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70화 (170/324)

170화

“위대하신 아버지. 다른 놈들은 모르겠지만, 코루루는 이상하게 저 남자를 공격하고 싶지 않아요.”

재언이 능력을 각성시켜 준 사람들은 서로 유대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했으니 코루루가 이레일을 공격하길 꺼리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그는 레드 헬파이어의 사이드킥이다. 레헬도 그를 공격하고 싶지 않을 테니 재언이 물러나려고 했다.

그때 레헬이 손가락을 까딱거려 이레일과 자신의 사무실 히어로들 주변으로 불타오르는 불의 벽을 쳐 버렸다.

‘저러다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저런 짓을!?’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뛰어난 화력을 가진 능력자는 드물 텐데 어쩌려는지 모르겠다.

“…그 남자는 누구죠? 설마 또 다른 부하를 들였습니까?”

히어로들 사이에서 다크 카오스의 아홉 번째 자식이냐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들 역시 자신이 일하는 곳의 사장님이 여기서 저런 콘셉트나 잡으며 다크 카오스와 손을 잡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들은 그저 버드맨 이후로 등장한 다크 카오스의 자식이 레드 헬 파이어와 비슷한 계열이라는 것에 분함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틀리지, 틀려. 나는 그의 아홉 번째 같은 게 아니야. 난 누구보다 먼저 다크 카오스의 부하였어.”

재언은 아까보다 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어지러운 정신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옆에서 코루루가 이상한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깩!”

막상 다크 카오스와 그의 충실한 부하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괴상한 소리를 삼키며 할 말을 잃었다. 그사이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쳐든 레헬의 말뜻을 한참 동안 생각하던 이레일이 머릿속에서 결론을 지었는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다크 카오스의 숨은 히든 피스? 사장님의 능력과 비슷한 화염계라니. 히어로들을 욕보이는 것에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다크 카오스!”

비슷한 능력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존경하는 레드-헬-파이어 본인이다. 게다가 레헬은 다크 카오스에게 히든 피스도 뭣도 아니다.

신재언은 왜 레헬이 저렇게 신이 나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빌런 흉내를 내는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오히려 코루루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 아버지… 저 극악무도한 놈이 왜 우리들의 형제가 된 건가요? 서… 서, 설마 마약왕 오빠를 내치시고 저놈을 들인 건가요? 우리의 안락한 보금자리에 저… 레드-헬-파이어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다 엔레이드맨 오빠가 스트레스로 죽으면 어떻게 해요?”

신재언은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코루루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비틀거렸다. 그는 가면의 이마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코루루를 달래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안 되겠다. 일단 안혜지 학생은 구했으니까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자. 녀석들의 뒷배가 누군지도 알아냈으니 여기서 히어로들과 실랑이할 필요는 없지.”

이제 그만 레헬을 데리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오히려 레헬이 이레일을 놔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 가며 능력을 주고받았다. 레헬의 불꽃이 이레일의 뺨에 스쳐 작은 생채기가 났을 때 재언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의 불꽃에 스치기만 해도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기에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멀끔한 얼굴에 작은 상처만 났을 뿐 이레일의 상태는 멀쩡했다.

그제야 재언은 레헬이 자신의 사이드킥을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긴, 히어로 최강으로 부상하면서 몇 년 동안 레헬은 사이드킥을 둔 적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이레일이 유일했다. 나름대로 그를 마음에 들어 하니 일종의 훈련을 시키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레일의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 해도 그의 음파 능력은 레헬의 털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불타는 벽에 모두 막혔다. 이러다 다른 히어로까지 합세할까 우려한 재언이 결국 레헬에게 소리쳤다.

“이만 물러납시다! 여기서 더 소란 피워 봤자 좋을 게 없어요.”

그러자 레헬이 히어로들과 자신 사이에 커다란 불의 벽을 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고 재언의 곁으로 돌아왔다.

“저번보다 능력을 발동시키는 텀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정교하지 못해요. 저래서 언제 S급 히어로가 돼서 본인 사무실을 차리겠다는 건지…….”

어느새 와 있던 것인지 체어맨의 문이 세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문이 열리는 걸 보던 재언은 레헬의 말에 의외라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의외로 좋은 선생님이네요?”

“제 영역에 속한 놈들이니까요.”

“당신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어요.”

신재언이 가볍게 말하자 레헬이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재언이 아는 ‘평행 세계에서의 레헬’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으며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하물며 세계를 멸망시킨 장본인인데 자비나 너그러움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재언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했던 레헬이 긴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고개를 모로 돌려 말했다.

“저는 당신이 보여 준 모습이 더 의아한데요. 누군가를 이유 없이 도와주는 당신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평행 세계’의 레드-헬-파이어를 떠올리는 만큼 다크 카오스도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신재언은 저쪽 세계의 자신이 그를 언제부터 곁에 두었는지 아직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체어맨이 만들어 준 문으로 자리에서 벗어나 재언의 집으로 돌아왔다. 코루루는 레드-헬-파이어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질색하며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으로 서둘러 도망쳐 집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재언은 가면을 벗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도대체 민재 씨 마음속을 모르겠어요……. 진짜 빌런이 될 생각은 아니죠?”

“어릴 때 했던 약속 때문에 히어로 자리에서 나올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어릴 때 도와줬던 은인?”

“네.”

재언은 혹시 그가 말한 은인이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물리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했다. 차민재가 어렸을 때라면 자신도 어렸을 것이고, 그 시기의 자신은 ‘럭키 가이’ 능력만 가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렸을 때의 자신이 어린아이를 도와준 기억도 없었다. 옷걸이에 검은색 점퍼를 걸어 둔 재언은 찜찜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차민재의 목에 팔을 감았다.

맞대어진 입술 사이로 익숙하게 혀를 안으로 밀어 넣은 두 사람에게서 질척한 소리만이 들려왔다. 재언은 민재의 손이 가슴을 따라 자신의 허리를 단단하게 잡을 때부터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젖혔다.

‘이거, 이래도 되는 거 맞나?’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재언은 신음을 삼키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에 팔을 끼워 넣으며 시계를 확인하자 출근 준비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 위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역시 평균보다 훌쩍 커다란 남자 둘이서 멀티싱글 사이즈 침대에서 자려니 힘들어 죽겠다. 물론 몸이 뻐근하고 아픈 게 침대가 좁아서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냉장고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수병을 꺼내 다시 침대 쪽으로 다가와 재언은 입을 대고 다 마셔 목을 축였다. 빈 페트병을 잡은 손에 힘을 줘 납작하게 만드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깬 차민재가 꿈틀거리며 재언 쪽으로 다가왔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재언의 어깨에 기댄 그는 눈앞에 보이는 승모근 쪽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잠이 섞여 있는 목소리로 나른하게 말했다.

“재언 씨 여기 자국 생겼어요.”

“패치 붙이면 돼요.”

재언은 차민재가 잠에서 깬 걸 확인하고 리모컨을 들어 TV를 틀었다.

“늘 생각하는 건데… 민재 씨는 전생에 문어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던 재언은 뉴스가 나오자 손가락을 멈췄다. 당연하겠지만 어제 있었던 소란이 특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것 때문에 궁금해서 TV를 튼 것도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특정할 만한 힌트가 나오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뉴스에서는 다크 카오스가 아니라 그가 숨겨 두었던 히든 피스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필 레드-헬-파이어와 같은 화염계의 빌런이며 그 힘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하긴 다크 카오스의 이름 아래에서 날뛰는 빌런들과 그의 여덟 자식만으로도 세상이 난리였다.

그런데 또다시 엄청난 능력자로 추정되는 이가 그의 부하를 자처하며 곁에 섰으니 떠들썩할 만도 했다. 그래도 그 능력자가 레드 헬 파이어라는 사실은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재언은 이번 고등학생 납치 건에 대한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이 가장 억울했다. 일을 벌인 어머니교 신도를 교주가 직접 죽여서 입막음했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재언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최악의 골칫거리인 마약왕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평행 세계’에서 마약왕은 곁에 없었다. 그처럼 이렇게 말 안 듣는 자식은 이쪽과 저쪽 세계를 통틀어 그가 유일했다.

마약왕의 증오는 ‘그리움’. 사랑하는 아내와 첫째 아들의 죽음으로 과거를 되돌리고 싶다는 욕망과 증오가 능력으로 각성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본인의 욕망이 아닌 신재언을 위한다는 목표로 쓰고 있었다.

그의 광기는 신재언으로서도 통제 불능이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재언은 마약왕을 놔주는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 피해 금액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파트의 주차장이 무너지고 주차된 차들이 전부 망가졌습니다.

뉴스 속 아나운서의 발언에 재언이 고개를 돌려 황당한 표정으로 차민재를 바라봤다.

“민재 씨. 설마 저것 때문에 빌런을 자처했던 건 아니죠?”

레드-헬-파이어가 재산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쪼잔한 짓을 했을까 하고 기대를 해 봤지만, 차민재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재언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히어로로 있으면 개나 소나 자기 아래로 생각해서 조금만 잘못해도 여기저기 개 같은 단체들이 들고일어나기 일쑤거든요. 얌전히 돈만 받으면 될 걸 자꾸 뭘 더 요구하니까 생각보다 짜증 난다니까요.”

하긴, 그런 양반들도 있긴 했다. 히어로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희생해서 싸운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