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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62화 (162/324)

162화

마약왕은 조각난 장난감의 일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대담한 짓을 벌였다. 그것은 재언에게 들킬지도 모른단 사실을 이미 염두에 두었다는 말이었다.

“알례리… 너, 이번엔 도가 지나쳤어.”

“무슨 말씀이신지…….”

재언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린 말에도 알례리는 모른 척 말끝을 흐렸다. 그는 그동안 어지간한 일에도 마약왕을 용서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눈감아 줄 수가 없었다.

“그런 세력을 키우고 내 곁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버지.”

알례리는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 모습에 재언은 폭력과 억압이 싫어 마피아 집안을 뛰쳐나왔던 의로운 청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알례리는 재언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갈 곳 없는 분노와 증오를 풀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널 몇 번이나 봐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재언은 자식들의 능력을 각성시킬 때 그들이 가졌던 증오심도 함께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레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며 애달픈 감정도 함께 가지게 된 것이다.

그건 마약왕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례리는 사랑하는 아내와 첫째 아들의 죽음을 겪고 괴로워한 끝에 힘이 약한 자기 자신마저도 증오했다. 그것은 결국 마약왕을 미쳐 버리게 만든 것이다.

“너희가 날 진심으로 아버지처럼 따르듯이 내게도 너희를 자식처럼 아끼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 같아?”

‘증오를 각성시키는 능력’은 능력자를 향한 각성자의 신뢰가 기본이었다.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려 절망적이고 비참한 순간 손을 내밀어 준 이를 따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신처럼 떠받들도록 만들었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언도 능력을 각성시키는 상대방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각성 시의 상황과 증오의 크기에 따라 능력이 달라지듯이 재언이 각성자에게 가지는 감정의 크기도 그에 맞춰 정해졌다.

그것을 처음부터 재언이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직접적으로 눈치챈 시점은 이레일의 능력을 각성시켰을 때였다.

사실 ‘증오를 각성시키는 능력’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증오심만 있으면 각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분별한 감정 소모가 극심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기준을 정해 그 이하로는 아무리 증오가 보여도 절대로 능력을 각성시키지 않겠다고 스스로 제약을 걸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도 체어맨이 슬퍼하는 모습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세간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지 이레일의 증오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재언을 아버지로 여기는 수준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신뢰감만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자식들에게 벽을 치고 빌런이라는 이유로 멀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 봤지만, 간간이 튀어나오는 감정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아버지.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겁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하지 못하시는 온갖 잡일을, 저 알례리가 도맡았습니다. 다른 형제들을 상처 입히지 않는, 우리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자고 그렇게 참혹한 짓을 저지른 거냐, 마약왕. 진심으로 너의 생각을 모르겠다.”

“아버지께서는 이상적인 신이십니다. 형제들은 당신께 선택받은 신의 자식들이고요. 모든 더러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미 형제들을 대신할 모조품들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힘이 의심된다면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자, 츠유. 모습을 드러내 우리의 위대하신 아버지께 인사를 드려라.”

알례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머리가 두 개인 사람 한 명이 불쑥 나타났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고, 마치 하나의 몸에 머리 두 개를 이식한 듯했다.

끔찍한 모습에 재언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둘 중 남자 쪽 머리가 히죽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가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비열하게 들렸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위대하신 분의 영원한 종 로에즈입니다. 조금 전엔 이렇게 인사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남자 머리의 말이 끝나자 뒤를 이어 여자 머리가 눈을 반짝이며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위대하신 분이여! 이 썩을 놈의 말은 귀가 썩으니 듣지 마십시오. 제 이름은 츠유, 당신을 만나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위대한 서커스, 위대하신 분을 위해 만들어진 광대들입니다. 부디 편하게 저희 무대를 감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머리들은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과장된 몸짓으로 폭소하며 깔깔 웃어 댔다. 겉모습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재언의 자식들에 견주더라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재언은 알례리가 뒤에서 이렇게 끔찍한 괴물들을 만들어 냈단 사실을 지금에서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아버지. 어떠십니까? 당신을 위해 만든 세 명의 장기 말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알례리를 재언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잠시 후 칭찬을 바라는 듯 잔뜩 기대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

“오늘부터… 넌 내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거다. 널 퇴출시키겠다는 뜻이야.”

“아버지……?”

마약왕의 옆에서 고개 숙여 무릎을 꿇고 있던 쌍두가 서로 눈짓을 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널 죽이지 않는 건 마지막 남은 내 사랑이야, 마약왕… 알례리,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단다.”

마약왕은 재언의 말을 처음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의 다리에 꼴사납게 매달렸다. 그는 재언에게 들켜도 화만 좀 내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잘라 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아버지! 위대하신 나의 아버지… 저, 저를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의 여섯 번째 자식인 저를, 저를 내치시겠다고요?!”

“그래. 그리고 조용히 살아. 죽은 사람들에게 속죄하면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알례리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짓에 비하면 재언의 선택은 대단히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알례리는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재언에게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아버지!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버지께서 저를 내치신다면, 저는 미쳐 날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을 전부 죽여 버릴 힘을, 저는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알례리가 ‘위대한 서커스’라고 이름을 짓고 반인륜적인 방법으로 능력자들을 만든 것은 전부 재언의 능력을 모방한 행위였다. 그러니 그는 이 모든 것이 전부 아버지와 형제들을 위함이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자신의 숭고하고 위대한 계획과 노력을 재언은 이해해 주지 않았다.

“버드맨과 조각난 장난감의 왼쪽 귀를 데려가겠어. 알례리… 네가 예전의 마음을 깨닫고 돌아간다면, 그땐…….”

“그럴 수 없어요. 그럴 수 없단 말입니다! 아버지. 세상은 착하고 건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든 걸 빼앗아 갑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고 저같이 아무것도 없는 놈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그런 더러운 세계란 말입니다!”

알례리가 떼를 쓰는 아이처럼 목에 핏줄을 세워 가며 고함을 쳤다.

“당신은 그런 세계에 철퇴를 내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일 텐데! 그런데 어째서!”

재언은 매달리는 알례리를 끌어안고 더 이상 그런 짓 하지 말라며 보듬어 주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깊게 한숨을 내쉰 그는 그대로 알례리를 밀어낸 뒤 등 돌려 걸음을 옮겼다. 알례리의 처절한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산속을 가득 메웠다.

“…보스, 이제 어떻게 합니까.”

“…….”

쌍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알례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짧게 침묵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래요. 아버지께서는 아직 불완전하시니 저, 알례리가 어디까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세상은 오로지 아버지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진정한 신으로 만든 뒤 죽어도 상관없으니 당신의 영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마치 하늘에게 다짐하듯 알례리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그때까지 당신과 저는 잠시 이별이군요……. 네… 이건… 시련입니다, 아버지… 나약한 당신일지라도… 저 역시 사랑합니다.”

말을 마치고 의미심장하게 웃은 그는 쌍두와 함께 일그러진 공간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훗날, 재언은 이때 가졌던 잔정으로 마약왕을 죽이지 않은 걸 평생을 두고 후회하지만, 지금은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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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왕 저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꾸미는지 짐작도 안 가네. 다른 자식들과 달리 숨기는 게 너무 많아. ‘이곳’에서는 좀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산에서 내려간 재언은 뜨는 해를 보며 심란해했다. 그때 드디어 전부 마무리되었다며 다가온 차민재와 다른 캠핑장으로 향했다.

또다시 사건에 휘말리진 않을 것이라며 위안 삼아 쉬는 중에도 마약왕에 대한 걱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부디 마약왕이 그대로 모든 것을 그만두었으면 하고 바랐다.

감방 간 자식이라도 결국 챙기게 되는 게 부모 마음이라더니, 딱 그쪽이었다.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아저씨를 골칫덩어리 자식으로 두게 된 현실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벌써 저녁이네요.”

“네. 뭐… 밤하늘은 예쁘네요.”

이곳 캠핑장은 그곳과는 다르게 구역마다 사람으로 가득했다. 재언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는 안경’을 쓴 차민재와 나란히 캠핑 의자에 앉아 화로의 불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런 재언의 얼굴이 무척 심각하다고 여긴 듯 민재가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었다.

“재언 씨, 안색이 나빠요.”

“…오늘 새벽까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냥 좀 피곤하네요…….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기도 하고…….”

콧잔등을 꾹꾹 누르며 재언이 한탄하듯 숨을 내뱉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재언을 바라보던 민재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사고뭉치를 계속 옆에 두려고 하니까 그렇죠.”

“…….”

처음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멈칫한 신재언이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차민재는 여전히 애정으로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애틋하게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재언이 굳어 있는 사이 차민재가 말을 이어 갔다. 여전히 따뜻하고 정겨운 연인의 목소리였다.

“그것 봐요. 나만이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어, 다크 카오스.”

“…무슨, 말인지.”

“재언 씨, 어디까지 기억했어요?”

신재언은 입술을 달싹였다. ‘차민재’는 전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교황부터 이 녀석까지 아주 골고루 한다고 생각하며 신재언은 입을 열었다.

공포와 난처함이 섞인 평소의 시선이 아닌, 귀여운 강아지의 재롱을 보는 사람이 가진 눈빛이었다.

“적어도 네가 히어로는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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