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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54화 (154/324)

154화

차민재뿐만 아니라 귀신들의 성녀 역시 광안의 성녀가 데리고 다니는 그 아이가 영혼이 없는 껍데기라고 했다. 하지만 재언은 광안의 성녀가 보여 주었던 태도가 계속 신경 쓰였다.

“이건… 딸이 선물해 준 겁니다.”

움직이지 않는 고장 난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흐뭇하게 웃던 첫 만남이나 방금 보여 주었던 모습들이 매우 신경 쓰였다.

“이 아이에겐 많은 걸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으니까요.”

아이가 정말 껍데기일 뿐이라면 딸이라고 소개하며 그런 얼굴을 했었을까. 그런데 또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은 걸 보면 민재가 한 말이 맞나 싶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재언이 완성된 오징어 볶음을 한 그릇 퍼 담았다. 그리고 한 수저 뜨려는 순간, 계속 묵묵부답으로 이야기를 경청하던 귀신들의 성녀가 소리를 빽 지르는 바람에 재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말 어이없네요! 그깟, 걸로 생명을 이어 간다고 생각하다니, 자살이나 다름없는걸……. 정말 분수에 맞는 최후예요. 꼴좋다니까!

꼴좋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목소리에 후련함이 아닌 노기로 흘러넘쳤다. 엔레이드맨의 둠 속에 숨어서 얼마나 크게 화를 내는지 씩씩거리는 거친 숨결이 귓가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혼자 화를 내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아무래도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가 버린 듯했다.

그녀는 기분파에 화도 잘 내고 제멋대로 구는 편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에게는 차가웠다. 그렇기에 재언은 그녀가 차민재의 말에 웃으며 기뻐할 줄 알았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하게 있는 재언의 상태를 민재가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언 씨, 왜 그래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이게 좀 매워서요.”

그에 재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며 컵을 입에 대고 간신히 표정을 숨겼다.

잔뜩 화가 난 귀신들의 성녀가 사라지긴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 산은 음기가 강하고 많은 수의 귀신들이 묶여 있어 귀신들의 성녀가 힘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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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은 모르지만, 귀신들의 성녀는 광안의 성녀와 한판 붙기 전에 몇 마디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등산을 좋아하는 재언의 사촌 형이 하필 타락한 산신령이 있는 산에 오른 날이었다. 산의 주인이 인간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악귀가 들끓는 위험한 산으로 변한 것이었다.

부모님께 사촌 형이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재언은 귀신들의 성녀와 함께 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난관에 부딪혔다.

기본적으로 귀신들은 귀신들의 성녀에게는 호의적인 편이었는데 산의 주인인 호랑이 지배 아래에 있는 산속의 귀신들은 너무나도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잔뜩 화가 난 그녀는 지옥에서 악귀를 꺼내 귀신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산신령마저 지옥에 던져 버렸다.

일을 해결한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기절한 신재언의 사촌 형을 귀문으로 빼돌려 안전하게 보호하고 산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때, 귀신이라면 낼 수 없는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재언은 귀신들의 성녀가 지옥문을 열어젖힐 때부터 산 아래로 피신해 있었으니, 다른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경계하는 귀신들의 성녀 시야에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새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여성이 들어왔다.

거친 산세를 올라온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검은색 정장에 굽이 낮은 구두를 신은 차림이었다. 낯선 이의 손에 들린 구슬 속에서 수많은 영혼을 읽은 귀신들의 성녀는 긴장하는 얼굴로 불청객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불청객은 바로 광안의 성녀였다. 그 당시 귀신들의 성녀는 히어로와 부딪친 경험이 없었기에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S급 히어로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밤늦게 산에 오르는 건 위험하답니다.”

“뭐? 그건 내가 할 대사야! 눈도 먼 거 같은데 본인 걱정이나 하지 그래?”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잠시 얼이 빠졌던 귀신들의 성녀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화를 냈다.

“저는 앞을 볼 수 없지만, 제가 가진 특별한 눈은 사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저는 느낄 수 있어요.”

“…….”

“여긴 위험하니 저와 함께 내려가도록 해요.”

광안의 성녀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을 하며 다가오더니 급기야는 귀신들의 성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손에도 오히려 더욱 걱정하는 듯 말을 이어갔다.

‘이 여자는 뭐람!’

능력을 각성하고 난 뒤 귀신들의 성녀는 외모가 더욱 음울하고 무서워졌다.

그녀는 일부러 어둡고 칙칙한 옷만 찾아 입었고 손톱도 검게 칠한 채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엉망인 머리로 다녔다. 하얗게 질린 피부에 웃고 있는 입술은 새빨간 것이 슬쩍 보면 귀신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일반인이 그녀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녀의 손을 거리낌 없이 덥석 잡았다.

사실 귀신들의 성녀는 손이 잡히자마자 냉큼 손을 빼내려고 했는데, 광안의 성녀는 그녀를 보호해야 할 시민이라고 생각했는지 더욱더 단단하게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눈앞이 보이진 않아도 읽을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 건지 나무와 바위들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며 걸었다.

산에 있던 못된 귀신들을 전부 지옥으로 보내 버렸어도 본능적으로 산의 음기를 찾아 들어온 귀신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두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접근했다가 귀신들의 성녀의 눈길 한 번에 모두 부리나케 도망쳤다.

“당신 정말 이상한 거 알아? 내가 귀신이면 어쩌려고?”

귀신들의 성녀는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대답을 머뭇거리면 가지 방울을 휘둘러 귀신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도록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광안의 성녀는 더욱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저는 이 특별한 눈으로 사람의 기색을 살필 수 있다고. 사람은 그만이 가지는 색이 있답니다. 질 나쁜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은 대부분 아주 탁하고 기분 나쁜 색을 띠고 있지요.”

“뭐? 그럼 난 무슨 색인데?”

저도 모르게 몸을 기울여 흥미를 보이던 귀신들의 성녀는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당황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광안의 성녀가 순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주 따뜻한 색을 가지고 있어요.”

“뭐… 뭐야? 당신 날 꼬시는 거야?!”

귀신들의 성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잡힌 손을 빼내며 소리쳤다.

빨갛게 익어 가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 광안의 성녀는 곤란한 미소만 지었다. 천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겠지만, 눈썹이 팔(八)자로 내려가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이곳은 옛날부터 귀신들이 장난을 많이 치는 곳이라 사람들이 많이 실종되고 왕래도 적어요. 위험한 곳이니 이런 밤중에 혼자 산을 오르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내겐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거든? 귀신은 가슴 속에 원이라도 품었지, 사람은 악의를 가지고 있잖아!”

화난 듯 소리치는 귀신들의 성녀가 하는 말에 광안의 성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힘든 일이 있었나요?”

“그래. 죽을 만큼 힘든 일이 있었어.”

귀신들의 성녀가 비꼬듯 대답한 말에 광안의 성녀는 또다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구슬이 마치 어두운 산속에서도 스스로 빛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한참 뒤에 나온 대답에 귀신들의 성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질 뻔한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는 죽은 동생을 제외하고는 부모부터 적이나 다름없었으며, 모두가 그녀를 악의적으로 대했다. 오랜만에 겪는 타인의 호의에 그녀는 고민했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일은 끝냈고, 어차피 내려갈 생각이었으니 눈이 안 보이는 저 멍청한 여자를 데려다줘도 상관없겠지, 라는 생각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게 한참을 순순히 광안의 성녀의 뒤를 따르던 귀신들의 성녀는 숲 안쪽에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악귀를 발견했다. 지옥문을 열었을 때 몰래 도망쳤는지 심상치 않은 모습을 한 악귀였다.

뾰족하고 긴 손톱에 입은 찢어졌으며 눈 한쪽이 녹아내린 모습이었다. 몸집은 또 어찌나 큰지 주변 생령이나 사람들에게 해를 가해 악귀가 된 것이 분명했다.

악귀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본 귀신들의 성녀는 걸음을 멈추고 가지 방울을 흔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앞에 사방진이 바닥에 그려졌다.

세워진 결계에 다가오던 악귀의 움직임이 멈추자 귀신들의 성녀는 지옥문을 소환했다. 음양이 그려진 문이 나타나 막 열리려던 그때, 광안의 성녀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걸었다.

“당신… 빌런이었군요. 당신이 귀신들의 성녀?”

“그게 뭐 어쨌다고?”

도와준 사람 앞에서 저런 식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다니, 기분이 확 상한 귀신들의 성녀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광안의 성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더니 눈을 가린 천을 천천히 풀어냈다. 그에 불길한 느낌을 받은 귀신들의 성녀가 붙잡고 있던 악귀를 방패로 삼았다.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눈에 악귀의 생명이 순식간에 사그라져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악귀가 사라지는 걸 신호로 광안의 성녀는 빌런인 귀신들의 성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때 가지 방울에 달고 있던 동생의 유품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결국, 일대는 귀신으로 북적이게 되고, 두 사람은 당분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다치고 전투가 끝났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지 귀신들의 성녀는 광안의 성녀만 보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 여자, 내가 빌런인 걸 알고 태도를 싹 바꿨지! 그런데 지는 죽을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서 나한테 그딴 설교를 해?”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숲 속으로 들어온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를 식혔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런 위선을 떠는 놈들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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