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64화 (164/324)

164화

처음엔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기억인가 싶어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차츰차츰 밀려 들어오는 기억들에 재언은 자신이 미친 줄만 알았다.

다르면서도 똑같은 세계에서 ‘신재언’은 ‘다크 카오스’로서의 면모를 똑똑히 보여 주었다.

이곳 세계에서 평화롭게 월급쟁이 회사원으로 사는 재언과 다르게 평행 세계의 ‘신재언’은 ‘어떤 이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세상을 증오해 멸망시켜 버렸다. 아주 황당하기 짝이 없는 그런 기억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에요?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게다가 현존하는 세계 최강의 히어로, 레드-헬-파이어가 빌런이 되어 평행 세계의 자신과 함께 세계를 멸망시켰다니.

“얼마 안 기다렸어요. 재언 씨가 회사에서 나올 때 저도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거든요.”

“…….”

업무를 끝내고 회사에서 언제 출발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매우 궁금했지만, 대답을 듣고 싶진 않았다.

“재언 씨라면 저녁을 대충 때울 것 같았거든요. 초밥 사 왔는데 같이 먹어요.”

이전에 지나가듯 초밥을 먹고 싶다고 가볍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사 온 모양이었다. 다정한 연인처럼 행동하는 민재를 올려다보며 재언은 평행 세계의 차민재를 다시금 상기했다.

‘평행 세계’에서의 ‘차민재’는 ‘신재언’에 의해 능력을 각성해 명령을 듣긴 했지만, 다른 자식들처럼 상하 관계가 뚜렷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서 자신은 차민재의 능력을 각성시켜 준 적이 없었다. 평행 세계와는 다르게 후천적으로 각성한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방금 사 온 거라 싱싱해요.”

“하하하… 이 시간에 영업하는 초밥집 찾기도 힘들었을 텐데.”

“뭐, 열게 하면 되죠.”

어깨를 으쓱해 보인 차민재가 빙긋 웃으며 팔을 뻗어 재언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표면상으로는 연인 관계이니 매정하게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던 재언은 약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민재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나마 그에게 정체를 들키면 불타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그는 다크 카오스인 신재언에게 어떤 적대감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뭘 생각하고 움직이는진 모르겠지만…….’

알콩달콩 꿀이 떨어져도 모자란 연애 초반에 상대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파악해야 한다니…….

재언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집에 도착해 맥주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포장해 온 초밥을 펼쳐 놓는 차민재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날 캠핑장에서 내보인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기분 좋은 듯 눈썹과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것이 굉장히 무방비해 보였다.

재언은 젓가락을 들고 초밥을 입에 넣어 우물우물 씹으며 캠핑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짙은 밤하늘 위로 별빛이 반짝였다. 요즘 미세먼지다 뭐다 해서 하늘의 별 보기가 참으로 힘들다고 하던데, 다행히 강원도 산속의 캠핑장에서는 생각보다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재언의 앞에 있는 화로에서는 불길이 올라오는 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갈랐다. 레헬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장작은 이미 새까맣게 재가 되어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아도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실 차민재의 질문에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답하긴 했는데, 9할 정도는 허세였고 속으로는 비상벨이 격렬하게 울리는 중이었다.

기억이라고는 하나 머릿속엔 단편적인 장면들밖에 없는데 차민재는 무언가를 더 원하는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재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마저 꺼진 어두운 캠핑장에서 차민재만이 발광체처럼 홀로 빛났다.

“그리고요?”

다리를 꼬고 앉아 한참 동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차민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한참 후가 아닌 듯했지만, 신재언에게는 억겁같이 느껴졌던 긴 시간이었다.

“음… 저와 같이 세계를 멸망시켰죠……. 전부 불타서 죽었잖아요. 우리는 그걸 높은 곳에서 구경했고… 그런데 민재 씨, 지금 당신이 S급 히어로이듯 나도 평범한 회사원이에요. 다른 세계 일로 죄를 묻는 건가요?”

혼자서 저지른 것도 아니고 세계 멸망에 상당히 기여한 사람에게 변명하듯 말하는 게 조금 억울해져서 재언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차민재의 표정을 보니 그가 기다리던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민재는 재언이 기억하지 못하는 걸 굳이 말해 줄 생각은 없었는지 화제를 전환했다.

“기억은 언제부터 돌아왔습니까?”

“…전부터 조금씩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긴 했지만……. 아마 교황을 만나고부터였을 겁니다. 민재 씨도 그런가요?”

그에 차민재가 김이 빠진 듯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그보다 전이에요. 당신이 내 사무실 앞에 나타났을 때, 공격하려고 했는데 능력이 나가질 않더군요. 알고 보니 그건 ‘그곳’에서 내가 스스로 건 금제였죠.”

‘뭐라고!?’

재언은 하마터면 자신이 통구이 신세가 될 뻔했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때 레헬이 공격해 오지 않기에 그가 당황했거나 아니면 너무 경계했다고 생각하며 희희낙락 웃으며 넘겼었다. 그런데 실상은 공격당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재언이 속으로 깜짝 놀라든 말든 차민재가 말을 이었다.

“재언 씨는… 가장 중요한 건 기억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재언은 기억과 관련해서 다른 의미로 환장할 것만 같았다.

기억을 이어받을 때마다 간혹 튀어나오는 이유 모를 감정을 점점 더 추스르기가 힘들어져 갔다. 능력을 사용할수록 평행 세계의 자신과 점점 동화되어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민재 씨는… 저와 무엇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제 우리 둘은 그쪽 세계와는 다른 관계잖아요. 전 세상을 멸망시키거나 지배할 생각이 없고, 민재 씨는 S급 히어로에요.”

진심으로 영문 모르겠다는 듯한 재언의 질문에 차민재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재언 씨와 연애를 하고 싶어요.”

“…그럼 모르는 척했었어야죠.”

그때까지만 해도 재언은 차민재와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평행 세계’에서의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가진 이해관계로 이어졌으며 심지어 같은 빌런이기까지 했는데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차민재가 대체 왜 자신에게 접근해 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신재언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차민재가 곧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쓸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없었거든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재언 씨, 이대로 우리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세계를 한 번 멸망시켜 봤는데 이곳이라고 못할 것 같나요? 난 계속 당신을 찾을 거고 기억해서 결국 손에 넣을 거니까.”

분명히 웃는 얼굴인데 차민재의 눈동자는 웃고 있지도 않고 오히려 맛이 간 느낌이었다. 그때, 캠핑장을 에워싸고 거대한 타원형의 둠(DOOM)이 열렸다.

“레드-헬-파이어! 아버지께 손 떼!”

줄곧 레헬을 경계하던 엔레이드맨이 결국 능력을 사용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너랑은 몇 번이고 붙었지만 이런 구도는 처음이라 신선하네.”

엔레이드맨이 아무리 전 세계가 벌벌 떠는 빌런이라지만 그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가진 레헬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험악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재언은 문득 드는 기시감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장면을 어디에서 많이 본 기억이 있었다. 이쪽 세계가 아니라 평행 세계에서의 기억이었다. 두 사람은 저쪽 세계에서도 저런 식으로 싸운 적이 있었다.

‘둘은 같은 편이 아니었던가? 대체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저러다가 진짜 싸워서 엔레이드맨이 크게 다칠까 염려한 재언이 단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엔레이드맨. 괜찮으니까 능력을 거둬. 그가 날 죽이려고 했으면 진작 죽였겠지.”

그런데 평소엔 재언이 말만 하면 죽는시늉까지 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엔레이드맨이 재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재언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한참 고민하다가 두 사람에게 각각 한마디씩 일갈했다.

“엔레이드맨, 그는 아직 내 연인이야. 그러니 너는 그에게 충분히 대우해 주어야지 않겠어? 그렇지? 그리고 민재 씨, 나와의 관계를 아직 끝내고 싶지 않다고 했죠? 당신이 저 애를 죽이면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하늘같이 위대한 아버지의 연인으로서 레헬을 대해야 한다는 현실에 엔레이드맨은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는지 창백한 얼굴로 휘청거렸다. 반면 레헬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두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차민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는 그걸 먼저 언급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방금 본 광기 어린 눈동자는 만약 재언이 그와의 관계에 끝을 고한다면 좋지 못한 꼴을 볼 수도 있다고 말해 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

.

.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재언은 입에 넣은 초밥을 삼키고 물을 홀짝이며 낮에 있던 일로 운을 띄웠다.

“그러고 보니 민재 씨, 저쪽 세계에서… 언럭키 네임리스는 없었죠?”

기억을 더듬는 듯 잠깐 눈을 내리깔고 생각하던 차민재가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나질 않는 걸 보니 없었네요.”

“역시 그런가.”

식탁에 올려놨던 전단을 들어 다시금 읽으며 재언은 언럭키 네임리스가 신경 쓰는 실종된 학생의 사진을 살폈다.

확실히 신재언의 기억에도 언럭키 네임리스는 그쪽 세계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부모를 잃은 ‘신재언’이 ‘상위급 존재’들에게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본디 언럭키 네임리스의 운명은 ‘신재언’의 것이었다.

언럭키 네임리스. 처음 볼 때부터 신경 쓰였던 남자. 묘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오지랖을 부렸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헬이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도 ‘평행 세계’에서의 기억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아주 작은 실마리가 보였다. 하긴, 최강의 히어로가 평범한 직장인에게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접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했다.

‘알례리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끊임없이 일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알례리에 이어서 레드 헬 파이어까지, 아주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지금 버드맨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알례리가 인체 실험도 시행하는 놈인 걸 알았기에 혹시 무슨 짓이라도 했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제발 알례리가 거기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기를 바랐다.

버드맨은 한참 동안 언론에서 최민수 이야기로 떠들썩했을 땐 굉장히 우울해했다. 그나마 지오반니와 함께 알례리의 별장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부터는 그를 깨끗하게 잊기라도 한 듯 다시 활발해지긴 했다. 지금은 그마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지오반니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지오반니와 떨어트려 놓은 게 미안해질 정도로 말이지.’

그러던 중 재언은 자신이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닫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살짝 미안해진 김에 이왕 전단도 들고 있겠다 히어로의 의견을 들어 보고자 질문을 던졌다.

“오늘 회사 앞 사거리에서 어떤 부부가 전단을 나눠 주더라고요. 딸이 실종됐다는데 안타까워요. 민재 씨는 뭐 아는 거 없습니까?”

“압니다. 부부가 우리 쪽 사무실에 의뢰를 넣었거든요. 사무실의 B급 히어로가 의뢰를 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레드-헬-파이어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라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내는 금액이지만, 그가 속한 사무실의 다른 히어로들은 그렇게까지 금액이 높지 않아 일반인들도 의뢰를 넣을 수 있었다.

하위 등급이라 해도 레헬의 사무실에 속한 히어로들은 레헬이 직접 뽑은 만큼 모두 실력이 좋고 경험도 풍부해 다른 곳보다 인기가 많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희한한 사건이라고 하더군요. 납치라기엔 몸값을 요구하지도 않고, 능력자의 소행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답니다.”

레헬과 알고 지냈을 때 가장 편한 건 어떤 사건이든 물어보면 자판기처럼 술술 나온다는 점이다.

“부모와도 사이가 좋았는데 최근에 작은 트러블이 있긴 했다더군요. 수요일마다 너무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학생에게 참다못한 어머니가 설교했는데, 유난히 날카롭게 반응했다고요. 거기에 실마리가 있을 것 같다고 부하가 추측하긴 했습니다.”

알례리는 사고를 치고, 레헬과 ‘평행세계’에서의 기억도 그렇고 자신이 일하는 곳 근처에선 실종사건이 일어나지를 않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과 운명이 바뀐 언럭키 네임리스도 거기에 엮여 있었다.

정말 온통 머리 아픈 일투성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