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일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회사는 걱정하지 말고 조퇴를 하는 게 낫겠어요. 집에 있는 동생이 걱정돼서 일하기도 힘들 거고, 옆에 있어 주고 싶잖아요.”
“…….”
“규리 씨가 하던 일은 제가 맡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한 재언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히어로 협회에 연락하거나… 아니면 제 번호로 연락해 주세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저도 도와드릴 테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신 주임님…….”
재언은 연신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는 안규리를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귀가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허락받은 선에서 그녀의 상황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어제 사내 단톡방에 실종된 학생의 전단 사진을 올린 덕분에 대부분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기며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김 대리가 옆에서 훈수 두듯이 말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본인 동생도 아니고 동생 친구가 실종됐다고 회사를 조퇴해? 회사가 장난이야 뭐야. 이래서 지잡대 나온 것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김 대리에게 당한 게 많아 이를 갈고 있던 임 대리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끼어들었다.
“김 대리님, 말씀에 편견이 가득하시네요. 식견이 얇으면 유명 대학을 나와도 낙오되기 마련이거든요.”
“이… 이…….”
분위기에 힘입어 재언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안규리 씨는 부장님께서도 특채로 들여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일머리가 좋은데 그건 학벌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지잡대가 어딨습니까, 김 대리님.”
김 대리는 자신의 말에 한마디씩 반박하는 두 사람을 잔뜩 붉은 얼굴로 번갈아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성난 듯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 임 대리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지는 그럼 얼마나 좋은 대학 나왔다고 여태까지 대리래? 두고 봐. 내가 먼저 저 인간보다 승진해서 아주 납작하게 눌러 줄 테니까.”
임 대리는 비록 가십을 좋아하고 입이 가볍긴 했지만, 선을 넘게 행동하지도 않고 근성이 있어서 박 부장의 총애를 잔뜩 받고 있었다. 김 대리보다 먼저 승진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이미 나돌고 있었기에 김 대리가 쉽게 건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누르고 있는 것 같은데…….’
김 대리를 사수로 둔 지 어언 3년 차, 그동안 당한 게 산처럼 쌓였던 속이 조금은 뚫리는 시원함을 받으며 재언도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시작했다.
조금 빠듯하긴 해도 가장 급한 연말 특집 프로모션은 어제 끝내 놓은 상태였기에 안규리가 맡았던 업무를 가져와도 숨 돌릴 틈은 있어서 다행이었다. 칼같이 정시퇴근은 무리였더라도 저녁 7시 안에 퇴근하는 게 가능했으니 말이다.
회사 건물을 빠져나온 재언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가구점 앞을 기웃거렸다. 아침에 차민재에게 말했던 것처럼 넓은 침대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혼자일 때는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멀티싱글 사이즈의 침대였는데, 틈만 나면 들락날락하는 차민재 때문에 진심으로 침대를 바꿀 생각이었다.
정체를 들키면 레헬과 서로 대적하거나 연이 끊어지리라 생각했었는데, 모든 게 드러난 지금도 연인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 있는 게 참으로 기분이 이상했다.
재언이 가구 매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침대 사이즈와 가격을 힐끗거리며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양반은 못 되는지 발신자가 차민재였다.
“네. 여보세요.”
- 재언 씨, 저예요. 퇴근하셨으면 저녁이라도 먹을까요?
‘혹시 사람이라도 붙여 둔 거 아냐? 핸드폰에 뭘 깔았나? 내가 퇴근한 걸 귀신같이 아네.’
차민재라면 그러고도 남지 않을까 싶었다. 심증은 충분하긴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인생 절반이 감시와 스토킹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새삼스럽게 더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재언의 자식들은 마약왕이 퇴출당한 뒤 소중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나 않을까 이전보다 더 심하게 눈에 불을 켜고 곁을 지켰다. 충성스러웠던 알례리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일을 벌여 퇴출당한 것에 모두가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요. 저 지금 로데오 삼거리 쪽이거든요. 어디서 볼까요?”
-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그러면 여기 근처에 괜찮은 주꾸미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저번에 회식으로 갔을 때 맛있게 먹었거든요.”
- 좋아요. 20분 정도 걸리니까 먼저 가서 앉아 있어요.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좋은 애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재언은 그때 그가 한 말과 표정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순진하네요, 신재언 씨. 재언 씨 멋대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아주 재밌어요.”
“우리가 끝난다면, 난 이 세계를 우리가 시작했던 곳과 똑같이 멸망시킨 뒤 우리가 함께할 다른 세계를 찾을 겁니다.”
맛집이라고 이름난 곳이라 그런지 이미 주꾸미 집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잔뜩 서 있었다. 이름과 메뉴를 적어 놓고 15분 정도 밖에서 기다리자 테이블을 안내받았다.
양념 주꾸미 2인분이 차려지자마자 타이밍 좋게 차민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안면 인식을 방해하는 안경’을 쓰고 나타난 덕분에 아무도 그가 레드-헬-파이어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죽은 B급 히어로의 시신을 인수했어요. 저희 쪽에서 조금 더 알아보려고요.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드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의문점이 많아서… 이레일도 친했던 동료의 죽음에 범인을 찾겠다고 성화이고 저도 제 체면이 있으니까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의외로 회사 사람들을 챙기나 보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사무실을 운영할 수 없겠지.
차민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재언은 낮에 있었던 안규리의 일을 이야기해도 될까 고민하다가 결국 털어놓기로 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퍼트리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은 히어로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이니 레드-헬-파이 어의 도움을 받는 게 무엇보다 나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민재 씨, 그 일 말인데요…….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생 중에 관련자가 있는 것 같아요.”
양념 주꾸미가 철판에 볶아지는 동안 재언은 안규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차민재에게 설명했다. 그의 말에 민재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재언 씨 말대로 이 사건에 어머니교 간부급 신도들이 섞여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설마 재언 씨 회사에 관련된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부드럽게 웃는 차민재의 눈동자가 사건의 중심에 항상 재언 씨가 있네요, 라는 듯한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재언은 조금 억울했다.
자신은 조용히 지내고 싶은 소시민일 뿐인데 주변이 야단법석인 걸 어쩌나!
“어머니교는 아무리 간부급이라도 외부에 꼬투리가 잡힐 것 같으면 죽여 버리는 놈들이니까요. 이전에 제이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자살이라고 결론지었지만, 우리 사무실에서는 타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적당히 익은 주꾸미 몇 점이 두 사람의 앞에 있는 접시에 놓였다.
“아마 그 아르바이트생의 동생을 교단에서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본거지를 알고 있는 사람을 아무리 어린 학생이어도 녀석들이 쉽게 놔줄 리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실종된 학생이 살아 있을 확률은…….”
“높진 않을 겁니다.”
“정말 안타깝네요. 그리고 그 실종된 학생… 언럭키 네임리스와 아는 사이 같았습니다.”
주꾸미를 젓가락으로 든 채 차민재가 고개를 들어 왜 여기서 그 자식 이름이 나오지? 같은 눈빛을 보내왔다. 그에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실종된 학생이 사라진 곳에서 언럭키 네임리스를 만났거든요. 그는 그녀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전에 그가 빼앗긴 마음 중에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뻔한 기억을 찾았잖아요.”
딱히 관심 있는 주제는 아니었던지 차민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꾸미 볶음을 한 점 입에 넣었다. 그리고 재언은 이곳과 ‘평행 세계’의 차민재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매운 걸 못 먹는단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차민재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집 양념이 매운 편이라고 미리 말하는 게 좋았으려나 싶었던 재언은 편의점에 들러 이온 음료를 사 와 차민재에게 건네주었다.
“…민재 씨는 속성이 불이라 매운 것도 잘 먹을 줄 알았어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차민재가 입을 열 때마다 입에서 불이 튀었다. 그러니까 그가 매운 음식을 먹은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라 정말로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 사이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길 반복했다.
재언은 그 모습을 본 순간 차민재가 어려웠던 것도 잊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차민재는 그런 자신이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지 아까부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웃지 않으려고 해도 매운 걸 먹고 불을 뿜는 모습에 재언은 용가리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라서 실실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