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이전에 저희를 도와주셨으니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죠. 일단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재언이 펄펄 뛰는 귀신들의 성녀를 막으며 머쓱하게 웃자 광혼사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빈 캠핑 의자에 앉은 그는 문득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무표정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고 있긴 하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에는 무생물처럼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한참을 의아한 시선으로 소녀를 쳐다보던 광혼사가 재언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아니 이상한 게 맞긴 하죠. 이 아이는 한 영혼을 옮기기 위해 만든 인공적인 사람으로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껍데기라지만 스스로 움직일 줄 아는 어린아이를 두고 인형이니 뭐니 그런 식의 표현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인간은 참으로 잔인한 걸 만드는군요. 하지만… 이 아이에게서 희미한 불꽃이 느껴집니다.”
“불꽃이요?”
생소한 말에 재언이 되물었지만 광혼사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뿐 자세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재언은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며 본론을 꺼냈다.
광안의 성녀가 재언을 감시할 의도로 라라를 맡긴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무슨 도움을 드려야 합니까?”
“일곱 번째 재판이 진행 중이던 영혼이 ‘귀문’이 열리는 틈을 타 이승으로 도망쳤습니다.”
“아… 그러면 환생할 수 있는 자격이 상실되는 것 아닙니까? 벌로 지옥에 떨어지나요?”
“죄지은 적도 없고 같은 인간에게 당하기만 했던 가여운 영혼입니다. 영혼에 새겨진 죄의 무게가 가벼워 재판을 넘기기만 하면 좋은 환경에서 환생할 수 있을 텐데 마지막 재판에서 그대로 도망치고 만 것입니다. 사흘 내로 재판을 받지 않는다면 지옥 명단에 오르게 되겠지요.”
죄 없는 가여운 영혼의 처지가 안타까운지 말을 이어 가는 광혼사의 표정이 착잡했다.
“그 영혼의 흔적이 끊긴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곳에서 대인과 낭자를 뵙게 되어… 정말 놀랐습니다.”
조선 시대에서나 쓸 법한 저런 말투는 어디서 어떻게 배우게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 채 재언은 어색하게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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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혼도 인생이 참으로 기구하군요. 그래서, 그녀의 사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례도 치러 주지 않았지만, 무탈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네요.”
“네.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박다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혼의 인생 또한 누구보다도 기구한 사연을 가졌다.
재언이 있는 캠핑장 위쪽의 작은 주택에서 남동생과 살았던 그녀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생활 전반을 사촌에게 의탁하며 살아갔다.
사망한 시점의 나이는 고작 서른다섯이었으며 신경계 쪽 장애를 가지고 있어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는 1급 장애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나오는 기초 생활비는 보호자로 나선 사촌이 전부 가져갔고, 사촌은 그녀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보살폈다.
원래 주인이 받아야 할 기초 생활비의 아주 일부를, 그것도 거지에게 동냥하듯 주던 것마저 까먹은 날 그녀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 집을 나섰다가 뺑소니 차에 치여 사망했다.
재언을 더욱 기가 막히게 만든 것은 사촌은 죽은 혈육에 대해 장례나 사십구재마저도 치르지 않았다. 오히려 공돈 들어올 구멍이 사라졌다며 아까워했단다.
평생을 착취당하는 끔찍한 생을 살았지만, 저승에서는 조금이나마 보답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마지막 재판 전날 귀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녀의 영혼이 이승에 오게 될 줄은 저승의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광혼사는 기구한 생을 살았던 영혼을 동정하며 지옥 명단에 이름이 적히기 전에 찾아 저승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촉박하다면 촉박할 수 있지만, 서두른다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이번 ‘귀문’이 시기적절하게 열린 것 또한 수상합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이것을 노려 ‘귀문’을 개방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전에 귀신들의 성녀가 ‘귀문’이 열리는 경우는 총 세 가지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저승사자들이 이승에 머물러 있는 영혼을 회수하러 오기 위해 여는 ‘진법’이다.
그리고 자연재해처럼 우연히 열리는 경우가 두 번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두 번째 경우 때문에 가끔 악귀들이 지옥에서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외부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 억지로 열리는 아주 특이한 경우가 있다.
참고로 귀신들의 성녀가 지옥에서 악귀를 끌어다 쓰는 방법은 세 번째가 아닌 첫 번째에 속했다. 그녀는 저승에 있는 상위 존재에 버금가는 능력으로 ‘귀문’을 열어 귀신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기 때문에 그녀가 능력을 사용한다고 저승에 혼란을 야기하진 않았다.
“그러면…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영혼이 생전에 살았던 집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만, 저승사자들은 인도해야 할 영혼이 없으면 집주인이 문을 열어 주는 게 아닌 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론 집주인이 아닌 다른 인간이 열어 주는 건 상관없습니다.”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으로 갔을 거라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왜냐면… 재판에서 도망친 영혼인데 그렇게 잡기 쉬운 곳에 있을까요?”
“…네. 영혼에 미련이 남아 있으면,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부모를 잃고 남동생과 단둘이 핍박받고 살았다 했으니…….
매일같이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귀신들의 성녀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펜을 챙겨 온 뒤 라라를 일으켜 세웠다.
설마 잠시 나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두 사람이 먼저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 메모는 남겨 놓을 생각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곧 돌아올 예정이니 찾지 마세요. 라라는 혼자 둘 수 없어 제가 데려가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메모를 써서 캠핑 의자에 올려놓고 재언은 라라를 데리고 텐트를 나섰다.
한밤중의 텅 빈 캠핑장은 관리실 쪽의 불빛마저 사라져 어두컴컴했다. 라라를 품에 안은 재언은 캠핑장 위쪽의 작은 샛길을 발견하고 귀신들의 성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길 주변에 위험한 건 없는지 먼저 가면서 확인해 줘.”
“네, 아버지.”
아직도 어두운 표정의 그녀는 재언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샛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던 재언은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 광혼사에게 내밀었다.
[마리암에게 정체를 알릴 생각은 없습니까? 그녀는 당신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광혼사는 급하게 갈겨쓰느라 삐뚤빼뚤한 재언의 글씨를 몇 번이고 읽으며 한참 동안 이어지는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환생과 저승, 둘 중 하나를 고를 기회가 주어졌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해서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고, 저승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만을 기다리며 버텨 왔지요. 몇십 년 동안 그리워한 건 맞으나… 저승사자는 이승의 일에 직접적으로 끼어들면 안 됩니다. 제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저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빌 수밖에 없죠.”
역시 귀신들의 성녀에게 직접적으로 알리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구나.
하마터면 입을 잘못 놀려 광혼사를 없애 버릴 뻔했다. 재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꽃 조리개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아닙니까? 저는 왜 당신이 보이는 겁니까?”
“저승의 허락을 받고 이승으로 온 저승사자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할 때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하며 샛길을 따라 쭉 올라가자 낡고 쓰러지기 직전의 건물이 하나 보였다.
사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만큼 이곳저곳에 거미줄이 쳐 있는 건 물론 벽에 금이 잔뜩 가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런 으스스한 폐가가 산 한복판에 왜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잠시 광혼사의 걸음이 그 앞에서 멈추었다.
바로 이곳이 영혼이 살아생전에 살았던 집이 아닐까 싶었다. 사람 두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을 법한 아주 좁은 집이었다.
벽에 대고 밀기만 해도 집 자체가 그대로 밀려 나갈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진심인 듯 광혼사는 앞으로 더 걸음 하지 못하고 재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언은 내키지 않은 마음을 꾹 누르며 문의 손잡이로 보이는 것을 잡고 조금씩 밀었다.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눈앞에 보이는 내부의 모습에 재언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