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대체 어떻게 알았지! 감쪽같이 숨었을 텐데!”
“현상 수배범, ‘변신하는 질퍽이’ 맞지? 증거도 안 남기고 유유자적 히어로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지.”
털끝만 한 자비심으로 남자의 의문에 대답해 준 레헬은 더 이상 말 섞기 싫다는 듯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더욱 키웠다. 얼굴이 박혀 있는 투명한 진흙 같은 몸이 점점 증발하기 시작했다.
재언은 남자의 몸속에 있는 안혜지가 다치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커지는 불꽃을 예의 주시했다.
질퍽이 남자는 교단의 위대한 뜻을 받드는 행위를 보게 된 자는 모두 죽이거나 납치해야 한다는 교리에 따라 레헬에게 덤벼들었다. 상대가 레드-헬-파이어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긴, 히어로가 빌런 가면을 쓰고 나타나리라 예상할 수 있을까.
‘이래서 정체를 숨기고 싶다고 한 거구나.’
질퍽이 남자의 공격이 채 닿기도 전에 레헬의 불꽃이 그의 몸 절반 이상을 증발시켰다. 안혜지 학생이 걱정된 재언은 레헬을 말렸다.
“안에 있는 학생이 다치겠어요!”
화염계 능력자가 레헬 한 명뿐인 건 아니었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을 가진 능력자는 레헬이 유일했다. 자칫 불꽃이 안혜지에게 닿는다면 위험했다.
“으으윽… 너… 넌 뭐 하는 놈이냐… 이 힘은 대체.”
질퍽이 남자가 한 번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하고 없어져 가는 자신의 몸을 붙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새가 저 모습으로 태어났거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 같았다.
남자는 눈앞에 화염계 능력자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도망칠 궁리를 하는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레헬은 도망가는 적을 놓아줄 정도로 자비심 있고 호락호락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나마 남자의 몸 안에 안혜지 학생이 아직 담겨 있어 힘 조절을 하는 것뿐이었다.
질퍽이 남자가 안혜지 학생을 데리고 도망치기에는 공간적 제약이 있고, 잠깐이라도 안혜지를 내려놓기만 한다면 레헬의 타오르는 헬파이어가 남자를 삼켜 버릴 게 뻔했다.
불투명한 액체로 꿀렁거리는 몸에 박힌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질퍽이 남자는 레헬의 뒤에 서 있는 피에로 가면을 쓴 남자와 그 뒤에 있는 익숙한 가면의 여성을 발견했다.
반짝이는 검은색의 긴 무대용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한쪽은 웃고 다른 한쪽은 우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울고 웃는 가면과 화려한 무대 의상은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즐겨 입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질퍽이 남자는 단숨에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더불어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 역시 쉽게 알 수 있었다. 검은색 점퍼와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옷차림에 가면의 모양이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냉기와 제안의 마녀를 얌전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빌런들의 왕 다크 카오스!
“다, 다, 당신은 다크 카오스입니까? 왜 저를 노리시는 거죠……. 저는 당신과 싸울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그만해 주십시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억울한 듯 소리치는 질퍽이 남자의 말에 재언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그러면 나랑 대화나 하자고?”
그 물음에 직펄이 남자는 의욕이 반 절 이상 깎인 얼굴로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액체 상태에서 그런 제스처를 어떻게 취할까 싶었는데 그의 표정과 꿀렁이는 몸으로 대충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허무하게 항복했다. 레헬의 헬파이어 능력에 이미 당한 상태에서 코루루도 대기하고 있으니 목숨이 아깝다면 항복하는 게 옳은 선택이긴 했다.
“일단 그 학생을 먼저 내려놓으실까? 그리고 2주 전쯤 그 학생과 친구인 학생도 네가 데려간 게 맞지?”
재언은 질퍽이 사내의 몸에 있는 안혜지 학생을 빼낸 뒤에 어머니교의 단서도 캐내야겠다는 속셈으로 부드럽게 협상을 시도했다.
“저… 저는…….”
“네 녀석! 그 추한 모습으로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데 감히 토를 달다니! 아버지,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이 자식을 태워 죽여 버리겠어요!”
“진정해! 여기서 이 남자를 죽이면 좋을 게 없어!”
재언의 만류에도 질퍽이 남자가 계속 우물쭈물하며 말을 아끼자 결국 참을성이 부족한 코루루가 짜증 난 듯 소리치며 뛰어올랐다. 그녀의 높은 구두 굽이 남자의 몸을 내려찍었다.
액체로 된 몸에 어지간한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겠지만, 코루루의 능력은 빙(氷)계였다. 그녀의 구두 굽에 닿은 몸의 표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가 얼음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파괴되었다.
처음에 발견되었을 때보다 3분의 1가량만 남은 몸에 남자는 이를 악물고 안혜지를 꺼내 풀어 주었다. 안혜지는 온몸이 젖어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좋아. 그러면 서예림 학생이 어디 있는지도 순순히 불어 보실… 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하던 재언은 남자를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남자의 몸에 붉은색의 선이 새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액체로 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디든 틈을 찾아 들어가려는 것처럼 미친 듯이 움직였다.
“아아악! 그아아악! 어머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아아악!”
발광하던 남자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듯 위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남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옅었던 붉은 선이 점점 더 진해졌다.
그러다 마치 깊게 베인 상처라도 난 것처럼 선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레헬과 코루루의 공격에도 통각을 깊게 느끼지 않았던 남자가 게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으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아파트 주차장에 커다란 비명이 울려 퍼지며 남자의 몸에서 흐른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이윽고 액체 상태임에도 남자는 선이 그어진 대로 서서히 나뉘고 말았다.
‘죽었나?’
얼굴은 물론 액체인 몸이 세 부분으로 갈라진 남자의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재언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시선이 향했던 위쪽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새벽 밤하늘, 신재언이 방금까지 있던 옥상에 누군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옆에 있는 상가 건물의 간판 불빛으로 겨우 본 것은 그 누군가가 여성으로 보이며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썼다는 것뿐이었다.
얼굴, 생김새 그 무엇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녀가 찬 붉은 빛의 팔찌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위대하신 그분을 위한 무대를 방해하려고 하다니.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다 해도 그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작지만 울림 있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재언은 그녀가 질퍽이 남자를 죽인 장본인이며 어머니교의 교주가 아닐까 짐작했다.
자신이 만든 종교의 신도이자 부하일 텐데 저런 식으로 잔인하게 죽여 버리다니, 성질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오만방자한 목소리로 죽은 남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그분이여……. 저는 위대한 서커스의 ‘얼굴 없는 여자’입니다. 당신을 위해 어머니교를 창단하고, 그를 인정받아 위대한 무대에 초대받을 수 있었습니다. 곧 아버지를 위한 혼돈의 하늘이 떠오를 테니 느긋하게 기다려 주십시오.”
그녀는 숙인 고개를 들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안혜지 학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여자는 무대의 소모품이었으나 당신이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설마… 마약왕?”
조용히 속죄하며 살라고 명령했는데 이렇게 사고를 치다니. 엇나가도 정말 단단히 엇나갔구나 싶었다.
어머니교의 창시는 알례리의 능력이 각성하기 훨씬 전이니 알례리가 교주를 찾아가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어머니교의 교주, 통칭 ‘어머니’는 화를 내는 재언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재언은 보라색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이 마치 찢어지는 것처럼 끌어 올려져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문이 가득한 말을 남긴 그녀는 질퍽이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 목적을 다했는지 뒤를 돌아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 붉은색 선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천천히 움직여 그 속으로 들어가며 그녀가 고개를 돌려 신재언을 똑바로 내려봤다.
“위대하신 그분이여. 혼돈의 하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환장하겠네. 왜 당사자는 빼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거지?”
재언이 답답한 듯 소리치는 걸 뒤로 하고 여자는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잠시 발을 동동 구르던 재언은 이상하게 조용했던 레헬 쪽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불꽃을 피워 올려도 모자랐을 텐데 왜 가만히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레헬은 가면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저기, 헬 씨?”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처음 보는 그의 이런 반응에 재언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속으로 의문을 삼켰다.
‘혹시 레헬은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건가?’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방금 있었던 소란 때문에 안규리의 집에서 사건을 조사하던 히어로들이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 덩그러니 서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어머니교의 교주가 사라지자마자 레드-헬-파이어 사무실의 실력 있는 히어로들이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그중에서 특히 이레일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다크 카오스! 그리고 안혜지 씨까지……! 다, 당신이 이 모든 일의 주범이었습니까? 이렇게 졸렬한 짓을 하다니……. 다크 카오스,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재언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발뺌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어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주차장 내부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아주 엉망이었다.
주차장에 주차된 불쌍한 차들은 모두 뒤집어지거나 불에 타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이걸 다 물어 주려면 배상금이 얼마나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무리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해 봤자 흠뻑 젖은 채 기절한 안혜지를 둘러싸고 수상한 가면을 쓴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양새에 해명하긴 글렀다.
‘골치 아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