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49화 (149/324)

149화

쉬고 싶다.

요즘 일도 많고 끊임없이 사건도 터져서 너무나도 피곤했다.

[재언 씨, 목요일부터 토요일에 캠핑 안 가실래요?]

회사에서 연말이라고 목요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까지 겨울 휴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연인에게 알리니 돌아온 답장이었다.

연인이 된 지 1개월이 넘었는데 얼굴을 본 횟수가 겨우 다섯 번이었다. 안 그래도 이 정도면 차여도 할 말이 없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 때였다.

요즘 쉬고 싶기도 했고, 연인과의 소홀했던 1개월을 만회할 좋은 기회였다. 재언은 잘됐다는 생각에 통화버튼을 누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원래부터 애연가는 아니었지만, 업무 시간에 조금이라도 한숨을 돌리기 위해선 흡연실로 향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망할 회사는 이상하게 흡연자들이 흡연하러 가는 건 눈치 주지 않으면서 화장실을 가거나 쉬려고 하면 눈치를 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 담배 연기를 들이마셔야 하는 모순적인 짓을 해야 했다.

“좋아요. 어디로 가요?”

- 강원도 태백이에요.

“태백이요? 너무 춥지 않을까요?”

서울 날씨도 낮에는 영하로 떨어질 만큼 추운데 태백에서 캠핑하면 얼어 죽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 캠핑족들 보면 나름의 노하우와 현대 문물의 힘을 빌려 추운 날씨에도 잘하고 온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기는 했다. 게다가 난로 따위 없어도 불 계열에선 따라올 자가 없는 최상위 능력자가 있는데 얼어 죽을 걱정은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좋아요. 그런데 저 텐트는커녕 캠핑용품은 전혀 없는데 괜찮습니까?”

- 네, 괜찮아요. 저는 다 있고 캠핑장에서 대여도 가능하니까 재언 씨는 몸만 오세요.

“그래도 어떻게 몸만 가요. 제가 먹을거리를 사 갈게요.”

차민재와 단둘이 가는 여행 중에 사건이 터지지 않았던 적이 없어서 조금 불안했지만, 설마 강원도 캠핑장에서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재언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희미한 불안감을 가까스로 떨쳐 내고 기대하는 목소리로 차민재와 출발 시각을 정한 뒤 통화를 마쳤다.

담배꽁초를 휴지통에 버리고 5분 정도 더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켠 재언은 왼쪽 구석에 작게 켜 놓은 뉴스 화면 안에서 인터뷰를 하는 낯익은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버드맨과 있었을 땐 그래도 앳된 티가 역력했는데 능력이 각성하면서 많이 성숙해진 최민수가 화면 속에서 조곤조곤 말을 하는 중이었다.

최민수는 현재 실종된 정의의 집행관보다 더 어린 나이에 S급 히어로 판정을 받아 천재 능력자로 불렸다. 방어 계열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러시아의 S급 능력자 바스코프와 견줄 정도였다.

실전에서 전투를 치르며 경험을 갈고닦는다면 어지간한 공격 계열의 능력자들은 그의 단단한 철벽을 절대로 뚫지 못할 것이다. 그는 히어로 협회에서 지어 준 ‘최강의 방패’라는 히어로 명을 받은 뒤에 있었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었다.

- 어쩌면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저를 구해 주었으니 이번엔 제가 구해 주고 싶습니다.

- 첫눈에 반한 상대인가요?

- …그랬을 수도 있어요. 왜냐면 정말 슬픈 눈을 하고 있었거든요. 바보같이 힘도 없었던 제가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정말 부럽네요. S급 히어로의 열렬한 구애라니! 그러면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번에 학교폭력 피해자로 가해자들에게…….

재언은 최민수의 뜨거운 공개 고백을 듣자마자 휘파람을 불었다.

뜨거운 청춘이지만, 버드맨은 인간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도 커서 최민수와의 만남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아마 저쪽에서 죽어라 찾아도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최민수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어느 때보다도 더 결의에 찬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이런 눈빛을 한 사람은 굉장히 끈질기다는 걸 재언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과연 ‘최강의 방패’가 ‘버드맨’을 구해 줄 히어로가 될 수 있을지 눈여겨볼 생각이었다.

‘…코루루도 그렇고 버드맨도 그렇고… 다들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그것도 왜 하필 S급 히어로들과 엮이는지 이만저만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세계 최강의 히어로와 사귀고 있는 자신이 무어라 설교할 수 없지만 말이다.

버드맨은 볼프강과 싸웠던 여파로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에서 쉬고 있긴 하지만 정신적인 타격이 심했는지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재언이 찾아가 문을 두드리자 나온 버드맨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버드맨의 모습에 재언과 체어맨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머리를 맞대었다.

외국에 외출이라도 다녀오라는 등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때 막 거절당하고 방으로 돌아온 재언에게 마약왕이 찾아왔다.

“아버지, 위대하신 나의 아버지시여.”

“왜?”

“막내의 일은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마약왕에게 질풍노도의 막내를 맡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재언은 손을 휘저었다.

“체어맨이 그를 챙기고 있으니까 넌 신경 꺼.”

“아버지. 버드맨은 평소에도 제 아들 지오반니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가장 가까워 말도 잘 통할 테고 저도 허튼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제 별장에 데려가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재언은 마약왕이 또 무슨 허튼짓을 꾸미려고 버드맨을 데려가는 건 아닐까 의심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재언이 아는 사람 중에 버드맨의 또래는 지오반니뿐이었다.

“버드맨과 조각난 장난감의 오른쪽 눈알을 함께 보내겠어. 널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마약왕. 네 주변이 불안한 거야.”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전부 이해했으니 제 기분 따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면 버드맨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물론 큰 누님의 눈알도 아주 잘 챙길 테니 걱정 마세요.”

벌떡 일어나 한걸음에 버드맨의 방으로 다가간 마약왕이 문을 두드렸다. 재언이 부르는 게 아니면 잘 열리지 않았던 방문이 조금 열렸다.

어두운 낯빛을 한 버드맨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약왕은 아주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 우리 소중한 막내의 얼굴이 무슨 일인지……. 내 별장에 함께 가서 요양이라도 하자꾸나. 지오반니가 널 기다리고 있단다.”

뒤에서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재언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조각난 장난감에게 속삭였다.

“대놓고 허튼짓을 하진 않겠지만, 그가 나서서 버드맨을 데려간다는 게 불안하네. 여기에 계속 있게 하고 싶어도 청소년의 정서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잖아. 적어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선 허튼짓 못 할 테니까……. 조각난 장난감, 미안하지만 네가 고생 좀 해 줘.”

그러자 수긍하듯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렀다. 눈알이 버드맨의 어깨 위에 올라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재언은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틈나는 대로 그들을 감시했다.

마약왕이 버드맨을 데리고 간 곳은 네덜란드의 산속에 있는 별장이었다. 근처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전혀 없고 마약왕의 부하 몇 명과 고용인들만 있는 제법 호화로운 3층짜리 저택이었다.

막내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공기 좋은 별장으로 데려간 것처럼 보였다. 지오반니 또한 쾌활한 성격으로 그 나이대 아이처럼 버드맨과 잘 지냈다.

겉으로 봤을 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는 난로와 365일 비바람과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칙칙하고 어두운 별장보다는 훨씬 분위기가 좋았다.

재언이 보는 대로 버드맨은 한가롭게 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매우 시끄러웠다. 그는 너무나도 나약한 자신을 아버지께서 계속 신경 쓰고 챙겨 주려 하는 것이 괴로웠다.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발자취에 맞지 않게 자신은 나약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분의 도움이 되고 싶은데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강세준’ 때문이었다.

“막내야…….”

이곳에 오기 전 마약왕이 찾아와 그를 끌어안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재언이 조각난 장난감에게 마약왕을 감시하라고 부탁하던 그때였다.

“사람 따위 믿으니까 나약해지는 거란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 거란다. 아버지께서는 무른 면이 있어서 우리 자식들이 그 부분을 신경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위대하신 아버지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단다.”

마약왕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버드맨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미소와는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싸늘했고,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네 안에 있는 어둠과 나약함을 지워 줄 수 있단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언제나 널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어. 네가 정말로 바란다면… 네 안의 나약함을 재워 주겠다.”

마약왕은 버드맨의 능력을 높이 샀다. 버드맨은 아버지를 향한 충성심도 높았고 무모함도 있었다. 아버지의 위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모두 감당할 정도로 독하게 마음먹은 아이였다.

그런데 며칠 전, 이상한 놈과 마주한 뒤로 그는 나약해졌다. 마약왕은 그 점이 너무나도 슬펐다.

그가 아버지를 위해서 나약한 마음을 없애겠다고 하면, 예전의 버드맨으로 돌아가게 해 줄 생각이었다. 모든 선택은 그에게 달렸다.

버드맨은 마약왕이 하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나면 내가 널 구해 줄게! 넌… 내 히어로니까.”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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