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재언은 레헬을 따라 서울 외곽의 어느 건물 앞에 정차했다. 길가에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는 커다란 밴 안으로 들어가자 면식이 없는 두 명의 히어로와 이레일이 벌떡 일어나 레헬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밖에서 봤을 때도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안은 모니터 네 개와 이상한 장치들로 하나의 사무실을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굉장했다.
‘…이거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007이라도 찍는 건가?’
왠지 모르게 로망의 실현을 눈앞에서 목도한 느낌에 재언은 상황도 잊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반기는 이레일과는 반대로 처음 보는 히어로 두 명의 표정은 신재언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듯 찌푸려졌다.
“신 선생님! 역시 이런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군요.”
“이레일 팀장님. 이분은 누구십니까?”
“아, 신 선생님. 계속 세워 두어 죄송합니다. 이쪽은 이번에 우리 사무실로 고용된 일루미네이션 김수영, 이쪽은 침묵의 우드입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히어로 중에 안경을 쓰고 딱딱한 표정을 지은 여성이 일루미네이션 김수영이고,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우울한 표정의 남자가 침묵의 우드였다. 둘 다 나이도 어려 보이고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벌써 A급인 걸 보면 실력은 뛰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쪽은 신재언 님으로 늘 저희를 도와주시는 감사한 분입니다.”
‘그들이 묻는 건 내 소개가 아닌 것 같은데… 눈치가 없는 건가.’
하지만 레헬의 사이드킥으로 사무실의 총책임자나 마찬가지인 이레일이 그럴 리 없었다. 나이는 어려도 레헬이 직접 조수로 둘만큼 머리가 좋은 편이니 말이다.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시니 두 분께서도 각별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티 나지 않게 눈치 없는 척 눈치를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다크 카오스의 자식들만큼 극성은 아니더라도 재언이 각성시킨 사람답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건 다르지 않았다.
신재언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려고 한 순간, 갑자기 들린 소란에 뒤쪽에서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누워 있던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히어로 두 명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레헬의 사무실에 협력 요청을 넣었던 언럭키 네임리스였다. 그가 멍한 얼굴로 놀란 히어로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재언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언럭키 네임리스의 눈동자는 블랙홀을 닮아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아늑한 우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어째 전에 만났을 때보다 다크서클이 짙어진 것 같은데?’
언럭키 네임리스가 좌석을 제치고 신재언을 향해 다가오자 그와 몸이 닿지 않기 위해 이레일과 히어로 두 명이 후다닥 옆으로 물러섰다. 요즘 소문에 의하면 이름이 불리는 것뿐만 아니라 몸이 닿기만 해도 저주를 받는단 소리가 있었다.
하긴, 시간이 지날수록 ‘상위급 존재’들의 권속은 더욱 강해지고 집착도 끈질겨졌다. 그건 인간이 받아들이기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너와 함께 가겠어……. 네가 제격이야.”
“네? 뭐가요?”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재언이 당황해하며 되묻자 히어로들에게서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안됩니다! 그는 일반인이라면서요? 비능력자 아닙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간만에 히어로다운 말을 들은 느낌이었다. 정신없는 분위기에 당황해하는 재언의 어깨를 잡기 위해 언럭키 네임리스가 팔을 뻗자 차민재가 움직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차민재에게 어깨가 밀쳐진 언럭키 네임리스는 몸에 근력이 없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위협을 받았다고 여기는지 그의 머리 위로 검은 모형의 구체가 떠올랐다.
왼쪽으로 빙글빙글 도는 구체 안으로 작은 별들이 빨려 들어갔다. 블랙홀 속에 살기도 하며 지구의 심해 안에 잠들어 있다고 알려진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그냥 보면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재언은 저게 얼마나 위험한지 매우 잘 알았다.
레헬과 언럭키 네임리스가 신재언을 가운데에 두고 대치하는 게이 치정극 같은 상황을 눈앞에서 본 이레일이 끼어들었다.
“사장님! 언럭키 네임리스! 여기서 우리끼리 싸울 상황이 아닙니다. 게다가 언럭키 네임리스… 이번엔 당신이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하다니, 신 선생님께 실례입니다. 당신의 저주에 휘말렸으면 어쩔뻔했습니까.”
“그는 괜찮아. 그와 얘기해도 된다고… 그들이 허락했으니까.”
“…….”
이레일의 이마에 떠오른 ‘삼파전’이라는 글자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오히려 재언이 민망해졌다. S급 히어로 두 사람이 건장한 남자를 가운데에 두고 싸우는 광경이라니!
신재언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이레일에게 다음 설명을 요구했다.
“이 두 사람은 신경 쓰지 마시고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어머니교는 사람을 죽이는 데 서슴지 않는 놈들입니다. 저희만으로 교단 내부를 습격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서예림 학생의 신변은 장담할 수 없게 되니까요. 언럭키 네임리스가 서예림 학생의 안전을 조건으로 요청해 온 거기도 하고요.”
이레일이 언럭키 네임리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리 쪽에서도 서예림 학생이 무사했으면 하니까 협력에 응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려워서 논의 중이었습니다. 우리 쪽 사람들은 이미 얼굴이 알려졌고, 어머니교의 끄나풀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요.”
재언은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끄나풀이요?”
이레일이 역시 신 선생님은 예리하다고 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순순히 되물었다.
“죽은 B급 히어로 기억하십니까?”
“네. 어머니교에게 살해당했다던…….”
“그를 죽인 건 어머니교가 맞습니다만, 그 역시 어머니교 신도였습니다.”
“…….”
재언은 레헬의 사무실에까지 어머니교가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피부가 모두 벗겨져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산 채로요. 라는 말을 삼키는 이레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같은 사무실 동료가 맞는지 확인하러 갔던 이레일은 참혹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이제 3년 차 히어로인 그는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빌런에게 당한 시신들의 끔찍한 모습들을 많이 봐 왔지만, 사무실에서 동고동락했던 동료의 시신을 확인하는 건 고역이었다.
“그게 비록 잘못된 사이비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그 때문에 사무실을 배신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렇게 죽어선 안 됐습니다. 사장님도 그걸 알기에 이번 일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움직이는 거고요.”
“그런데 그는 왜 살해당한 건가요?”
“그가 죽기 직전 저희 쪽에 보낸 문자입니다. 그는 아마 사장님께 서예림 학생의 일을 전하려는 모양이에요. 어머니교는 배신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겁니다.”
이레일이 핸드폰을 꺼내 보여 준 문자메시지는 간결하게 한 문장뿐이었다.
[팀장님,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사무실로 찾아뵙겠습니다.]
신재언이 기억하기로 살해당한 B급 히어로 섬광의 블레이더는 재언과 비슷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그의 조카 신백건이 좋아하던 히어로이기도 했다.
그런데 옆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는 이레일의 노력이 무색하게 레드 헬 파이어와 언럭키 네임리스가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 중이었다.
“…레드-헬-파이어. 네 힘을 믿고 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
“이미 한번 죽어서 괜찮거든……. 언럭키 네임리스. 그놈들에게 똑똑히 전해. 또 그를 넘본다면 이번엔 멸망만으론 끝나지 않을 거라고.”
“…….”
설명도 끝났겠다 계획을 논의해야 하는데 말싸움이나 하는 S급 히어로들의 모습에 신재언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봤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사실 차민재가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위급 존재’들에게 사랑받았던 ‘평행 세계’의 신재언이 어떻게 무너지고 망가졌는지 옆에서 쭉 지켜봐 왔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 세계도 언럭키 네임리스가 재언 대신 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기에 신재언이 부모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럭키 네임리스… 뭐가 제격이란 말씀입니까? 제가요?”
레헬에게 보내던 사나운 기색과 어두운 시선을 거두고 무표정으로 돌아간 언럭키 네임리스가 신재언을 바라봤다.
“응… 나와 함께 찾으러 가자.”
“서예림 학생을요?”
“응.”
무슨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한 번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신재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히어로들이 봤을 때, 다짜고짜 같이 가자고 하는 그의 행동에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만약 평범한 일반인이 배신하려고 했던 신도 한 명의 피부를 벗겨서 공공장소에 버리는 사이비 종교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자는 제안을 받는다면 단박에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재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무사할 것이라는 묘한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그의 뒤에서 언럭키 네임리스를 경계하며 이를 갈고 있는 일곱 명의 자식들 덕분이기도 했다.
사실 차민재가 먼저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들이 뛰쳐나와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신도로 몰래 잠입할 수 있는 작전이 있다는 거네……. 어머니교 교주에게 용건도 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야. 다크 카오스로서 행동하면 만날 수 있긴 하겠지만 큰 소란이 일어나겠지.’
레헬의 사무실에서 일을 진행하는 거니 안전도 보장할 수 있다. 뭐, 어떻게든 안전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머리를 굴린 신재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레일이 건네준 차가운 녹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그러자 이레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곤란한 표정으로 차민재를 힐끔거렸다.
“…신 선생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원래 작전으로는 언럭키 네임리스가 일루미네이션 김수영과 부부라는 설정을 두고 잠입하기로 한 거였습니다. 말 못 하는 장애를 가진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라고 정했었거든요.”
“…설마.”
재언은 이레일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벌써 불안했다.
“이렇게 되면 신 선생님께서 언럭키 네임리스와 동성 부부가 되어야 하는데… 사장님이 가만히 계실까요?”
“풉! 콜록, 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