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아침햇살을 맞으며 침대 위에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재언은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그는 비척비척 걸어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확인하자 어깨와 목덜미 쪽에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들이 한가득 보였다. 이걸 가만히 놔두고 출근하면 주변에서 난리를 칠 게 눈에 선했다. 재언은 대충 샤워만 하고 문신을 숨기기 위해 사 두었던 피부색 패치를 목덜미에 꼼꼼하게 붙였다.
수건으로 머리카락 물기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오자 침대 위에서 천사 같은 얼굴로 색색 자고 있던 차민재가 눈을 떴다.
“잘 잤어요, 민재 씨?”
그런 그와 눈인사를 하며 재언은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내렸다. 방금 시계를 확인하니 눈이 빨리 떠진 탓에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 넘게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 침대가 너무 좁아 힘들던데요.”
“그래요? 전 그래서 재언 씨가 더 달라붙어 오는 게 좋았는데……. 떨어질까 봐 허리를 감고 놔주지 않았잖아요.”
“하하… 그냥 큰 침대를 하나 사야겠어요!”
어색한 미소로 차민재의 진심 섞인 농담을 받아친 재언은 커피를 홀짝이며 TV를 켰다. 아침 뉴스라도 보면서 화제를 전환할 심산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요즘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지 꼼꼼히 체크하는 게 일상이었다.
- 오늘 새벽, xx동 한강 변에서 발견된 시신의 신변이 B급 히어로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조깅 중인 시민이 발견하여 신고했는데, 현장이 아주 참혹했다고 합니다. 유재영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폴리스 라인이 설치된 강변 산책로의 풍경이 비쳤다. 눈에 익은 그곳은 재언도 잘 알고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산책로였다.
그 순간 차민재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 눈을 감고 있던 민재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레일이었다. 이레일이 어찌나 다급하게 말하는지 통화 내용이 핸드폰을 뚫고 나와 신재언에게도 다 들릴 정도였다.
- 사장님! 뉴스 보셨습니까? 지금 큰일 났어요! 우리 사무실의 B급 히어로 섬광의 블레이더가 한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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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를 마무리한 차민재는 사무실 쪽으로 바로 출근하고 재언도 회사로 향했다.
잠깐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 죽은 B급 히어로는 실종된 학생의 부부의 의뢰를 맡아 조사 중이었다. 그런 그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보니 이번 실종 사건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은 잘 알겠다.
사무실에 들어와 컴퓨터 전원을 켜며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재언은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나눠 줄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제 열심히 정리하고 간 덕분에 이번엔 양이 그리 많지 않아 세 사람이 하면 금방 끝날 듯했다.
“재언 씨, 뉴스 봤어요? 시신이 발견된 곳이 회사 근처잖아요. 어휴, 세상 정말 무섭다니까. 히어로가 당할 정도면 일반인들은 무서워서 어디 다닐 수나 있겠어요? 더군다나 섬광의 블레이더는 레드-헬-파이어 사무실 소속 히어로인데.”
“봤습니다. 정 과장님도 조심하세요.”
“나보단 우리 아들이 걱정이야. 아들 또래 여자애도 실종되었다던데. 휴… 이렇게 세상이 위험한데 자식새끼 어떻게 키우나.”
재언이 알기로 정 과장의 아들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나이였는데, 소위 무리 지어 다니는 일진이었다.
물론, 관심이 있어서 알아본 건 아니고 한창 프로젝트로 바빴던 시기에 정 과장이 연차를 두 번이나 내고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그때 아들의 학폭위가 열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사내에 쫙 퍼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정말 착했는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 꼴이 된 거지…….”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울적한 표정으로 변한 정 과장이 중얼거렸다. 그는 나쁜 길로 빠진 자식을 가진 부모들 대부분이 할 법한 변명을 중얼거리며 잔뜩 풀이 죽은 채 자리로 돌아갔다.
업무가 시작되고 아르바이트생 두 명에게 자료를 나눠 준 재언은 비어 있는 자리를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규리 씨가 안 왔네요?”
“아… 네.”
“제가 연락처를 알아서 계속 연락하는데 답이 없네요.”
바로 그때, 안규리가 사무실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안색이 창백한 게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울기라도 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기까지 했다.
재언은 한눈에 봐도 나빠 보이는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책상에 자료를 두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규리 씨, 상태가 굉장히 나빠 보이는데 조퇴하는 게 어때요? 오늘은 일이 많지 않아서 괜찮을 거예요.”
“아니에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언행이 활발하고 경쾌했던 그녀답지 않게 오늘따라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에 지나가던 임 대리도 멈춰서서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규리 씨,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니야? 정말 괜찮으니까 조퇴해요. 제가 부장님껜 잘 말해 둘 테니까.”
“정말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좀 충격적인 일이 있어서 어제 잠을 못 잤더니 그런 거예요.”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은 안규리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녀는 책상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을 켜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심각성을 느낀 임 대리가 재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언 씨가 점심시간에 데리고 가서 얘기 좀 해 봐요…….”
“네…….”
점심시간이 되고 그녀의 자리로 찾아간 재언은 생각보다 상태가 더 안 좋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라면 배고파 죽겠다고 오늘의 메뉴는 무엇이냐며 너스레를 떨었던 그녀가 흐릿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에 주어진 업무도 반 이상이나 남아 있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이미 일을 다 끝내고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을 정도로 오늘은 일이 적었는데도 말이다. 1분이라도 더 놀고 싶다며 누구보다도 일을 먼저 끝냈던 그녀답지 않았다.
결국, 재언은 점심마저도 깨작거리는 안규리를 데리고 회사 근처 카페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마주 앉아 물었다.
“규리 씨. 정말 아무 일 없는 거 맞아요? 안색도 너무 나쁘고 일도 집중 못 하던데……. 무슨 일 생긴 거면 정말 괜찮으니까 오늘 하루 푹 쉬어요.”
“신 주임님…….”
재언의 어르는 듯 다정한 말투에 안규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죄송해요…….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어제 실종됐다던 그 학생이요. 알고 보니 제 동생 친구였어요. 그런데 동생이 어제 이상한 소리를 했거든요.”
“이상한 소리?”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계속 우는 거예요. 이제 자기도 죽을 거라고… 그러면서 우니까 부모님도 놀라시고… 최근에 학교도 안 나가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졌어요. 동생 친구는 실종됐고 동생은 자기도 친구처럼 될지도 모른다는데…….”
실종된 여학생이 동생하고 같은 교복을 입었다더니 친구 사이였나 보다. 재언은 이번 사건도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다음 차례라고 말한 걸 보면 안규리의 동생은 이번에 실종된 학생이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혹시 동생에게 따로 들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있었어요……. 그게, 동생하고 친구가 한 달 전쯤…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가입했다고 했거든요. 어머니교 라는 곳인데……. 전도하는 걸 듣기만 해도 상품권을 오만 원이나 준다고 해서 혹하는 마음에 따라갔대요.”
안규리의 말을 요약하자면 동생과 동생 친구가 주말에 만나 시내에서 놀던 와중에 점심을 먹기 위해 한 분식집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여성과 남성 2인 1조와 마주쳤다.
처음엔 그들을 무시하려고 했던 두 사람이지만 밥값도 계산해 주고 워낙 인상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저도 모르게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고 했다.
전도를 한 번만 들어도 각각 5만 원씩 준다기에 두 사람은 긴가민가하면서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이 어머니교라는 사실은 아주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머니교. 지금은 과격파 단체로 분류되어 정부와 히어로 협회의 주목을 받는 사이비 종교로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세계를 멸망시킨 악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포교 활동은 지나치게 폭력적이어서 일반인들에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 메시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걸려도 하필 그런 사이비 종교에 걸리다니.
속으로 혀를 찬 재언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그들이 사이비 종교, 그것도 어머니교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긴 했다.
하지만 중간에 이상함을 눈치채고 거짓된 정보를 알려 준 동생과는 다르게 동생 친구는 이미 그들에게 자신의 연락처와 기본 신상 정보를 넘겨 버리고 말았단다.
그 이후로 친구는 눈에 띄게 해쓱해지며 성격도 이상해지더니 결국 실종되었다. 동생은 친구가 사라진 이유가 그때 만난 어머니교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요즘 주변에 계속 누군가가 감시하는 기분이 든다며 잔뜩 겁에 질려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말을 마친 안규리에게 재언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무어라 위로를 건네야 할지 잠시 말을 골랐다.
“…정말 걱정이 크겠네요. 일단 히어로 협회에 연락이라도 해 보는 건요?”
“이미 해 봤어요. 그런데 증거가 없대요. 경찰들은 친구가 가출한 게 아니냐고 제대로 수사해 주지도 않고, 동생 친구의 부모님들이 히어로의 개인 사무실에 의뢰를 넣었는데……. 그 히어로가 살해당했대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