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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56화 (156/324)

156화

한 남자가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아 있었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그는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은 듯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외모만 놓고 보면 부드럽게 생긴 편이지만, 어딘지 묵직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위험한 분위기를 잔뜩 풍겼다. 언뜻 보면 20대 청년이라 해도 될 만큼 젊어 보이는 인상인데 또 자세히 보면 눈가의 주름이 그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권총을 손가락에 끼고 빙글빙글 돌렸지만 그게 위협용은 아니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총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강력한 능력자들이 남자의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가진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휘감은 고가의 명품보다도 가장 먼저 눈길이 갈 만큼 빛이 났다. 하지만 그가 앉아 있는 곳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폐공장 안이었다.

“살려 줘, 살려 줘! 난 배신하지 않았어. 위대하신 다크 카오스님께 충성을 맹세했었다고!”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남자의 앞에 눈이 가려진 채 손이 뒤로 묶여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겁에 잔뜩 질려서 소리치는 그를 포위하듯 몇 명의 사람들이 우뚝 서서 에워쌌다.

앉아 있는 남자는 빠른 속도로 세계의 블랙 마켓을 장악한 어둠 세계의 왕, 마약왕 알례리였다. 알례리는 덜덜 떨다가 급기야 소변까지 지리는 남자를 보고 눈썹만 까딱하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조용. 위대하신 ‘나’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알례리가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자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사납게 생긴 남자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서 촉수같이 생긴 것이 뻗어 나가 공포에 질려 떠는 사내의 입을 그대로 막아 버렸다.

- 그래서 저 돌연변이가 대체 어디서 왔는지부터 조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살아 있는 강아지를 먹으려고 한 걸 보니 생고기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약한 동물들을 노린다 해도 언제 사람이 피해자가 될지 몰라요.

마치 감미로운 계시를 듣는 이처럼 눈을 감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던 알례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막내인 버드맨을 제외하고 신재언의 일곱 자식은 모두 조각난 장난감의 신체 부위를 하나씩 가지고 다녔는데, 알례리는 일부러 왼쪽 귀를 고집해 얻어 냈다. 왼쪽 귀는 가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신체 일부와 동화되어 재언의 목소리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알례리는 재언의 목소리가 계시처럼 들려오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했으며 방해받는 것을 싫어했다.

공장에 모여 있는 알례리의 측근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곧이어 엔레이드맨에게 말하는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 엔레이드맨. 귀신들의 성녀가 사라졌는데 걱정이 되네. 저러고 돌아다니다가 혹시 무슨 일 벌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해. 네가 그 애를 찾아와 줘.

- 네, 아버지.

그 대화를 끝으로 연결이 끊겨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신들의 성녀는 충성심은 넘치지만,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그래도 그녀 역시 아버지의 선택을 받은 나의 소중한 형제…….”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알례리는 혀를 쯧쯧 차며 탄식 어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내가 만들어 낸 ‘너희’가 못난 내 형제들을 대신해 우리의 계획을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가신 곳이 마침 그곳이군……. 들키면 곤란해지니 츠유, 네가 먼저 ‘그것’을 회수해 오도록 해라.”

알례리가 촉수로 입이 막힌 눈앞의 남자에게 한 톨의 관심도 주지 않는 사이 결국 남자는 질식의 고통 속에서 눈을 까뒤집고 명을 달리했다. 남자의 숨이 멎은 걸 확인한 덩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신을 공장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소각로 안에 던져 버렸다.

모든 광경을 위에서 바라보던 버드맨은 자신의 한쪽 팔에 매달려 있는 지오반니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한 그의 표정에 지오반니가 웃으며 속삭였다.

“아버지는 ‘혁명’을 준비하고 계시는 거야. 위대하신 분의 진정한 각성을 위해!”

“혁명?”

“맞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행복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셔. 언젠간 위대하신 분도 아버지의 노력을 칭찬해 주시겠지. 너는 좋겠다.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위대하신 분의 선택을 받다니…….”

거기까지 말한 지오반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알례리와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조각난 장난감 님이 이제 슬슬 널 찾아다니실 것 같은데.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 오늘도 같이 놀이를 하는 거야.”

지오반니가 푸른색 구슬을 꺼내 버드맨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오늘은 히어로 잡기 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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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들지…….’

재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캠핑장에는 재언이 있는 텐트를 제외하고 어느 곳에서도 불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돌연변이의 등장에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서 짐을 싸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캠핑장 주인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저런 고충을 늘어놨다.

“잘 모르겠어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저런 괴물은 없었다고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이러다 우리 다 망하고 죽을 것 같으니까요!”

그동안 시달린 게 상당한 모양인지 넋두리를 늘어놓던 노부부가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듯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 갑자기 소리 질러서 정말 미안합니다. 속상해서 살 수가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더 큰 피해가 생기기 전에 그를 보호소나 감시원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부탁한다며 매달리는 노부부를 다독인 뒤 관리실 밖으로 나온 세 사람 중 광안의 성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돌연변이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사회적인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들 대부분이 파괴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피해를 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도 히어로 협회와 보호센터에서 협약을 맺어 아직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돌연변이를 보호,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까보다는 빛의 세기가 줄어든 구슬을 허공으로 띄우며 말을 이었다.

“요즘 영혼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어서 제가 힘을 쓸 수 있는 한도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힘을 빌려주시겠습니까, 레드-헬-파이어.”

“난 꽤 비싸. 모두가 당신처럼 봉사활동이나 하면서 사람을 구한다고 여기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값은 지불하겠습니다.”

거래를 마친 S급 히어로 두 명은 범위를 더 늘려 탐색을 하기로 하고, 재언은 라라와 함께 텐트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자 차민재가 함께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못 떼고 있었다.

“이왕 해결해 주기로 한 것, 이쪽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그 돌연변이가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고 하잖아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템을 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레드-헬-파이어를 소환하는 버튼☆’을 꺼내 흔들면서 차민재를 간신히 달래 배웅한 재언은 허리를 숙여 옆에서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는 라라에게 말을 걸었다.

“코코아라도 타 줄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곁에 있던 히어로들이 없어지고 정적에 싸인 텐트 안을 돌아보던 재언은 설마 ‘럭키 가이’인 자신이 운 나쁘게 돌연변이와 마주칠까 하는 마음으로 캠핑 의자에 앉았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코코아를 타 주기 위해 냄비에 우유를 붓고 끓어오를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곁에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위대하신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드디어 귀신들의 성녀가 돌아왔다. 그래도 사고 치지 않고 돌아온 모습에 화를 좀 진정시켰나 싶었는데 목소리에 힘이 쭉 빠진 걸 보니 엔레이드맨에게 된통 혼이 난 모양이다.

“별일 없이 돌아와 다행이야. 그런데 넌 정말 광안의 성녀를 싫어하는구나?”

한참 동안 머뭇거리던 귀신들의 성녀는 재언이 끓인 우유를 컵에 담고 코코아 가루를 타는 걸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 그 여자는 위선자예요. 듣기 좋은 말을 해서 저를 방심시키더니 결국 제 소중한 물건을 없애 버렸어요. 저는 그 여자 때문에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본인은 죽을 생각이나 하는 게 너무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에 재언은 코코아를 라라에게 건네주면서 잠시 생각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결국, 저 말은 광안의 성녀가 죽는 게 싫다는 말 아닌가?’

라라가 뜨거운 코코아를 한 번에 들이켜려 하기에 천천히 식혀 먹어야 한다고 재언이 컵을 빼앗고 있을 때 귀신들의 성녀가 모습을 드러내 날카롭게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당장 나오지 못해?”

앙칼진 목소리로 내뱉은 호통에 수풀 너머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움직였다. 낙엽 밟는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을 보면 산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인지라 귀신을 무서워하는 재언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귀신도 악귀도 아니었다. 검은색 도포에 검은 삿갓을 뒤집어쓴, 준수하고 날카롭게 생긴 사내였다.

“저는 두 번 다시 제 동생을 만날 날 따윈 오지 않겠죠.”

사내의 얼굴을 보자 귀신들이 성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저승사자 차사 광혼사였다.

그는 귀신들의 성녀를 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인, 낭자… 도움을 청할 것이 있어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귀신들의 성녀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꺼져!”

“자… 잠깐, 안 돼……. 너무, 너무 그렇게…….”

재언은 잔뜩 화가 난 귀신들의 성녀를 말리려 진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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