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63화 (163/324)

163화

2부 Prologue

도시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폭격이라도 당한 듯 사방에 타다 만 시체들이 즐비했다. 시신 중에는 분명 죄 없는 일반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재언은 그 참혹한 광경을 몇 번이고 떠올려 봤지만, 그때마다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저쪽 세계’를 완전히 인식하게 된 것은 얼마 전 있었던 교황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전부터 간간이 기억이 떠올라도 무언가에 막힌 듯 흐릿하기만 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뚜렷하게 기억해 내는 게 가능해졌다.

‘저쪽 세계’의 교황은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신재언에게 살해당했다. 교황의 말에 심기가 크게 불편해진 신재언은 그날로 교황을 찾아가 신의 곁으로 보낸 뒤, 교황청은 물론 바티칸 전체를 불살라 버렸다.

‘저쪽 세계’에서의 기억을 서서히 이어받은 재언은 그곳을 이른바 ‘평행 세계’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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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회사에서 문서를 정리하거나 단순 자료 입력 업무를 맡아 줄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생을 몇 명 채용했다. 재언이 속한 팀에는 방학을 맞은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세 명이 뽑혔다.

“신 주임님은 애인 있으세요?”

“…….”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사내 소문에 밝지 않은 듯 함께 점심을 먹던 학생 중 한 명이 당차게 웃으며 질문해 왔다.

“네, 있어요.”

“네? 있다고요?”

“엄청 예쁜 애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몰랐어요? 신 주임 노리는 다른 사원들이 매일같이 통곡하는 중인데…….”

가십을 좋아하는 임 대리가 재언이 대답하기도 전에 냉큼 끼어들었다. 그에 재언은 조각난 레몬을 돈가스 위에 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회사 근처의 유명한 돈가스 가게는 맛집으로 소문난 곳답게 고기가 아주 두툼하고 잡내도 없는 데다 바삭하면서 촉촉하기까지 했다.

“아쉽다…….”

“신입들이 연례행사처럼 묻는 건데 이번에도 예외는 없네요.”

“그래요? 신 주임님은 잘생기고 키도 커서 딱 제 이상형이었거든요. 잘생긴 남자는 품절남이거나 게이라더니 진짜인가 봐요.”

본인의 돈가스가 식어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임 대리가 신난 얼굴로 덧붙였다.

“아니면 성격이 진짜 이상하던가.”

“그러니까요.”

자신을 주제로 이어지는 대화에 불편해진 재언은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가벼운 말투로 한 마디 던졌다.

“규리 씨는 나이도 어리고 기회도 많으니까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요. 연하로.”

말을 마치고 돈가스에 집중하는 재언과 마찬가지로 그리 진지한 주제는 아니었던 듯 그녀 역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든든하게 먹고 들어가야 산처럼 밀린 업무와 사투를 벌일 수 있으니 말이다.

식사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온 일행은 사무실로 가는 삼거리 신호등 앞에서 어느 한 부부가 나눠 주는 종이를 받았다. 부부는 창백하고 해쓱한 표정으로 일행 모두에게 전단을 손에 쥐여 주었다.

“우리 애가 저번 주부터 실종됐어요. 학원에서 나와 여기에 버스를 타러 오던 도중에 갑자기 사라졌답니다. CCTV도 확인이 안 돼서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대요. 제발 제 딸을 본 적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나이가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건네받은 전단 안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교복 입은 여자아이 사진과 아래쪽엔 실종된 딸을 찾는다는 절박한 메시지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들의 딱한 사정을 들은 임 대리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사진 찍어서 저희 사내 톡방에도 공유할게요.”

그에 부부는 더욱 허리를 숙여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횡단보도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안규리가 전단을 곱게 접어 잠바 주머니 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제 동생이랑 같은 학교인가 봐요. 교복이 같아요.”

실종된 여자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걱정되는지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재언은 전단 안의 내용을 한 번 더 천천히 살폈다. 지금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실종된 학생이 다녔다던 입시 학원이 하나 나온다.

학원에서 횡단보도 근처의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약 10분이지만, 큰길이 아닌 건물 사이의 골목을 통해 지름길을 이용하면 약 5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하필 CCTV 사각지대인 그 지름길을 지나가면서 학생 한 명이 실종된 모양이었다.

유괴사건일 가능성도 적지 않기에 그쪽에 차를 주차한 적이 있거나 목격한 사람을 찾는단 메시지가 전단에 적혀 있었다.

“음?”

재언은 학생이 실종되었다는 골목길 쪽을 눈으로 훑어보다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의아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신 주임,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지금 점심시간 20분 정도 남았죠?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저는 저쪽에 아는 분이 있어서 인사 좀 나누고 가겠습니다.”

재언은 신호등 앞에서 일행을 먼저 보내고 방금 보았던 골목길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닌 듯 골목 안에는 낯익은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가느다란 몸, 창백한 얼굴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남자는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외모는 준수해도 지나치게 생기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십니까?”

골목길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꼈을 게 분명한데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재언이 말을 건넸다. 그러자 재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언럭키 네임리스.”

남자는 ‘상위급 존재’에게 사랑받아 평생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지만, 영원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사내, 언럭키 네임리스였다.

“계속 가만히 계시던데, 찾고 계신 거라도 있습니까?”

재언의 물음에 언럭키 네임리스는 스케치북을 든 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찾고 있었어… 내, 마음을.”

‘…여전하네, 이 사람.’

재언은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이전에 잃어버린 마음의 조각 중 하나인 친아버지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기억을 되찾고 고통스러워했다.

차라리 기억을 잃은 채로 ‘상위급 존재’들이 죽였다고 믿는 게 더 편할 텐데 그는 아직도 또 다른 마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이 애도… 빼앗긴 내 마음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찾고 싶었어.”

대충 들어도 언럭키 네임리스는 전단 속 실종된 학생과 어떤 관련이 있는 듯했다.

“사라진 학생과 당신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

그는 또다시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재언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열렸다.

“…다음에 만나면 얘기해 줄게.”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치 실로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휘청이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참 희한한 사람이야.’

붙잡을 틈도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보던 재언은 시계를 확인하고 허겁지겁 회사로 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간 재언은 책상 위에 앉아 카페인을 끊임없이 주입해 가며 식곤증과 사투를 벌였다.

계속해서 이렇게 일하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겨우 업무를 마쳤을 땐 벌써 밤 9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다음 주부터 아르바이트생을 더 뽑아 주겠다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겨우 버티는 중이다.

재언은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 원짜리 맥주를 사서 나왔다. 그는 맥주와 과자가 든 봉지를 들고 걸으면서 계산을 위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면서 딸려 나온 전단을 펼쳤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잘라 넣은 건지 환하게 웃고 있는 학생의 얼굴이 너무나도 빛나서 더 안타까웠다.

- 아버지. 그 여자가 신경 쓰이십니까? 제가 따로 알아보도록 할까요?

“음…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재언이 둠(DOOM) 안에 있던 엔레이드맨의 질문에 전단을 든 채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귓가에 못마땅함이 섞인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전단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언의 시선에 고급스러운 구두코가 들어왔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긴 다리에 슈트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조각상 같은 남자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역시 엔레이드맨이 저렇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는 상대라면 누구인지 불 보듯 뻔했다. 남자는 오늘 점심 주제였던 재언의 애인이었다.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차민재를 보며 재언은 저번 주에 캠핑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평행 세계’의 기억을 이어받았음에도 재언은 그곳의 자신을 다른 환경에서 사는 별개의 사람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차민재와의 기억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평행 세계’에서 ‘신재언’은 어찌 된 영문인지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으로 많은 빌런을 거느렸으며 세상을 비관하고 멸망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신재언’이 지나온 자리는 피와 공포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다크 카오스’의 곁에 ‘차민재’가 항상 존재했다. 붉은 광대 가면을 쓴 ‘차민재’는 ‘신재언’을 따라다니며 명령에 충실히 따랐고 세계를 멸망시킨 뒤 살해당했다.

그것도 ‘신재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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