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68화 (168/324)

168화

피에로 가면을 쓰고 다크 카오스로 활동할 땐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던 재언은 그것마저도 잊고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지금 꼴이 그게 뭡니까?”

자신의 정체를 알았어도 레드-헬-파이어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코루루를 데려와도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콘셉트인 건지 히어로가 빌런처럼 가면을 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 아버지… 이 남자는!”

코루루가 붉은 광대 가면을 쓴 남자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 역시 눈앞의 남자가 형제들의 계획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레드-헬-파이어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만든 녹지 않는 얼음벽을 1초 만에 녹이는 화염계 능력자가 이 세상에 레헬 외에 누가 있을까.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하던 코루루는 어떤 결론을 도출해 냈는지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는 저 남자를 ‘새’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어요!”

“…….”

뮤지컬 배우라 그런가. 그녀의 머릿속 스토리텔링은 멀쩡히 서 있던 재언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재언은 코루루 덕분에 몸에서 힘이 빠지려는 걸 간신히 붙잡으며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레헬을 곁눈질했다. 그가 쓰고 있는 붉은 광대 가면을 보니 ‘평행 세계’에서의 일이 겹쳐 보였다.

‘…알례리도 위대한 서커스니, 뭐니 했었지. 빌런들이 약간 그쪽 계열을 좋아하나?’

그때, 레헬이 팔을 들어 옥상 너머 아래를 가리켰다. 다른 쪽 옆에 서서 씩씩거리는 코루루를 재언은 애써 모른척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 검은색 세단 두 대가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재언은 망원경 대신 코루루에게서 오페라글라스를 건네받아 눈에 가져다 대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순 없지만, 그중에 매우 낯익은 금발의 외국인은 누구인지 금방 눈치챘다. 이레일이었다.

레헬이 말한 대로 안규리와 접촉하기 위해 이레일을 포함한 사무실 히어로들이 찾아온 듯했다.

“…여기선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형 편한 대로 부르세요.”

형이라니, 차민재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호칭이었다. 물론 연하 애인이 저렇게 불러 주니 심장이 뛸 만큼 좋긴 한데, 지금 이 상황에선 마음 놓고 좋아할 수도 없다.

‘그런데 진짜 뭐라고 불러야 하지?’

레드-헬-파이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레헬이라고 줄여 봤자 알 사람은 다 아는 호칭이다. 다크 카오스와 레드 헬 파이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세계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일단 헬이라고 부를 테니까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리고 한 가지 확인하고 가야겠어요. 여기까지 나타난 이유가 뭡니까?”

“저도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히어로인 제가 나타난다면 범인들은 아예 꼬리를 말고 숨어 버릴 테니 마음껏 일을 벌이도록 느슨하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질 않았지만, 재언의 물음에 설명을 이어 가는 그의 목소리는 제법 친절하고 인자했다.

하긴, 신재언조차 레드-헬-파이어가 나타났다고 하면 일단 몸부터 사리고 자식들에게도 당부를 거듭하는 편이니,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건 비겁한 행동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지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능력을 가진 레헬 탓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재언은 이레일과 히어로들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눈으로 확인한 뒤 차민재에게 무선 이어폰을 건네받아 한쪽 귀에 꼈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이번 사건을 맡은 레드 헬 파이어 사무실의 사이드킥 이레일이라고 합니다.

- 레드 헬 파이어요? 저, 저희는 그렇게 큰돈이 없어요…….

이미 히어로 사무실을 몇 군데 알아봤는지 인터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무리 딸이 실종되었어도 억 단위의 의뢰비를 감당하는 건 결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청년인 이레일은 남성의 말에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 돈은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갚아야 할 원한이 있거든요. 우리 쪽 사무실의 히어로가 변을 당한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사장님께서도 따로 의뢰비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에게 다 맡겨 주십시오.

-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년 남성의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히어로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흐릿하지만, 안규리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 신발이 그대로 있으니 납치당한 게 분명해요.

- 네… 하지만 능력을 썼다면 흔적이 남았을 텐데…….

확신에 찬 중년 남성과는 다르게 이레일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들어가자마자 삑- 삑삑, 하는 일정한 기계음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에너지 파동을 감지하는 기계를 작동한 모양이다. 하지만 별 소득 없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고 기계음이 멈췄다.

- 안혜지 씨 방을 좀 수색해도 괜찮겠습니까?

- 아, 네… 이쪽입니다.

한참 동안 문이 열리는 소리, 방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가는 소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던 정적이 한참 이어지다가 이레일의 목소리에 깨졌다.

- 이 핸드폰은 누구 것이죠?

- 혜지 거예요.

- 비밀번호가 걸려 있네요.

- 제가 풀 수 있어요. 제가 풀어 볼게요.

동생 걱정으로 한껏 떨리는 안규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를 푼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이레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침묵이 흐르는 이어폰을 고쳐 끼며 귀 기울이던 재언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은 레헬이 느긋하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걸 바라봤다. 이레일에게서 메시지가 오는 듯 핸드폰 화면에 불빛이 들어왔다가 꺼졌다.

그런 두 사람의 뒤에 선 코루루는 레헬 따위가 소중한 아버지에게 어깨동무할 때부터 기절할 것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가면 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미칠 것 같은 표정은 눈에 선했기에 재언은 괜히 코루루에게 미안해졌다.

“친구가 실종된 당일에 나눴던 SNS 대화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습니다.”

미안함도 잠시, 재언은 레헬이 자신의 앞에 들이미는 핸드폰 화면 안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안혜지] [오후 9:50] 얌 서옐ㅠ 요즘 무슨 일이야? 오늘 학교에서 한마디두 안 하고…….

[안혜지] [오후 9:51] 어제 왜 학교 안 왔어?

[안혜지] [오후 9:51]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서예림] [오후 9:54] 나

[서예림] [오후 9:54] 드디어 만났어…….

[서예림] [오후 9:55] 나도 드디어 그분을 만났어.

[서예림] [오후 9:56] 곧 그분을 만나러 갈 수 있어

[안혜지] [오후 9:57] 서옐??

[안혜지] [오후 9:58] 예림아

[안혜지] [오후 10:13] 예림아 무슨 일임?ㅠㅠ 나 무서워, 하지 마

[안혜지] [오후 10:20] 나 요즘 누가 계속 쫓아다니는 거 같단 말야ㅠㅠㅠㅠㅠ

안혜지가 발신한 메시지를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 약 오후 10시 30분경 학원이 끝난 시각 서예림 학생이 실종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안규리의 동생인 안혜지도 사라져 버렸다.

“서예림 학생이 실종되기 몇 주 전부터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고 학생의 부모가 털어놓더군요. 수요일마다 학원도 안 가고 밤늦게 들어오는 데다 집에 오면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고요.”

“거기까지만 들으면 평범한 사춘기 청소년인데요.”

“네, 부모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한 번은 딸 방을 청소하다가 이상한 성경책을 발견했답니다. 불교 신자인 부모를 따라 딸도 불교였기에 이상하게 생각해서 내용을 살펴보니 일반적인 성경책이 아니었다더군요.”

“어머니교겠네요.”

“네. 우리 쪽 사무실에서도 그렇게 단정 짓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대답한 레헬이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자 세 사람의 몸이 띄워지더니 아파트 주차장 쪽으로 내려갔다. 혹시 이대로 코루루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게 아닐까 잠시 걱정했다.

하지만 바닥에 무사히 착지한 코루루를 보고 재언은 레헬이 정말 자신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히어로 협회엔 발명 능력자들끼리 모여 여러 잡다한 아이템들을 만들고 있죠. 능력자가 능력을 쓰고 난 뒤에 남는 에너지 파동을 조사하는 기계가 발명된 건 아실 겁니다.”

“네. 그건 다른 것들보다 유명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완성도가 떨어지는 물건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없어요. 벽에 막히거나 고도가 맞지 않으면 9할의 확률로 잡아내지 못하거든요. 이번에 납치된 학생을 보고 어쩌면 범인들은 이 기계의 숨겨진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놈들인가 봅니다.”

“히어로와 관련된 사람 중에 어머니교 신자가 있다는 소리군요.”

그 말에 레헬이 싱긋 웃으며 오른쪽 발을 바닥에 강하게 찍자 콘크리트 주차장이 쩌적, 소리를 내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덕분에 주차되어 있던 차 두 대가 손쓸 수도 없이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친 재언이 레헬에게 소리쳤다.

“아니 이게 무슨, 민…이 아니고 헬! 무고한 일반인 차 두 대가 박살이 났는데요!?”

“이러려고 제가 이 모습으로 온 것 아닙니까.”

레헬이 경악하는 신재언의 물음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광대 가면을 톡톡 쳤다. ‘평행 세계’에서는 심심찮게 학살을 자행하곤 했으니 차 두 대 박살 내는 것 정도야 애교 수준이지만, 그래도 힘들게 자동차를 마련한 차주가 보기엔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레헬의 미친 짓에 놀라는 것도 잠시, 신재언은 주차장의 콘크리트 바닥 아래에서 질퍽거리는 액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물웅덩이같이 고여 있는 액체의 형태이긴 한데 기묘하게도 표면에 사람의 얼굴 형상이 박혀 있었다. 또한 액체 속에는 여학생 한 명의 모습까지 보이는 아주 괴상한 광경이었다.

그 속에서 기절해 있는 여학생은 안규리가 보여 주었던 사진 속의 안혜지와 똑같았다. 저런 식으로 안혜지의 친구인 서예림도 납치한 게 분명했다.

고여 있는 액체 주변으로 레헬의 헬파이어가 점점 피어오르자 형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얼굴의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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