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제가 이승에 실체화할 수 있는 시간인 길게 잡아 십분, 그 이상으로는 힘을 빌려드리기 힘듭니다.”
광혼사가 나타나 준 덕분에 레헬이 이성을 찾고 태백이 불바다가 되는 건 막았지만, 아무래도 시간제한이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저는 이미 대인을 구하기 위해 많은 힘을 사용했습니다. 이승의 일에 개입하고 말았고 그것만으로도 대가를 치러야 하죠. 그러니 저는 그를 상처입힐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 재언은 광혼사가 아까부터 저승문에서 나오는 검은 안개 같은 것으로 괴물의 눈을 가리고 공격을 흘리기만 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갑작스러운 저승사자의 등장에 잠시 멈칫했던 레헬은 광혼사가 괴물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 보다가 공격을 재개했다.
괴물의 발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본 광혼사는 처음엔 놀라는 눈치였으나 곧 레헬의 페이스에 맞추어 갔다. 그러던 중 괴물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불꽃은 정말 지옥의 불꽃과 닮아 있군요……. 오랫동안 죄를 지어 온 영혼들을 불태워 소멸시키는 무시무시한 힘을요. 벌써 그의 영혼이 마모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저승에 발을 디디지도 못한 채 소멸할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에 재언은 괴물이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이성을 잃는다는 걸 눈치챘다. 어색하게나마 말을 할 수 있던 처음과는 달리 지금 괴물의 입에선 비명과 고함밖에 나오지 않았다.
잿더미 속에서 계속 부활하는 괴물에게 질린 얼굴을 하던 민재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계속 태우다 보면 그 빌어먹을 영혼이라는 게 사라진다는 말이군?”
그의 공격이 더욱 거리낌 없어졌다.
“으아악! 으어, 으어억! 어, 엄마. 누, 누… 누나. 아빠……!”
끊이지 않고 몰아치는 헬파이어에 박철수는 재가 되었다가 살아나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광혼사는 물론 재언까지도 눈앞의 잔인한 광경에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오히려 괴물이 가여워지려는 마음이 들었다. 재언은 차라리 그가 고통이라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광혼사는 불타는 괴물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는 박다은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굉장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재언은 저 남매가 귀신들의 성녀와 광혼사를 닮아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같은 집단의 사람들에게 배척받았고, 또한 고통스러운 이별을 했다.
“이제… 그만,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광혼사가 결국 눈물을 흘리며 레헬의 팔을 잡았다.
“박철수의 영혼이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그를 살아 있게 하여 영혼을 짓이기는 끔찍한 짓을 대체 누가 했는지…….”
괴물이 있던 자리에는 박다은의 영혼만이 남아 더 이상 재생되지 않는 동생의 몸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녀가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질 각오를 하면서 박철수를 왜 찾아왔는지 자세히 알 순 없었다. 하지만 귀신들의 성녀가 동생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비슷한 이유일 게 분명했다.
그런 박다은을 바라보던 광혼사는 착잡한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박철수를 명부에 적었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가 박다은의 영혼을 회수한 후 뒤를 돌아 재언을 바라보았다.
“…신재언 씨, 박다은이 박철수를 이렇게 만든 자들의 얼굴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두 개 달린 쌍두 인간이며 어떤 자의 명령을 받았다는군요. 이름은 알,”
광혼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로 기다란 창이 내려와 꽂혔다. 창이라기보단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긴 파이프에 가까웠다.
파이프가 바닥에 꽂히고 광혼사의 몸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광경에 재언은 설마 저승사자가 공격받았나 하는 마음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귀신들의 성녀가 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 저승사자가 죽은 건 아니에요! 그는 시간이 다 되어 저승으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저승사자를 공격하면 이승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반격이 가능해지는데, 저들은 운이 좋네요.
‘다… 다행이다. 죽진 않은 거구나. 그런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재언이 의아한 얼굴로 바닥에 꽂힌 파이프를 살펴보던 중에, 머리가 두 개인 인형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박철수의 시체 위에 올라탔다. 한쪽은 피에로 얼굴, 다른 한쪽은 우는 듯한 표정의 검은색 얼굴을 가진 인형이었다.
인형은 저승사자가 영혼을 회수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신에서 푸른 구슬 하나를 꺼냈다.
‘저게 뭐야!? 저주받은 인형인가? 아니면 설마 여기 능력자가 있나?’
재언이 놀라 입만 벌린 사이 인형이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누구긴. 다크 카오스님의 새로운 선택을 받은 우리가 그분의 재림이 시작되는 이 날을 위해 준비한 작고 소소한 유흥거리지.”
“부디 그분께서 우리의 작은 유희를 즐겁게 관전해 주셨으면 좋을 텐데.”
인형의 말에 재언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나 모르게 다른 다크 카오스가 생긴 거야? 이런 자리 언제든지 넘겨줄 테니까 말만 해!’
푸른 구슬을 품에 안은 인형이 재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다크 카오스의 정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아는 듯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재언과는 달리 차민재는 별 같잖은 것들이 나타났다는 것처럼 잔뜩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깔깔깔깔.”
크게 폭소하는 쌍두 인형에서 레헬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인형이 들고 있던 푸른 구슬이 사라지면서 인형 역시 실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광안의 성녀는 박철수의 시신에 애도를 표하며 기도한 뒤 인형을 주워 들고 재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은 박철수를 상대하느라 온몸이 흙과 먼지로 가득했고 들고 있던 구슬에서는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았다.
“…사형수라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제 눈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언제나 공포로 물들어 있으니까요. 저는 살아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편하게 눈을 떠본 적이 없었죠. 하지만 잠깐이나마 볼 수 있는 세상은 아름답다는 걸 잘 압니다.”
그녀 또한 인형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분 나쁜 기운을 읽었는지 눈을 찌푸렸다.
“그런 세상과 다크 카오스는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일까요? 다크 카오스의 새로운 자식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악독하고 잔인한 짓을 벌이는 자들이…….”
‘아니! 전쟁 따위 벌이지 않아! 그냥 월급이나 받으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보다 저 자식은 누구야?!’
경악하는 재언을 뒤로하고 레헬과 광안의 성녀는 각자 사무실과 히어로 협회에 연락을 취해 경찰과 히어로들을 불렀다. 사망사고가 발생했기에 재언은 조사를 끝낼 때까지 캠핑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S급 히어로 두 명과 아는 사이라고 하니 경찰과 히어로들은 재언을 아주 깍듯하게 대했고, 참고인으로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진술만 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다.
참고인 진술을 하는 도중 재언은 경찰에게서 한 가지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캠핑장 주인인 노부부 중 살아남은 아내 쪽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캠핑장은 박다은과 박철수의 부모가 소유하고 있던 곳으로 돈에 눈이 먼 친척 내외가 작당하고 살인을 저질렀단다.
캠핑장을 포함해 뒤쪽의 산이 모두 두 남매의 부모가 가진 땅이었고, 그들은 두 남매에게 부모가 너희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속였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한 그들은 산속에 남매를 가두고 키워 왔던 것이다.
재언은 박철수가 죽을힘을 다해 노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안타까움에 우울한 얼굴로 캠핑장에 쫙 깔린 경찰들을 돌아보며 손에 쥔 캔커피를 홀짝였다.
간신히 받은 휴가에 느긋하게 캠핑도 즐기고 어린 연인과 꽁냥꽁냥 하고 싶은 게 사치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나마 하루 만에 사건이 끝난 덕분에 오늘 밤이 겨울 휴가의 마지막 날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재언과 차민재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캠핑장에서 남은 1박 2일을 보내기로 했다. 주인도 없는 귀신 들린 캠핑장에서는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캔커피를 홀짝이며 주변을 살펴보던 재언은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다는 걸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뒤쪽의 산으로 올라갔다. 캠핑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올라간 재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약왕, 거기 있지? 나와.”
하지만 그의 말에 대답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올린 재언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 내가 화를 내야 하겠어!?”
신재언의 호통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던 마약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고 선량한 표정을 지은 채 알례리는 재언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나의 아버지, 저 알례리를 부르셨습니까?”
알례리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재언의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