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이전에 레헬이 S급 히어로에 필적했던 빌런을 잡은 날이 있었다.
그 빌런은 주변 5M 이내의 존재하는 모든 것에 500원 동전만 한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관통 능력을 가진 놈이었다. 개수는 무한이며 영역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뚫었다. 바꿔 말하면 사람도 충분히 뚫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위험한 능력으로 그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녔다. 그에게 A급 히어로가 세 명이나 죽은 데다 민간인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레헬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다른 히어로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켰다.
그 빌런은 레헬까지도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자만했으나, 그의 능력은 레헬의 몸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이레일이 음파 능력으로 죽어라 레헬을 공격해 봤자 헬파이어의 거대한 벽을 뚫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빌런은 한참을 발버둥 치며 반항하다가 레헬의 능력으로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허무하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빌런이 최후를 맞이했다.
재언이 기억하기로 레헬은 그때 의뢰비를 따로 받지 않았다. 빌런의 공격으로 히어로와 민간인 사상자만 500명이 넘었을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는데, 빌런을 잡은 다음 날 레헬이 고소를 당했다.
빌런을 공격하면서 그의 불꽃에 녹아 버린 아파트의 주민들이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집단 소송을 건 것이었다. 레헬이 아니었다면 머리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죽었을 게 분명했던 사람들이 말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암묵적으로 빌런으로 인한 피해 금액의 소정을 히어로에게 떠넘겨 왔었다. 워낙 의뢰비가 비싸기도 하니 수수료 같은 금액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탓이다.
하지만 해당 사건에선 빌런이 워낙 강해서 피해 규모가 컸다. 게다가 피해자들이 특정 히어로를 고소한 건 처음이었기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3년 전에는 차민재와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였지만, 당시에 뉴스나 인터넷 기사를 보며 한 히어로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 심한 것 같다며 재언도 혀를 쯧쯧 찼었다.
그때의 레헬은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성격이었기에 개소리를 듣는단 투로 그들의 주장을 전부 무시했으며 알아서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나왔다. 기자들이 몰려와도 헬파이어 능력으로 차단하는 등 그는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며 일관된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샀다. 레헬의 사무실에서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 금액을 모두 책임지겠다는 발표에도 레헬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심하게 몰아붙였다.
인터넷으로 떠드는 사람만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국회의원부터 검찰까지 이때가 기회라는 듯 그를 공격했다. 아마 최강의 히어로를 고립시켜 손안에서 쥐락펴락할 속셈이었던 자들의 작은 야망이 아닐까 싶었다.
레드-헬-파이어 사무실에서 또다시 금액적인 부분과 피해자들이 만족할 만한 성의를 보이겠다고 3차 발표까지 냈으나 이상하게도 대중들의 공분은 멈추지 않았다.
재언이 저들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큼 계속 꼬투리를 잡았다. 더 나아가 레헬의 지나치게 잔인한 행적들에 초점을 맞춰 과거까지 들춰냈다.
그때는 ‘다크 카오스’인 신재언이 레드-헬-파이어를 동정할 만큼 분위기가 비정상적이었다.
결국, 그들은 레헬을 기자회견장까지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레헬이 매우 타격을 입고 풀 죽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아주 귀찮다는 얼굴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이딴 일로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낸 사람들을 어떻게 족쳐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건 누가 봐도 화를 참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레헬이 기자회견장에 모여 있는 기자들을 쭉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한심하다고 말하는 듯한 한숨이었다.
“히어로 그만두고…….”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말투였다.
“빌런 짓이나 하면서 다 죽여 버릴까…….”
여배우인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운 얼굴로 중얼거린 말이 모두의 귀에 정확하게 들렸다.
태도 논란으로 기자회견을 열었기에 그의 태도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대중들을 화나게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송을 본 재언은 그때만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히어로 일 따위 그만둘 테니까 너네들 다 뒈지든가 말든가. 아니, 그냥 내가 죽여줄게.’
직접 말은 하지 않아도 레헬의 무시무시한 눈빛에서 충분히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S급에 필적하는 빌런을 손쉽게 잿더미로 만든 세계 최강의 능력자가 하는 농담치고는 말에 살기가 가득했다.
“이런 좆같은 곳에 또 불러냈다간… 여기 모인 새끼들부터 터트려 죽여 버릴 줄 알아.”
그렇게 모두에게 충격을 주는 한마디를 남긴 레헬은 우아하게 일어나, 긴 다리로 기자회견장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과 관계자들은 얼이 빠져 난리가 났다.
하지만 레헬을 아는 모든 이들과 높으신 분들은 그게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결국, 정부 차원에서 레헬에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사태는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전부터 고질적으로 히어로들 사이에서 문제시되어 왔던 피해 보상에 관한 특약이 보험으로 나오게 되었다.
빌런에 의해 마을이 송두리째 날아가거나 집이 파괴되는 경우는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사람들은 재해와도 같은 빌런들의 습격에 늘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피해자들을 위한 보험 상품이 바로 ‘빌런 특약’이었다. 빌런에게 집이나 금전적인 손해를 입었을 때 피해자들에게 최대 80%까지 지원해 주는 특약이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보험사인 ‘히어로 보험사’, 통칭 H사에만 있는 보험 특약으로 가격은 가구당 1년에 약 80만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입한 보험으로 취약계층이나 미성년자, 나아가 취업 준비생까지 보험료를 면제해 주는 제도도 있었다.
신재언도 매년 꼬박꼬박 내고 있는 특약은 사실 신설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레헬에게 걸린 집단 소송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 일로 대한민국에 실망했을 레헬에게 여러 나라에서 러브콜을 보냈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 한국의 S급 히어로로서 존재했다.
이 사건 때문에 안티가 조금 늘어났긴 해도 다른 한편에선 빌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히어로들에게 그동안 너무 각박했다는 의견이 생겨났다.
‘그때 엄청 짜증 났던 모양이네. 눈치도 안 볼 것 같은 양반이 일부러 빌런 가면까지 쓰고 사고를 치다니. 하긴… 레헬이 한 짓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 또 피해 보상이니 뭐니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 한순간에 집과 자동차를 잃은 건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언은 왜 그가 자신의 부하라고 떠들고 다녔던 건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납치당한 학생이 아니라 다크 카오스의 또 다른 히든 피스로 옮겨가 버렸다.
게다가 난리 난 건 일반 대중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자식들까지 깜짝 놀란 얼굴로 재언의 앞에 나타나 몇 번이나 확인하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레헬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하나같이 다급했다. 레헬의 능력을 각성시킨 적이 없다고 그들을 안심시킨 뒤에야 겨우 주변이 조용해졌다.
“재언 씨,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네. 바쁜 시즌은 끝나서… 여덟 시 전까진 끝날 겁니다.”
어느새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차민재가 검은색 넥타이를 매면서 물었다.
방 안의 작은 행거에 차민재의 정장 몇 벌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새삼 1.5룸은 혼자 살면 딱 좋긴 한데, 둘이 살기엔 조금 좁다고 느껴졌다.
“재언 씨도 이번 사건이 신경 쓰이죠?”
“그렇죠.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학생이 무사히 집에 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오늘 밤에 저와 함께 가요. 언럭키 네임리스가 협력을 요청했어요.”
“난… 이 애를 알아. 이 애는 내 마음의 조각 중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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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럭키 네임리스는 그가 가진 특이한 저주 때문에 사무실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히어로 협회에서 그를 책임지는 것도 아니었다.
신재언은 ‘상위급 존재’들에게 사랑받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그건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큰 독이자 고독과 증오였다.
잠을 잘 때조차도 그들에게서 해방될 수 없었다. 잠이 들면 어느새 자신은 우주 같은 어두운 공간에 누워 있었고 주변에는 ‘존재를 알 수 없는 상위급 존재’들이 자신을 에워쌌다.
그들의 이름은 인간이 발음할 수 없고 혹시라도 이름을 말한다면 소환된 그들에게 잔인한 방식으로 찢겨 죽을 것이다.
그렇기에 언럭키 네임리스의 낯빛이 지나치게 창백하고 야위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모든 일에 지나치게 방관적이고 나서려 하지 않았으며 그의 정체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가 직접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다른 히어로들에게 협력 요청을 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가 재언도 아는 타락한 추기경과의 싸움이었다. 그때 에렌 성이 상당히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는 존재 자체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었다.
레드-헬-파이어의 사무실에서는 직원이 이번 사건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전담해서 맡고 있었다. 그러니 레헬의 사무실에 언럭키 네임리스가 협력을 요청한 것이다.
사실 한 사건에 S급 히어로가 두 명이나 움직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요즘 레헬과 붙어 다니며 간이 커진 재언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머니교는 꼬리가 잡힐 것 같으면 자살하라는 교리가 있는 미친 종교이며 교주 또한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 극악무도한 자입니다. 교주의 능력은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지난밤 단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레일과 레헬의 사무실에서 파견된 두 명의 히어로가 고급스러운 밴 안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며 레헬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바로 붉은 실입니다. 아직 정확한 능력은 모르지만, 공간을 베거나 분리할 수 있는 능력 같은데 제대로 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예언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혹시 그녀가 세상에 밝혀진 두 번째 복수 능력자일 가능성도 있고요.”
이미 안면이 있는 걸 떠나서 신재언에게 커다란 신뢰와 호감을 가진 이레일은 괜찮았지만, 나머지 히어로 두 명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일반인인 신재언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 레헬의 사무실에 새로 들어온 일루미네이션 김수영과 침묵의 우드라는 히어로 명을 가진 A급 히어로들이었다.
“이레일 팀장님. 이분은 비능력자가 아닌가요?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데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일루미네이션 김수영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일반인을 걱정한다기보단 걸리적거린다는 얼굴이었는데, 재언이 봐도 저게 가장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비능력자를 교단에 신도로 잠입시키겠다니. 만약 그가 잘못되면 우리 사무실에 타격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신재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속으로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왜 갑자기 어머니교같은 정신 나간 사이비 종교에 신도로 자신이 잠입하는 꼴이 되었는지. 재언은 약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