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라라를 껴안고 산 아래쪽으로 향하는 재언의 시야 이곳저곳에서 귀신들이 튀어나왔다. 귀안이 아직 닫히지 않은 탓이었다.
재언은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 혹은 그와 관련된 영상은 제대로 못 볼만큼 귀신에 아주 약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는 빌런 왕은 히어로의 협공이 아닌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귀신을 보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래서 귀안을 열고 싶지 않았던 건데……. 여는 건 자유롭게 하지만 닫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단 말이야.’
그나마 껴안고 있는 어린아이의 무게를 느끼며 저세상으로 떠나려는 정신을 간신히 잡고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중간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귀신들을 최대한 보지 못한 척하며 재언은 말없이 뒤따라오는 귀신들의 성녀를 살폈다.
“귀신들의 성녀, 왜 그래?”
“아닙니다, 아버지… 단지… 그 저승사자, 왠지 익숙한 분위기를 가져서요.”
‘들켰나? 아직 모르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긴 하네.’
귀신들의 성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광혼사의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재언은 죄책감이 들었다.
살벌했던 산길을 겨우 내려가자 캠핑장에서 유일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텐트 밖을 서성이고 있는 광안의 성녀가 보였다. 귀신들의 성녀가 엔레이드맨의 둠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재언이 그쪽으로 달려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광안의 성녀가 고개를 돌렸다.
“신재언 씨,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 라라는…….”
“아… 죄송해요. 이곳에 혼자 둘 순 없어서 데려갔었어요.”
조심스럽게 라라를 내려놓자, 아이는 멀뚱멀뚱 눈만 깜박이며 서 있다가 광안의 성녀 쪽으로 총총 달려갔다. 저렇게 있으니 둘이 쏙 빼닮은 모녀였다.
“민재 씨는요? 같이 간 게 아니었습니까?”
“…저는 돌연변이 보호 센터에 연락하고 온 참입니다. 다행히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협회에서 돌연변이의 신상정보를 받았습니다.”
돌연변이 보호 센터는 히어로와 협동해 돌연변이들을 보호하거나 구속하는 기관이었다. 그곳에 연락을 넣었다면 캠핑장에 나타난 돌연변이를 데려가기 위해 히어로가 몇 명 파견될지도 모르겠다.
광안의 성녀가 말하기를 돌연변이의 이름은 박철수, 이름도 없이 살아오다가 일곱 살에 출생신고를 하면서 겨우 지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세 살에 변이가 시작된 그는 그때부터 날생선이나 날고기를 먹는 등의 동물 같은 식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쪽만 비대하게 커진 눈으로 1km나 떨어진 곳까지 생명체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날렵한 특성을 가졌으나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허기가 져 매일같이 배고픔을 호소했다.
재언은 광혼사에게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지만, 그녀가 이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알아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란 참이었다.
“그리고… 레드-헬-파이어는 잘 모르겠어요. 그는 저와 같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사람을 살리거나 돕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히어로를 자처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느낀 그 남자는 검은색에 가까워요.”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색이 탁하고 어두울수록 빌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기하게 정도를 지키면서 히어로를 하고 있더군요.”
그 말에 살짝 호기심이 일은 재언의 눈빛이 반짝였다.
‘광안의 성녀는 눈을 가리고 다니는 대신 사람이 볼 수 없는 여러 가지를 본다고 했지? 색으로 사람을 구분한다면… 나는?’
재언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빈말로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라는 빌런이었다.
사실 어떤 빌런들보다 새까맣고 탁한 색을 가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자신의 딸을 맡기는 등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신기했다.
“당신은 사람을 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죠. 그렇다면 저는 무슨 색입니까?”
“…신재언 씨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짧게 침묵한 뒤에 이어서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네?”
“잘 모르겠어요. 신재언 씨를 이루는 색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밝고 하얗게 보이기도, 어둡고 탁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아주 놀랐었죠.”
이건 또 의미심장한 이야기네.
그 이후로 사건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고 있던 두 사람의 시야에 저 끝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차민재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돌연변이가 다시 나타날까 봐 주변을 탐색하고 왔다는 세계 최강의 히어로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 올 거라는 기대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하지 않았다.
재언은 혹시 몰라서 차민재와 광안의 성녀에게 각각 조각난 장난감의 일부를 붙여 놓았고 두 히어로가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광안의 성녀는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면서 돌연변이에 대해 조사하고 다른 피해가 일어나진 않을까 어두컴컴한 산을 부지런히 돌아다닐 때 레드-헬-파이어는… 캠핑장에서 조금 떨어진 개울가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핸드폰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봤는데, 누구와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요즘 광고로 많이 보이는 유명한 가챠 게임을 느긋하게 하며 산속을 올려다보던 그는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다 피울 때까지 놀았다.
몸에 탈취제를 뿌리고 천연덕스럽게 열심히 일한 척 돌아온 것이다. 재언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쳐 주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동상이몽의 세 사람이 캠핑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을 무렵, 갑자기 관리실에서 한 노인이 튀어나와 텐트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노부부 중 남편 쪽이었다. 노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히, 히어로님들! 그놈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신 겁니까? 저, 저 산속에… 저 산속에서 그놈이 절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급기야 흰 머리카락이 가득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관리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속이었다.
목이 말라 밤중에 눈을 뜬 노인이 불을 켜기 위해 벽을 더듬거리다가 창밖에 눈길을 준 순간, 그 돌연변이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했단다.
그런데 노인이 가리킨 산속은 아무리 관리실과 가까워도 그곳에 있는 생명체를 맨눈으로 확인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놈이 기어이 우리를 망치려 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이쪽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저희가 모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광안의 성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인을 달래려 애썼다.
“그… 그 괴물을 제발 잡아 주십시오. 그 은혜도 모르는 놈이…….”
노인의 말에서 풍기는 위화감을 깨달은 재언이 불쑥 나섰다.
“잠깐만요, 할아버지. 그 돌연변이를 알고 있었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머뭇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사실 그 돌연변이는… 제 조카입니다. 그런 괴물을 누가 좋다고 키우겠습니까? 당연히 부모에게도 버림받았지요. 핏줄이라는 이유로 착한 저희 아들 내외가 그놈을 먹여 주고 재워 줬는데 배은망덕한 놈이 몇 달 전부터 캠핑장 아래로 내려와 손님들을 겁주지 뭡니까.”
노인은 답답한지 가슴을 쿵쿵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덕분에 귀신 들린 캠핑장이라고 소문까지 나고, 오늘도 손님들이 모두 도망쳤으니……. 이러다 망하게 생겼어요.”
광안의 성녀가 노인을 동정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재언의 얼굴은 노인이 말을 이어 갈수록 차갑게 변했다. 박다은 남매의 허름한 집이 사유지로 보이는 산 위쪽에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분이 조카라는 걸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광안의 성녀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잔뜩 감정이 고조된 노인을 진정시키며 말을 꺼냈다.
“…저도 사실 조카일 줄은 처음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왜냐면 그 애에겐 누나가 있었는데 몇 달 전 불의의 사고로 그만… 그 뒤에 조카가 갑자기 사라져 영락없이 누나를 따라간 줄로만 알았습니다.”
노인이 늘어놓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봐도 누나 쪽이 교통사고로 죽자마자 조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광안의 성녀에게 동생 쪽을 처리해 달라고 히어로 협회에 의뢰를 요구한 셈이지 않나.
미리 광혼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면 인자하고 차분한 노인의 모습에 재언도 깜빡 속을 뻔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캠핑장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조카가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해 캠핑장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했지 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노인이 차분하게 설명하는 말만 들으면 진짜라고 생각할 만큼 그럴싸했다.
재언이 저 염치를 모르는 노인과 남매의 기구한 사연에 이마를 꾹꾹 누르는 사이 민재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힘주어 자신 쪽으로 잡아당긴 것과 동시에 광안의 성녀가 눈을 가린 천을 푸르더니 구슬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무언가 옵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