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51화 (151/324)

151화

재언은 방금 도착한 차에서 내리는 차민재의 얼굴을 보고 어김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아무리 내성이 생겼다고 한들 오랜만에 보니 한순간이나마 심장이 철렁했다. 같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 차는 뭐에요? 새 차네…….”

차민재와 만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대형 SUV였다. 지붕에 루프박스까지 설치한 것이 본격적으로 캠핑을 즐기려는 듯했다. 그에 비해 재언의 짐은 아이스박스와 자잘한 생필품이 든 백팩이 끝이었다.

재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흥미를 보이자 민재가 양팔을 벌려 그를 마주 안고 뺨에 입술을 문댔다. 그리고 뺨을 붉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오늘 끌고 가려고 새로 샀어요.”

“…….”

무슨 여행 준비물 구매한 것처럼 쉽게 말하네……. 역시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봐 온 차민재의 차종만 이것 포함 총 다섯 대였다. 세금이나 보험금만 대충 따져 봐도 자신의 연봉은 훌쩍 넘길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도 재력과 능력이 출중하고 절륜한 연인을 두고 일이 바쁘다며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지난 한 달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재언 씨,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재언은 다시 달라붙어 오는 민재를 마주 안고 그의 온기를 느끼다가 떨어졌다.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는 민망함에 차마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허둥지둥 챙겨 온 아이스박스를 들어 올렸다.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챙겨 왔어요. 전에 보니까 민재 씨, 소고기 쪽은 별로 입에 안 댔던 것 같아서요.”

그러자 차민재의 꿀처럼 달달한 눈빛이 더욱 진해졌다.

“맞아요. 하지만 재언 씨가 먹으면 먹을 수 있는데…….”

“저 돼지고기도 좋아하니까 상관없어요.”

재언은 그런 민재에게 빙긋 웃어 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윽고 민재도 운전석에 올라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의 외관만큼이나 고급스러운 가죽시트에 앉아 눈을 굴리던 재언은 왠지 모르게 드는 찝찝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민재는 정말 이상적이고 근사한 연인이었다. 그런 그와 연애를 하는 게 분명 좋아야 할 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모르겠다.

레드 헬 파이어가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더 그런 것일까.

‘형, 만약에 [---]가 온다면, 나와 꿈에 그리는 연애를 해 줘.’

또다시 낯선 기억이 머릿속에서 파문을 일으키며 찰랑거렸다.

‘우리는 함께 여행을 다니고, 난 형에게 허락받지 않고 키스를 할 수 있어.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정말 이상적인 연애를 하는 거지. 성별에 관계없이…….’

그때 주변이 어땠었지? 불타고 있었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고 있었나.

재언은 요즘 들어 자주 찾아오는 두통에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눈을 감고 있던 재언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막 고속도로를 빠져나가고 있는 풍경이 창밖으로 보였다.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부터 강원도에 도착할 때까지 감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자신이 운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잠만 잤던 건가 싶어서 미안해졌다.

“아… 미안해요, 민재 씨. 저도 모르게 자 버렸어요.”

“보기 좋던데요. 재언 씨 자는 얼굴, 귀여워서 좋아요.”

신호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은 민재가 살짝 고개를 틀어 핸들에 얼굴을 대고 빙그레 웃었다. 사람을 홀리는 아주 요사스러운 눈웃음이었다.

재언은 그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 재언을 보며 차민재는 팔을 뻗어 재언의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곧 도착해요.”

“이런… 진짜 오래 잤네요. 정말 미안해요, 민재 씨.”

“정말 괜찮다니까요. 아마 이것 때문에 재언 씨가 잠이 든 걸 거예요.”

차민재가 인자하게 웃으며 에어컨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포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안에 뭐가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작은 주머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신기한 광경에 재언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빛의 결정들이 부스러지더니 사라졌다.

“이게 뭐예요?”

“꿈의 포푸리라고 히어로 협회에서 만든 겁니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에게 잠이 오게 해 주거나 좋은 꿈을 꾸게 해 주기도 하고, 중요한 일을 잊은 사람에게 잊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에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거거든요. 향도 좋아서 차에 달여 봤는데, 이것 때문일 거예요.”

“아… 협회에서 만든 거면 조금 비싸겠네요.”

“효능은 약 여덟 시간 정도인데 개당 80만 원밖에 안 해요.”

‘비싸잖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두 사람이 탄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뻐근한 몸을 움직이며 재언은 캠핑장 내부를 쭉 훑어봤다.

과연, 이곳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왜 도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가로등이 별로 없어 낮인데도 캠핑장이 어두운 데다 이곳저곳이 나무들로 빽빽했다.

주변에 민가나 다른 펜션, 캠핑장도 전혀 없고 캠핑장 내부에 있는 매점, 개수대, 화장실만 덩그러니 존재했다. 그래도 방문하는 캠핑족은 있는지 드문드문 텐트를 설치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재언은 미리 설치된 타프 아래에 짐들을 내리고 요리 재료들을 꺼내 정리했다. 개수대에서 씻을 그릇과 냄비들을 정리하는 동안 민재는 익숙하게 텐트를 설치하고 망치로 마무리 작업을 이어 갔다.

그는 이런 노동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무척 어울렸다. 거기다가 은색의 얇은 테로 만들어진 안경이 그의 미모를 죽이긴커녕 더욱 살렸다.

물론 패션 용도로 착용한 건 아니고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어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히어로 협회의 아이템이었다. 안경은 화사한 미인에 유명한 레드-헬-파이어가 캠핑장에 나타났음에도 조용한 것이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민재 씨, 저 그릇하고 채소 좀 씻어 올게요.”

텐트를 다 치면 바로 점심을 해결할 수 있게끔 이것저것 챙겨서 개수대에 도착한 재언은 채소들을 씻으며 귀신들의 성녀에게 속삭였다.

“어때? 귀신이 정말 있어?”

- 호호호, 이런 곳은 음기가 강해 어디든 귀신이 있답니다. 하지만 알려진 만큼 특별한 원귀는 없어 보이네요.

“그것참 다행이네.”

태어나면서부터 귀안이 열린 채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귀신들의 성녀, 마리암이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철이 들기 전부터 귀신을 볼 수 있으며, 귀신들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가뜩이나 혼혈아라 배척받던 마리암은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쁜 여자아이’로 유명했다.

그런 귀안을 가진 데다 귀신을 지배하는 능력까지 얻은 귀신들의 성녀를 따라올 무당은 전 세계에 없을 것이다. 그녀가 하는 말에 안심한 재언은 채소와 그릇의 물기를 탁탁 털고 개수대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귀신들의 성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 저 여자!

“…어?”

그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가 매점에서 어린 딸로 보이는 아이와 손을 잡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재언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얀 천을 눈에 두른 특이한 행색의 여성은 대한민국에서 단 한 명밖에 없으니 말이다.

“광안의 성녀!”

바로 S급 히어로 광안의 성녀였다.

그녀의 손을 잡은 여자아이는 아이답지 않은, 지나치게 무표정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광안의 성녀의 외모가 아주 닮아 있어서 그들이 모녀지간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은…….”

재언을 알아본 그녀가 딸의 손을 잡고 다가오자 귀신들의 성녀가 신경질적인 신음을 흘리며 기척을 숨겼다.

세간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누구보다도 나쁘다고 알려졌지만, 재언이 봤을 땐 귀신들의 성녀가 일방적으로 광안의 성녀를 매우 싫어하는 것에 가까웠다.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캠핑장 주인의 의뢰가 들어와서요. 이곳에 귀신이 나타나는 것 같다는 소문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가 봐요. 원래는 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지금은 주말에도 사람을 채우지 못해 아주 곤란해하더군요.”

하긴, 블로그 게시물이나 리뷰들도 전부 귀신 얘기뿐이긴 했다. 그것 때문에 재언도 꺼리는 마음이 들었으니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인데……. 소정의 의뢰비만 받고 왔습니다. 이왕 오게 된 것, 딸과 함께 캠핑도 하려고요. 이 아이에겐 여러 가지를 보여 주고 알려 주고 싶거든요.”

“그렇군요.”

“부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말귀가 통하는 귀신이면 좋을 텐데요…….”

- 저 위선자!

귀신들의 성녀가 참을 수 없었는지 잔뜩 짜증을 부리며 소리쳤다. 그래 봤자 엔레이드맨의 둠 속에 있어 상대방에겐 들리지도 않을 텐데, 마치 들으라는 것처럼 소리를 잔뜩 높였다.

사실 귀신들의 성녀가 광안의 성녀를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반년 전, 광안의 성녀가 귀신들의 성녀와 싸우면서 그녀의 소중한 것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바로 동생이 죽기 전에 따 준 꽃이었다. 이미 딴 지 3년이나 지난 꽃은 조금만 충격이 가해져도 부스러질 정도로 말라비틀어져 있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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