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60화 (160/324)

160화

쿵! 쿵!

땅이 진동했다. 울림이 점점 커지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소리가 나는 쪽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재언은 곧이어 드러난 형상에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입 밖으로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저, 저건 뭡니까!”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휘둥그레 놀라며 노인이 경악에 차 소리를 질렀다. 어두운 밤, 광안의 성녀가 가진 구슬에서 나오는 은은한 불빛을 통해 드러난 무언가는 아주 기괴한 모습을 가진 생명체였다.

그것은 커다란 덩치에 몸이 잔뜩 비틀려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고 근육질인 한쪽 팔과 달리 다른 쪽 팔은 막대기를 어깨에 꽂아 놓은 것처럼 가늘었다. 마치 영화나 게임 속에서나 나올법한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엔 푸른색 핏줄이 잔뜩 돋아났고 얼굴 반쪽만 한 커다란 눈알이 위아래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신재언을 향했다. 재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일행 쪽으로 달려왔다.

“으아악!”

괴물이 움직이자 뒤로 주춤거리던 노인이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재언조차 옆에 S급 히어로가 두 명이나 있는데도 괴물의 기백에 몸이 움찔 떨릴 정도였다. 괴물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흉측한 모습이 더욱 선명해지는 데다 괴물의 덩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다랬기 때문이었다.

‘엄청 무섭네!’

광안의 성녀가 눈을 가린 흰 천을 푸르고 괴물의 눈을 마주 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메두사의 눈’이 통하지 않자 다시 눈을 감고 작은 구슬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이윽고 구슬에서 쏘아진 밝은 빛이 괴물의 앞에서 터졌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괴물의 주먹과 몸부림 한 번으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자신의 모든 공격이 막힌 광안의 성녀가 경악하는 표정으로 일행에게 소리쳤다.

“제 능력이 통하지 않습니다! 모두 도망치세요!”

당황한 그녀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 S급 히어로가 자신 외에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괴물과의 거리가 약 50m 정도 남았을 때 헬파이어가 괴물의 발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은 순식간에 괴물의 살갗을 녹여 버렸다.

재언이 알기로는 저 불꽃에 살아남는 생명체는 절대 없었다. 게다가 그의 헬파이어는 ‘인간의 상위급 존재’들마저 공포에 떨게 하는 능력이었다.

괴물이 헬파이어에 타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까맣게 타 버린 뼈가 재생되더니 빠른 속도로 피부가 차올랐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괴물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게 뭐람! 레드-헬-파이어의 능력도 통하지 않아?!’

재언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굳어 있는 동안 차민재는 그의 몸을 붙잡고 뒤쪽으로 크게 물러나 괴물과의 거리를 벌렸다. 광안의 성녀 역시 라라를 끌어안고 물러나며 주저앉아 덜덜 떠는 노인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괴물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재생된 괴물이 빠르게 다가와 깍지 낀 양손을 들어 올려 노인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땅에 닿은 괴물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으윽…….”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장면에 재언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 괴물… 재생 능력이 뛰어나 공격받는 즉시 자가 치유를 시작합니다. 레드 헬 파이어… 당신의 능력으로 저 괴물이 재생되지 못하게끔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까?”

잔인하게 죽은 노인의 최후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본 광안의 성녀가 레헬에게 물었다. 그가 귀찮아졌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있지.”

“그렇다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일대는 불바다가 되고 말걸. 여기뿐만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마을까지 난리가 날 거야.”

그에 재언이 무심결에 덧붙였다.

“그럴 순 없죠. 헬파이어로 불타 버린 땅은 두 번 다시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니까요.”

“…….”

거기까지 말한 재언은 아차 싶은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히어로인 레헬이 아직 이 땅에 그 정도로 피해를 준 적이 없는데, 이런 사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눈앞의 성가신 괴물 때문에 두 히어로가 자신의 말을 깊이 새겨듣지 않은 듯했다.

“아… 아파, 너, 너무 아파. 누나… 괴로워. 살려 줘!”

괴물이 침을 질질 흘리며 발을 몇 번 구르더니 다시 이쪽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때 레헬의 거대한 불의 장막이 순식간에 괴물을 집어삼켰다.

괴물은 자신의 육체를 태우는 뜨거운 불꽃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이번엔 조금 더 강하게 불꽃을 일으켰는지 괴물은 뼈도 남기지 않고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이제 끝났으려나……?’

재언이 재가 된 괴물의 잔해를 바라보며 희미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이내 잿더미가 점차 서로 뭉치더니 뼈가 되었고, 그 위를 근육과 지방이 덮여 다시 새살이 돋아났다.

저 괴물이 다시 태어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초였다.

“저런 성가신 괴물이 어디서 나온 거죠?”

레헬의 헬파이어마저 무력화시킨 존재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계 최강을 골탕 먹일 수 있는 괴물이 설마 대한민국의 강원도 캠핑장에 숨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눈뜨고도 믿기 힘든 장면을 보며 광안의 성녀가 라라를 끌어안고 식은땀을 흘렸다.

“저 괴물…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재언 역시 괴물에게서 위화감을 느낀 참이었다.

재생되어 일어난 괴물이 다시 일행 쪽으로 덤벼들려 했다. 또다시 재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갑자기 자신의 비대한 팔로 목을 감더니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돌렸다.

괴물은 검은 눈물을 쏟아 내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그, 그윽, 그를 다, 다치게, 다치게 하면 안 돼……. 그윽… 그엑.”

재언은 영문 모를 행동을 하는 괴물에 당황하면서도 경황이 없어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목격했다. 바로 괴물의 어깨 위에 있는 핏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피투성이의 손이었다.

더욱 자세히 살펴보니 조금 전에 광혼사와 함께 있었을 때 목격했던 귀신이었다. 산속에서 돌연변이 사내에게 매달려 있다가 함께 흔적을 감추는 바람에 광혼사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박다은의 영혼이었다.

그녀가 왜 저 괴물의 어깨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을까. 귀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이승과 저승은 차원이 다르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재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저 괴물… 혹시 오후에 봤던 그 돌연변이, 박철수 아닙니까?”

“…….”

광안의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곤란한 표정에 재언은 확신했다. 그녀 역시 그가 박철수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러면 그저 돌연변이일 뿐이었던 박철수가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괴물 같은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일까.

“배… 배가… 이제 고프지, 않은데. 근데 계속 아파… 누나. 누나…….”

재언이 괴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그가 위험에 빠지면 앞뒤 잴 것 없이 튀어나오기 위해 상황을 지켜보던 귀신들의 성녀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걸었다.

- 아버지. 저 괴물에게 붙어 있는 저 여자… 계속 그만하라고 울고 있어요. 그 소리에 머리가 아파 깨질 지경이에요!

재언은 그녀의 말속에서 여기서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정체가 들통나 버릴 것 같은 느낌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 게다가 동생 쪽은… 자의로 저 모습이 된 게 아닌가 봐요. 머리가 두 개인 놈들이 동생에게 수작을 부린 거니 제발 살려 달라고 이쪽을 향해 빌고 있네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귀신이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재언은 그것보다도 방금 들은 새로운 정보에 머릿속이 온통 어질어질했다.

박철수를 저런 꼴로 만든 원흉이 따로 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괴물이 이번에는 라라를 안고 있는 광안의 성녀 쪽으로 달려들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공격을 하는 건 아니고, 마구잡이로 팔다리를 흔드는 식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땅이 쪼개지거나 나무가 두 동강 나는 등 공격력이 어마어마했다.

‘레헬과 광안의 성녀가 두 눈 뻔히 뜨고 보고 있는데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답답하네.’

그동안 민재는 한순간도 재언을 안은 팔을 풀지 않으면서 괴물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불에 태우거나 무중력 상태로 만들어 공중에 띄운 뒤 바닥에 떨어트리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것도 한순간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고통은 고통대로 전부 느끼는지 괴물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더욱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처음에는 재언이 있는 쪽을 공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다가 계속된 공격에 결국 그마저도 잊은 듯했다.

레헬이 몇 번이고 능력을 사용해 봤자 순식간에 살이 차오르는 괴물의 재생력은 따라갈 수 없었다. 불타올라 재가 되어도 다시 덤벼드는 괴물을 보다가 왠지 모르게 머리 위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낀 재언이 고개를 들어 차민재를 올려다봤다.

‘위험해! 눈이 이상한데?’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서늘하다는 태백 지역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에 의해 가장 뜨거운 지역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차민재의 두 눈에서 붉은빛의 레이저가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와중에 귀신들의 성녀까지 거들었다.

- 위험합니다, 아버지!

‘아니, 너도 나오지 마!’

그녀가 지금 상황에서 뛰쳐나오면 오랫동안 평범하게 살고 싶은 자신의 인생이 엉망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한쪽은 불바다, 다른 한쪽은 정체가 발각될 위기,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그때 재언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주었는지 그 순간 푸른색의 빛이 나타나 괴물을 감쌌다.

발밑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새파란 번개를 온몸에 휘감으며 갓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검은색 도포를 펄럭이며 재언을 향한 괴물의 공격을 한 번에 막아 버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생긴 순간, 도주로를 만들어 준 사내는 바로 광혼사였다.

“광혼사!”

검은 안개가 박철수의 눈을 가렸다. 눈앞이 보이진 않음에도 되는대로 휘두르는 괴물의 공격을 광혼사는 검으로 흘려 피한 뒤 저승 문을 소환해 냈다.

“대인,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차민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언 씨, 이 남자는…….”

재언은 그의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도 되는지 주저하며 눈치 보듯 광혼사를 힐끔거렸다.

‘민재 씨 눈에도 보이는구나. 그러면 광혼사는 지금 실체화한 건가?’

재언의 의문은 상황을 지켜보던 귀신들의 성녀가 대답해 주었다.

- 저승사자가 실체화해 이승에 개입하면 큰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저 저승사자는… 너무 태연하군요.

마침 재언과 눈이 마주친 광혼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저승사자 차사 광혼사입니다. 저승에서 탈출한 영혼을 찾고자 이곳에 왔는데 우연히 마주쳐 곤란해하기에 옛날에 도움을 받은 적도 있고,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재언 씨는 저승사자와도 아는 사이군요.”

“…….”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승사자와 친분을 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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