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입 안의 매운 기가 식을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공영 주차장까지 함께 걸어갔다. 두 사람이 식사한 곳이 따로 주차장이 구비되어 있지 않아 차민재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다 보니 실종된 학생이 사라진 그 골목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CCTV가 없다고 했나?’
성인 걸음걸이 기준으로 약 1분 정도의 거리가 CCTV 사각지대라고 했다. 학원에서 버스 정류장을 가려면 사거리 쪽 큰길보다 이 골목을 지나가는 게 훨씬 빠르다고 들었다.
재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자 차민재가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는 저쪽에 CCTV가 한 대 더 있긴 하지만, 약 2주 전부터 고장 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점검할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그 학생이 실종된 날에 하필 망가졌다고요.”
“수상하네요…….”
차민재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니 정말 표지판 위에 CCTV가 골목길 쪽으로 설치된 게 보였다. 학생을 잡아간 놈들이 어머니교의 신도들이라면 능력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재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민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능력을 쓸 때마다 보이는 에너지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더군요. 흔적조차도 없다고 하니 경찰에서는 능력자의 소행이 아니라고 하는 거고요.”
모든 능력자는 그마다 고유한 에너지를 발산해 능력을 쓸 때마다 파동을 남기는데 B급 히어로가 남긴 조사 보고서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납치범들이 학생을 억지로 끌고 갔다면 작더라도 분명 소란이 있었을 텐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실종된 학생이 사라진 시간은 학원이 끝날 시간이기도 합니다. 다른 학생들도 간간이 골목길에 들어가니까요.”
차민재가 학원 쪽으로 가는 골목길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실종된 학생이 학원 앞 CCTV에서 사라지고 정확히 28초 후 다른 학생들도 그쪽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1분 뒤 골목을 빠져나가는 다른 학생은 보이지만 실종 학생은 보이지 않아요. 그 학생들을 찾아가 물어보니 따로 소란이 있거나 무언가 목격한 건 없었다고 해요. 능력자도 아닌데 28초 만에 사람이 없어진 셈이에요.”
7층짜리 학원 건물 내부뿐만 아니라 근처의 CCTV도 모두 확인했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그 골목길 자체도 아주 외진 편도 아니고 큰 상가 건물이 양옆에 있으며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한마디로 범죄가 일어나기에는 사람의 눈이 많아서 적합하지 않았다.
차민재가 손바닥을 펼쳐 입김을 훅하고 불자 손바닥 위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재언 씨가 알려 준 대로 내일 안규리에게 연락해 동생의 신변 보호를 시작하겠습니다.”
재언은 생각보다 순순하게 히어로 일을 하는 차민재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세계를 멸망시키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다른 일반인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증오하고 저주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레드-헬-파이어는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는 모두의 히어로다. 인지 부조화에 현실감이 없어졌다. 그곳이 진짜 자신의 세계였는지 아니면 이곳이 진짜 자신의 세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일단 차민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재언은 안규리의 연락처를 전해 주기 전에 먼저 허락을 받고자 통화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재언은 의아해하면서도 동생 곁을 지키느라 바쁘겠거니 생각하며 내일 회사에 출근해서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재언이 한참 잠에 빠져들었을 무렵,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2시에 대체 누가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비몽사몽으로 팔을 뻗어 불빛이 반짝이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 흑… 흑…….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영문 모를 흐느낌에 재언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울음 뒤에 간간이 들려오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매우 익숙했다.
핸드폰을 내려 발신 전화번호를 확인한 재언이 말을 걸었다.
“혹시 안규리 씨입니까?”
- 신 주임님…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해요. 경찰에 연락했는데도 너무 불안해서요. 동생이… 동생이 사라졌어요!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동생이 사라진 건 대략 저녁 7시쯤, 그녀는 불안에 떨고 있는 동생의 곁에 계속 있어 주었다. 그런데 친구가 실종된 날부터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은 동생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간 게 화근이었다.
김치볶음밥을 완성해 동생의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동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만이 커튼을 날리며 존재감을 표했다.
부엌에 있을 때 밖으로 나가거나 문이 열리는 등의 별다른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으며 집 안 어디에서도 동생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퇴근한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온 가족이 동생을 찾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녀 봤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경찰에 신고하니 CCTV를 확인하고 동생을 찾기 위해 조만간 인원이 배치될 것이라는 말과 조사를 위해 경찰들이 집에 찾아온 것 외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그녀는 고작 아르바이트로 만난 사수이지만 낮에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떠올라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의 끈을 잡기 위해 연락했다고 미안해했다.
오죽하면 별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연락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재언은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규리 씨, 일단 진정하세요. 그럼 동생이 사라진 지 7시간이나 지났다는 말이죠? 히어로 협회에는 연락해 봤어요? 아,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그러면 제 지인이 히어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가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지금 연락이 갈 수 있게 도와드릴 테니까 도움받으세요.”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은 재언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차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시간이지만 다행히 자는 건 아닌지 전화를 받았는데, 그의 주변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 네, 재언 씨.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방금 안규리 씨한테 연락이 왔는데 동생이 집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더군요. 민재 씨 쪽 사무실에서 연락을 넣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요?”
- 아, 괜찮습니다. 이쪽도 지금 안규리 씨 댁으로 연결하는 중이었거든요.
차민재의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 중에 이레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레헬의 사무실에서도 밤낮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여 이번 사건을 해결할 생각인 듯했다. 아무래도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죽었으니 누구보다도 심각할 것이다.
재언은 이런 모습의 차민재가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이 감정조차도 낯설어서 혼란스러웠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던 재언이 시계를 확인했다.
“민재 씨, 저도 그쪽으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다만, 가는 건 신재언이 아닐 겁니다.”
재언이 서랍장 문을 열어 가면을 꺼내면서 통화를 마쳤다. 저번에 라파엘을 납치하면서 버린 가면 대신 그의 자식들이 더 멋지고 우아한 가면을 만들었다고 선물해 준 것이었다.
검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피에로 가면인 건 그대로지만, 저번 것과는 다르게 오른쪽 눈가에 눈물 모양 점이 그려져 있었다. 이걸 두고 코루루가 한 말에 재언은 되도록 이 가면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세상의 어리석음에 눈물을 흘리시는 걸 표현해 봤어요.”
민망하기 짝이 없는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고 가면을 쓴 재언은 창문을 열었다.
“코루루, 날 안내해.”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저, 코루루만 믿으세요.”
아무도 없었던 재언의 원룸에 고혹적이고 우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크 카오스의 다섯 번째 자식 냉기와 제안의 마녀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재언이 창문 밖으로 발을 내딛는 동시에 발밑으로 얼음 결정을 만들어 냈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얼음 결정을 밟으며 재언은 사건이 터진 곳으로 향했다. 차민재에게 미리 말해 두었으니 그가 자신을 잡아가진 않겠지.
안규리의 집은 서울의 목동에 있는 아파트였다. 상황을 살펴볼 수 있도록 반대편 옥상에 올라온 재언은 몸을 숙여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아직 레헬은 도착 안 했나? 연락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여기는 잠잠하네. 아니면 이미 도착해서 얘기 중인 건가? 일단 그녀의 집 근처에 어머니교 녀석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는데…….’
재언이 품 안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꺼내기 위해 가슴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순간, 코루루가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지!”
밤하늘을 닮은 검은색의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코루루가 무대에 오른 것처럼 노래 부르고 춤추던 것을 멈추고 잔뜩 긴장해 동공을 수축했다.
이윽고 그녀와 신재언의 앞으로 얼음벽이 솟구쳐 올라왔다. 코루루의 날카로운 반응에 깜짝 놀란 재언이 고개를 돌리자 얼음 결정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얼음 방어벽의 가운데가 시뻘겋게 불타오르며 구멍이 생겼다.
어떤 것으로도 절대 녹지 않았던 코루루의 얼음을 순식간에 녹이고 나타난 인물은 긴 다리로 얼음벽을 넘고 있었다. 붉은색의 광대 가면을 쓰고 나타난 불청객의 모습에 코루루가 싸울 태세로 몸을 움츠렸지만, 신재언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가면에 입을 떡 벌렸다.
“형~”
웃음기를 담은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의심할 것도 없이 차민재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건 코루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게 뭐야!?”
사실 저 가면은 ‘평행 세계’에서 ‘다크 카오스’의 곁을 지키며 세계를 멸망시킨 빌런, ‘레드 헬 파이어’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