재언은 더 이상 이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상 가장 큰 피해를 본 쪽은 이쪽이었다.
아주 지긋지긋했다. 교황과 바티칸이 벌인 짓을 공론화하지도 못하고 묻어야 하는 게 못마땅하긴 한데, 레헬이 어떻게든 손을 쓴다고 하니 히어로 쪽에 맡기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바실리오의 영혼으로 김수지를 임신시킨다고 하다가 실패했지. 그렇다면 그의 영혼은 대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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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바닷가.
해가 지는 주홍빛 수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어린 소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는 이곳 보육원의 아이들 중 가장 예쁘게 생긴 덕에 인기가 많았지만, 소년은 나이에 답지 않게 너무나도 냉랭한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소년은 인기가 많긴 한데, 오히려 친구가 없었다. 무서운 인상 때문에 아이들이 소년에게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여섯 살이 되었을 아이치곤 지나치게 성숙한 태도에 보육원 선생님들도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일어서서 바다 저편을 바라보던 소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찾으러 가야 해.”
“뭐… 뭘?”
가장 용기 있는 소년이 가까스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러자 죽은 것처럼 어두운 눈빛을 한 소년의 눈동자가 밤하늘의 은하수가 박힌 것처럼 반짝였다.
“아름다운 나의 성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