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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48화 (148/324)

148화

흉한 화상 자국을 가리기 위해 검은색 면 사포를 뒤집어쓴 거구의 남자가 신사처럼 우아하게 문을 열고 나왔다. 입술 가득 불길한 미소를 지은 그는 거대 빌런 중 가장 잔혹하기로 유명한 체어맨이었다.

체어맨은 여유 있게 걸어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버드맨이 토한 피 웅덩이를 보고 냉정함을 저 멀리 집어던졌다. 그는 볼프강을 노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우리 귀여운 막내에게 손을 대다니.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막내를 무사히 데려오라고 하셨는데 절대로 용서할 수 없군요!”

볼프강은 체어맨이 나타났을 때부터 방어태세를 취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체어맨과의 전투에서는 원거리 전이 훨씬 불리하다고 들어왔기에 방어를 위해서라도 거리를 좁혀야 했다.

그는 깃털로 만든 거대한 주먹을 바닥에 힘껏 내리꽂으며 크게 도약해 체어맨에게 달려들었다. 그에 체어맨은 입술을 잔뜩 끌어 올려 비웃으며 지팡이를 들고 바닥을 딱딱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힘껏 도약해 허공에 떠오른 볼프강의 발밑에 활짝 열린 나무문이 생겼다. 조금만 내려가도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에 볼프강이 깜짝 놀라 문 가장자리를 발로 차고 뒤로 물러났다.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수습한 그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체어맨을 바라봤다. 체어맨과의 거리가 아까보다도 더 멀어졌을뿐더러 작은 창문처럼 생긴 좁은 문에 포위당했기 때문이다.

체어맨이 잇몸을 만개한 채 웃으며 지팡이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잡아당겨 분리하자 지팡이의 긴 지지대 끝에서 뾰족한 송곳 같은 날붙이가 튀어나왔다.

“자, S급 히어로 볼프강. 어떤 문이 당신을 찌를지 기대되지 않습니까?”

자신의 앞에도 작은 문을 소환한 그는 안쪽으로 지팡이를 힘껏 찔러 넣었다. 그러자 볼프강을 포위한 문 중 하나가 벌컥 열리며 지팡이가 튀어나와 그의 어깨를 찔렀다.

“으윽!”

“볼프강. 그쪽이 아닙니다. 이쪽입니다!”

어깨가 찔리는 동시에 반격하며 문을 부쉈지만, 이미 다른 쪽 문에서 튀어나온 지팡이가 볼프강의 허벅지와 날개를 공격했다. 몇 번의 공격으로 볼프강의 몸은 찔린 상처로 너덜너덜해져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S급 히어로인 볼프강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체어맨이 유명한 빌런인 만큼 히어로 쪽에서 분석한 그의 약점도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체어맨이 소환한 문은 누군가가 이동하기 전에는 실체가 없는 허상 같은 물체였다면, 통과하는 순간부턴 평범한 강도를 가진 문이 된다. 그래서 송곳이 튀어나오는 문이 실체가 되는 족족 부숴 버리면서 볼프강의 대응도 점점 확신에 찬 움직임으로 변해 갔다.

결국, 자신을 찌르려는 송곳을 날개로 잡아채는 데 성공한 그는 체어맨의 지팡이를 두 동강 내버렸다.

“성가시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지만,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던 체어맨은 뒤를 돌아 아직도 흐리멍덩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버드맨 쪽으로 다가갔다.

사랑스러운 막내를 보호하듯 뒤쪽으로 숨기고 발에 걸리는 기절한 최민수를 발로 차 히어로 쪽으로 보내 버렸다.

붕 날아서 옥상 구석에 처박히는 최민수를 버드맨이 눈으로 좇았다. 그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최민수를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실망한 탓에 솔직히 인간들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구하겠답시고 S급 히어로의 앞을 막았던 최민수의 덜덜 떨리는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체어맨의 문이 모두 사라지고 숨을 몰아쉬던 볼프강이 상처 입은 몸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장기전으로 흘러간다면 체어맨이 월등히 불리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를 애먹이는 건 눈앞의 빌런들뿐만이 아니었다.

체어맨의 뒤에 아직 버드맨이 있는 데다 아직 옥상에 남아 있는 학생들도 지켜야 했다. 볼프강은 주저앉아 있는 양손날검에게 소리쳤다.

“양손날검! 날 도와 함께 적을 공격합시다!”

그런데 아무리 소리쳐도 양손날검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두 번 정도 양손날검을 소리쳐 불러 봤지만, 그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답답해진 볼프강이 결국 지원군을 부르기로 하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바로 그때, 체어맨의 주머니에서 입술이 빠져나와 옥상 위에 두둥실 떠 올랐다. 조각난 장난감의 입술이었다. 입술이 떠오르자마자 체어맨이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 S급 히어로 볼프강. 만약 지원군을 부른다면 우리 역시 사람을 더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레드-헬-파이어가 부재중인 지금, 히어로 쪽이나 우리나 힘은 비등비등할 터. 도심 한복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피차 물러나는 게 어떻습니까?

“다크 카오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볼프강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는 이 모든 사달과 세상의 온갖 악행의 근원은 바로 저 최악의 빌런 세대를 거느리는 다크 카오스 탓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저자가 레드-헬-파이어의 부재를 어떻게 알고 있지?’

다크 카오스의 말대로 여기서 그의 여덟 자식과 진지하게 붙는다면 불리한 건 히어로 쪽이었다. 특히 레드-헬-파이어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지금, 히어로들이 자랑하는 커다란 방어 수단이 없어진 셈이다.

시민의 안전까지 생각하며 싸워야 하는데 고등학교, 그것도 학생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잘못 붙었다간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볼 수도 있었다.

볼프강이 진퇴양난에 빠져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조각난 장난감의 입을 통해 말하는 재언도 마찬가지로 잔뜩 난감해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겠지? 그야 직접 물어봤으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일단 애부터 구한 다음에 대화를 나눠 봐야겠어. 요즘 내가 바쁘다고 애한테 무심하긴 했어.’

재언은 음식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밥을 먹어 치우고 먼저 급하게 나와 옥상의 흡연실 구석에 숨어 조각난 장난감을 통해 상황을 보고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대충 말하는 걸 보니 저 최민수라는 학생이 버드맨과 친해졌다던 그 친구인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자의로 능력을 각성하더니 볼프강에게 공격받는 버드맨을 구해 주기까지 했다.

[아하, 이제 바빠질 예정이에요^^]

차민재에게 지금 바쁘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돌아온 답장이었다.

조금 찝찝했지만 바빠질 예정이라고 하는 그의 말에 이 일에 끼어들 의지가 없어 보여 안심했다. 만약 볼프강이 고집을 부린다면 이쪽은 엔레이드맨을 바로 투입할 작정이었다.

다행히 볼프강은 일을 더 키울 생각은 없는지 침음을 삼키며 한걸음 물러나 깃털을 회수했다. 체어맨에게 당한 상처가 꽤 심해 보이는 게 복귀한 지 얼마 안 돼 또 병원 신세를 지려나 싶었다.

재언은 그가 조용히 넘어가는 것에 한숨을 돌리며 체어맨에게 명령했다.

“체어맨. 버드맨을 데리고 귀환해.”

- 네, 아버지.

문을 열어 자신에게 손짓하는 체어맨의 모습에 몸을 일으켰지만, 버드맨은 머뭇거리며 기절한 김승재 쪽을 쳐다봤다.

“아버지… 저놈들은…….”

김승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과 살아난 김승재가 최민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때, 버드맨의 귀에 최민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

“…….”

“위험하잖아. 가…….”

버드맨은 네 녀석 때문에 머뭇거린 게 아니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절할 정도로 머리를 얻어맞아 코피를 쏟는 와중에도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최민수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떨리는 그의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말을 이어 가는 목소리 역시 잔뜩 떨렸다.

“네가 빌런이건 뭐건 상관없어! 너는 내 히어로야. 나… 절대 지지 않을게. 김승재에게 당했던 일 모두… 모두 내가 어떻게든 싸워서 이길 테니까 괜찮아. 걱정해 줘서 정말 고마워.”

최민수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있잖아. 내가 계속 신경 쓰였던 건 네가 정말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야. 너도 분명 괴로운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널 찾아갈게. 꼭 찾아서 그때는 네가 날 구해 줬던 것처럼 내가 널 구해 줄게. 약속이야!”

“막내야. 이제 슬슬 가자꾸나.”

체어맨이 문을 열고 볼프강을 경계하면서 머뭇거리는 버드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버드맨은 자신을 구하겠다는 최민수의 말에 어이없어하면서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체어맨의 문 안쪽으로 발을 들이기 직전, 버드맨은 고개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지 마.”

“어?”

“네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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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고등학교 옥상에 재앙 급인 거대 빌런 학살자 버드맨과 체어맨이 나타났다. S급 히어로 볼프강은 최선을 다해 그들과 맞섰으며,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학생들을 구해 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보다는 다른 소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바로 사건이 벌어진 날 옥상에 있었던 한 학생의 능력이 각성했는데, 방어 계열 S급으로 히어로 협회의 등급 판정을 받아 S급 히어로로 인정받았다.

대한민국의 열한 번째 S급 히어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대중들을 충격에 빠트린 사실은 S급 히어로가 된 학생이 같은 학년의 친구에게 학교 폭력을 지독하게 당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더 나아가 그의 할아버지까지 다치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며 대중들은 분노했다.

그동안 찍혔던 동영상까지 전부 유출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S급 히어로 최민수의 안타까운 사연과 그를 괴롭혔던 학생들에게 분노를 퍼부었다.

게다가 학교 폭력의 주동자 중 한 명이 A급 히어로 양손날검의 자식인 것까지 전부 알려진 탓에 양손날검은 기자회견을 마련해 머리를 숙여 사죄한 뒤 히어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 이후에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부하고 퇴학당한 아들을 다시 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이며 아들이 성인이 되는 동시에 모든 지원과 부자간의 연을 끊겠다고 말했다.

그게 지켜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부자 모두 히어로 쪽으로는 절대로 몸담을 수 없을 것이다.

“최민수 자퇴하고 히어로로 일한대.”

“쩐다. 그 찐따였던 새끼가…….”

“그래도 존나 멋있더라. 인터뷰에서 구해 주고 싶다는 사람은 여자겠지? 여친인가?”

최민수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대한민국이 크게 떠들썩하던 때, 버드맨은 의자에 앉아 있는 신재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었다.

신재언은 인자한 표정으로 우는 버드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버지… 왜, 왜…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안될까요. 항상 그들에게 실망하고… 배신당해도 어째서 다시 믿고 싶을까요? 왜 다시 기대고 싶어 질까요… 왜…….”

필사적으로 허벅지에 매달려 울고 있는 버드맨을 달래며 신재언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렴, 버드맨. 사람을 믿고 기다리고 싶은 건 아직 네게 희망이 남아 있다는 소리야.”

여전히 강세준은 더럽고 폭력밖에 없었던 화장실 안이었다. 옷이 벗겨진 채 변기에 앉아 제발 히어로가 나타나 주길 기다리던 어린 소년은 아직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울고 있었다.

“분명 너를 그곳에서 구해 줄 진정한 히어로가 나타날 거야.”

“흑… 흐윽.”

하지만 버드맨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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