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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44화 (144/324)

144화

다음 날부터 동급생의 연락이 끊겼음에도 김승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제법 쓸모 있어서 곁에 두고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요즘 들어 빠르게 하락하는 그의 평판에 교사들도 예의 주시하고 있어 쳐낼 시기를 보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히어로를 목표로 하는 자신에겐 그런 작은 흠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써먹으려고 했는데 아쉽네. 그 찐따 새끼와 같이 보내 버리면 딱 좋았을걸……. 하지만 뭐, 대용품은 많으니까.’

김승재는 저런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찐따가 전교 1등을 하면서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짜증이 났다. 게다가 겁에 질려 울면서도 은근히 제 말에는 잘 따라 주지 않는 게 괘씸해서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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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는 갈색 후드티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버드맨을 보고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닌지 그의 몸을 더듬거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만나자마자 갑자기 달려드는 그의 행동에 버드맨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그가 다급하게 손을 잡으며 변명했다.

“무슨 일 있던 거 아니지? 오늘 김승재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혹시 내가 간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했거든…….”

자신을 도와주면서도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은 소중한 친구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놈이 뭐라 했는데?”

“그냥… 더 이상 네가 날 도와주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했어. 그래서 많이 걱정했는데 멀쩡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다. 김승재가 설마 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뻗을까 싶었어.”

“흥.”

버드맨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언뜻 보이는 얼굴에 상처나 멍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절뚝이며 배를 감싸 쥐고 나타난 최민수 쪽이 더욱 상태가 나빴다. 오늘도 학교에서 마주친 일진들에게 명치를 잘못 맞았는지 계속 기침이 나왔다. 발에 차인 배도 지금까지 아프고 얼얼했다.

“그런데 정말 어디 다친 데 없는 거 맞지? 나 때문에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너무 미안해지니까 그래.”

최민수는 혹시라도 버드맨이 자신에게 다친 사실을 숨기는 게 아닐까 의심하며 그의 상의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다행히 아무 상처 없이 판판하고 매끈한 복근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최민수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버드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예전엔 버드맨도 최민수와 마찬가지로 항상 멍을 달고 다녔고, 매일 아팠었다. 게다가 괴물은 틈만 나면 그의 옷을 벗겨 나체로 만든 다음 조롱하며 끌고 다녔다.

이미 기억 저편으로 보냈다고 생각했던 끔찍한 기억의 잔재가 갑자기 튀어나와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버드맨은 사색이 된 얼굴로 최민수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가겠어.”

버드맨이 골목길을 빠져나가려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휙 돌린 순간, 주머니에서 무언가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미안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던 최민수가 얼른 그것을 주워 들었다.

“너도 좋아해?”

반색하며 묻는 최민수의 목소리에 버드맨이 걸음을 멈추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했다. 최민수는 그것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활짝 웃었다.

“나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S급 히어로 볼프강 카드잖아, 이거.”

버드맨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최민수가 내민 카드를 건네받았다. 볼프강의 팬을 만났다는 생각에 기뻤던 건지 최민수가 조잘조잘 떠들었다.

“나도 그를 좋아해.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고 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볼프강처럼 이겨 내고 싶어.”

손안에 쥔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버드맨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 불어닥쳤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을 감았다 뜬 최민수의 앞에는 이미 버드맨이 사라진 뒤였다.

“정말 살금살금 오가는 게 고양이 같네.”

골목길 안쪽에서 버드맨을 더 기다려 봤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오늘의 만남은 이대로 끝인 모양이었다. 오늘은 학원 수업도 없는 날이고 김승재 패거리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니 집에나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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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집에 도착한 최민수는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할아버지의 신발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항상 포장마차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들어오시던 할아버지가 웬일로 일찍 귀가하시다니.

그는 문 앞에서 얼른 제 몸 상태를 단정히 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집은 방 한 칸에 거실 겸 부엌이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좁은 거실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니 할아버지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얼굴에 피딱지가 잔뜩 얹은 채 제대로 된 약도 없는 구급상자를 꺼내 주름진 손으로 약을 바르고 있었다.

허리 통증을 달고 사는 할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손자의 학비를 위해 병원도 가지 않고 매일같이 일하러 나가셨다. 최민수는 자신 때문에 할아버지가 고생하는 것을 알기에 모진 폭력과 괴롭힘에도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야야 괜찮다, 괜찮어. 그냥 넘어져서 그런 거니께. 어여, 가서 씻고 자라. 우리 강아지, 오늘도 수고혔어.”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쩌다 넘어졌는데! 조심하지 그랬어. 약 이리 줘 봐. 내가 발라 줄 테니까.”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더 속이 상해 최민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주 호되게 구르기라도 했는지 눈가부터 뺨까지 쓸린 상처가 깊어 보였다. 당뇨를 앓고 있는 탓에 상처도 잘 안 났는데 이러다 덧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내일 꼭 병원 가. 알겠지? 학교 가서 전화할 거야…….”

민수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걱정하는 손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몇백 원이라도 아끼고자 병원에 가지 않을 할아버지가 눈에 선했다.

억지로 병원에 모시고 가고 싶은데, 할아버지가 죽는 것보다 손자가 학교 빠지는 걸 더 싫어하시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지금의 자신이 할아버지를 호강시켜드리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의사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아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오자마자 아침 자습 시간에 이미 너덜너덜한 문제집을 한 글자라도 더 보기 위해 책을 펼쳤던 민수는 김승재 패거리에게 끌려갔다. 아침부터 이렇게 끌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무서웠다.

최민수를 학교 뒤편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가 벽에 붙인 그들은 가장 먼저 손부터 들었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괴로운 폭력이 끝나고 김승재는 무릎 꿇고 주저앉은 최민수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 할아버지는 괜찮냐?”

최민수는 영문 모를 김승재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애들도 너무하지? 그 산송장 같은 늙은이를 계단 위에서 발로 차다니. 하마터면 뒈질까 봐 걱정했다고.”

“…뭐? …서, 설마.”

점점 경악으로 바뀌는 최민수의 표정을 보며 김승재가 이죽거렸다.

“설마 벌써 뒤진 건 아니지?”

김승재가 몸을 일으키며 한 말에 무리 사이에서 왁자지껄 폭소가 흘러나왔다. 최민수의 눈앞이 분노로 새빨갛게 변했다.

그는 눈물을 왈칵 터트리며 주먹을 쥔 채 김승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대는 다섯 명이 넘는 운동부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방에 나가떨어진 최민수의 무릎이 또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왜 지랄이야. 너 때문에 여기가 더러워졌잖아……. 사과해야지, 민수야?”

김승재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가리킨 그의 옷 끝자락에 묻은 먼지는 아무리 봐도 최민수의 탓이 아니었는데, 마치 최민수가 달려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굴었다.

최민수는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최민수를 보며 김승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못하겠어? 그러면 오늘은 그 영감탱이 뼈를 하나 부러트려 볼까. 그래도 괜찮아?”

“할아버지는… 관계없잖아! 왜 그러는 거야? 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할아버지한테…….”

“그냥. 재밌어서?”

여전히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김승재의 인상이 못마땅한 듯 찌푸려졌다. 그에 겁먹은 최민수가 고개를 푹 숙여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미… 미안해.”

김승재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사과했으면 이제 성의를 보여 봐.”

“성의?”

“음… 다음 시험에서 일부러 문제를 틀리는 거야.”

처음엔 잘못들은 줄만 알았다.

“일부러… 틀리라고?”

“응. 다음 중간고사, 기말고사 점수가 평균 60점을 넘지 않도록 네가 조절해.”

“아… 안 돼. 그러면 난…….”

“그러면 네 할아버지는 뒈지는 거고.”

최민수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것만은 안된다고, 빌고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김승재는 그가 알겠다고 할 때까지 봐주지 않을 셈인 듯했다.

뺨을 얻어맞고, 머리가 발에 차이고, 배에 주먹이 꽂혔다.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면서도 즐거워서 낄낄 웃고 있는 그들이 정말로 할아버지를 죽일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크게 난 상처가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 민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찍는 그들 앞에서 최민수는 김승재가 직접 준비해 준 대사를 읊었다.

“나, 나 최민수는… 너무 병신 같아서… 흑… 벼… 병신 같은 할아버지와 영원히 버러지처럼 살면서, 분수에 맞는 점수를 바… 받겠습니다. 이, 이렇게 올바른 길로 흑…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같은 게 살아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최민수가 말을 마치자마자 김승재 패거리가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다. 모두가 떠나고 남겨진 최민수는 바닥에 웅크려 앉아 엉엉 울었다.

성공하고 싶었는데, 시험 점수를 평균 60점 맞는다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도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그때, 울고 있는 최민수의 머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내리 꽂혔다.

“널 보고 있으면 화가 나.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익숙한 목소리에 최민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에 새 가면을 뒤집어쓰고 청색의 깃털이 달린 화려한 재킷을 갖춰 입은 하피가 서 있었다.

얼마나 짓이겼는지 피가 뭉쳐 있는 입술을 한 하피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최민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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