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동성 부부?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그랬다고?
아직 동성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않았는데?
“듣자 하니 어머니교는 굉장히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이는데 동성 부부라고 하면 받아 줄까요?”
재언의 의문에 옆에서 차민재가 끼어들었다.
“재언 씨, 동성 부부로 잠입하는 거라면 저와 해야죠. 저 은둔형 외톨이 같은 놈이 아니라.”
“어… 민재 씨가 잠입해도 되는 겁니까?”
그러자 이번엔 이레일이 대뜸 소리쳤다.
“안됩니다!”
이레일은 신재언을 동성 부부로 잠입시키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상황이 벌어질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그는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하고 다시 머리를 쥐어 짜냈다.
S급 히어로 두 명 사이에 껴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재언은 계획을 수정한다는 소리에 한 걸음 물러서서 언럭키 네임리스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에게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지나치게 메마른 사람인 걸 알기에 재언은 그 생각을 슬그머니 철회했다.
아마도 그건 ‘상위급 존재’들에게 인정받아 사람 대 사람으로 유일하게 대화가 허락되는 사람에 대한 호의일 것이다.
‘그 기분이 뭔지 나도 뼈저리게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가, 이 남자한텐 영 나쁘게 대할 수가 없네.’
다른 히어로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거듭하던 이레일이 급하게 수정된 계획을 들고 다가왔다.
그래 봤자 재언이 봤을 때 부부에서 형제지간으로 바뀐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대충 자폐증을 앓고 있는 동생과 함께 형이 어머니교에 입단한다는 스토리였다.
“그거까진 좋은데 경찰도 잡지 못한 어머니교 본부에 의심받지 않고 들어갈 방법이 있는 겁니까?”
“그게 저희가 가장 신중하게 다가갔던 부분입니다. 일단 맨얼굴로 들어가는 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 선생님이어도 위험해질 테니 이걸 써 주세요. 일시적으로 변장할 수 있는 얼굴 가면입니다.”
이레일이 다가와 재언의 오른쪽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아 주고 사람 얼굴 모양의 물컹거리는 가면을 얼굴에 씌어 주었다.
“아, 이 얼굴을 한 사람은 지금 히어로 협회에서 관리 중으로 50년 정도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남자거든요.”
손으로 만졌을 때도 물컹물컹하니 기분이 이상했는데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자기 멋대로 꿀렁거리는 게 기분이 매우 나빴다.
‘으으, 이상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물거리던 가면의 움직임이 끝나고 거울을 보니 그곳엔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면이 눈동자 색은 바꾸지 못하는지 선명한 하늘색 눈동자만은 익숙하게 반짝였다.
그나마 뺨에 칼자국이 나 있는 제법 강해 보이는 인상에 어색하지 않은 체구여서 다행이었다.
“가면에 씌워진 최면 효과로 3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은 두 분 얼굴을 다른 사람의 얼굴로 인식할 거고요.”
옆쪽을 힐끔 쳐다보자 언럭키 네임리스도 재언이 쓴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만 재언과는 반대로 가냘픈 체구에 맞게 더 마르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 있는 얼굴로 변했다.
“우리 쪽 사무실 히어로 중 한 명이 어머니교에 잠입 중이어서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교에 가족을 잃은 사람으로 어머니교를 괴멸시킬 때까지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섬광의 블레이더가 살해당한 것 때문에 이번 한 번만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이레일은 두 사람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늘어놓은 다음 무선 이어셋을 귀에 꽂았다.
- 잘 들리십니까?
재언이 끼고 있는 무선 이어폰으로 이레일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네. 잘 들립니다.”
- 신 선생님의 안전은 우리 사무실에서 책임지고 보호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레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귀에 꽂혀 있는 무선 이어셋을 홀랑 빼 버린 차민재가 컴퓨터 테이블에 기댔다. 재언은 어두운 밴 속에서도 발광하는 차민재의 미모에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 재언 씨, 이번에 제가 재언 씨와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차민재가 빼앗은 무선 이어셋을 귀에 끼고 입을 여는 모습을 보며 황망해하는 이레일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재언은 그저 그의 발광하는 미모에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 어머니교 본거지에 잠입한 뒤 하늘을 올려다보면 교주가 쳐 놓은 결계가 보일 겁니다. 저는 그걸 밖에서 파괴할 생각이고요. 힘으로 누르다 보면 파괴할 수 있지만… 알잖아요? 누굴 지키면서 싸우는 건 파괴하는 것보다 어려운걸요.
‘평행 세계’에서 레헬이 지킬 것은 오로지 다크 카오스뿐이었고, 다크 카오스가 원하는 건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레헬은 무엇이든 쉽게 공격하고 파괴했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 히어로인 그는 누군가를 지키거나 빌런을 물리쳐 왔다. 이전에도 민간인이 휩쓸리지만 않았다면 크루즈나 식인 연쇄 살인마가 출몰했던 산골에서, 혹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무 걱정 없이 능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만큼 레헬은 자신의 행동을 제약했고 민간인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쪽과 이쪽을 동기화할 생각은 없지만… 레헬의 저런 모습은 색다르군.’
의외의 모습을 보여 주는 레헬에게 맞장구쳐 주려는 것도 있고, 무기력했던 언럭키 네임리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하려는 서예림이 가진 마음도 궁금했다. 그렇게 여러 이해관계가 엉킨 어머니교 본부 잠입 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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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수배 중인 사이비 종교의 본거지가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있다니……. 이건 이거대로 놀랍군.’
그런데도 그들을 잡지 이유가 있었던 건가 싶어서 재언은 건물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다 건물에 걸린 ‘교회’라는 글자에 식은땀을 흘리며 건조한 미소를 지었다.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종교들이 종파를 교회로 속이고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듣긴 했는데, 그게 진짜일 줄은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다.
7층짜리 건물 전체가 어머니교 소유라고 했으니 소수의 신도만으로도 돈벌이가 심심치 않은 모양이다. 하긴, 위험한 능력자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떼거리로 모여 있는 데다 교주 또한 무시무시한 능력자인데 범죄 조직과 연결되어 돈을 벌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 아버지. 건물 전체에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재미있군요… 제 능력과 비슷합니다.
엔레이드맨의 둠(doom)처럼 현실과 결계 안쪽이 다르게 보이는 능력인가 보다. 그러니 서울 한복판에 본거지를 세워도 히어로 협회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지.
확실히 겉으로는 그럴듯한 교회 건물에 심지어 2, 3층은 평범한 예배당으로 보였다.
- 낮에는 평범하게 교회로 운영 중이랍니다. 어머니교는 밤에 활동하는 종교고요.
무선 이어폰으로 들리는 이레일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는 언럭키 네임리스를 데리고 교회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러자 건물 안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성이 한 명 밖으로 나왔다.
로브 때문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그 사이로 드러난 붉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로브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사진과 신재언, 언럭키 네임리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라?’
재언은 그녀에게서 자식들이 가졌던 것과 비슷한 증오를 느꼈다.
이윽고 사진에서 눈을 뗀 그녀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작게 손짓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온 두 사람에게 그녀가 투덜거리듯 속삭였다.
“…이레일 팀장이 보냈습니까?”
“네.”
“부부로 위장하고 온다고 해서 겨우 얼굴을 익혀 놨더니 들어오기 직전에 사람을 바꾸다니……!”
그렇게 말한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커튼을 젖히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며 안쪽으로 온통 붉은빛의 공간이 두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저곳이 바로 엔레이드맨이 말했던 결계 안쪽인 듯했다.
“저는 어머니교가 괴멸할 때까지 꼬리를 밟힐 수 없습니다. 여기 들어가는 것까진 도와드리겠으나 그 후에는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할 거예요. 아시겠어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은 그녀는 후다닥 뛰어 들어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재언은 허망하게 지켜보다가 간신히 열린 결계가 닫힐까 싶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혹여라도 재언이 말을 걸까 봐 다급하게 도망치는 게 빤히 보여서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교 본거지에 잠입한 뒤 하늘을 올려다보면 교주가 쳐 놓은 결계가 보일 겁니다.”
언럭키 네임리스와 함께 결계 안으로 들어온 재언은 차민재의 말을 떠올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평소에 보는 것과는 달리 거대하고 붉은색이었으며 표면의 반을 차지한 눈이 너무나도 괴기스러웠다. 마치 지나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거기다가 달의 양쪽으로 하늘에 그어진 붉은색 선은 이전에 봤던 교주의 능력과 똑같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눈과 마주칠까 무서워진 재언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서 있는 언럭키 네임리스를 쳐다봤다.
“언럭키 네임리스. 여기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러자 그가 고개만 돌려 힘없이 중얼거렸다.
“태우…라고 불러도 돼.”
“…이름을 부르면 저주받지 않아요?”
“당신은 괜찮아. 그들은 당신을 아주 사랑하고 있어.”
그때, 차민재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재언의 귀에 꽂혔다.
- 재언 씨, 그에게 닿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들은 현실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들이니까 당신을 인식하게 된다면 잡으려고 할 겁니다. ‘그때’처럼요.
그 말에 무심코 언럭키 네임리스의 손이 뻗어오는 걸 보고만 있던 재언이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상처받았을까 봐 살짝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무덤덤한 얼굴로 신재언의 옆을 지나칠 뿐이었다.
그의 뒤를 쫓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재언은 하늘에 뜬 붉은 달에 힐끔 눈길을 주다가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좀 찝찝한걸. 이레일은 이쪽에 잠입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인데, 너무 쉽게 들어왔어. 그리고 잠입했다는 저 여자는 다른 교단원들하고 옷이 달라……. 교단주쯤 되는 건가?’
하긴 아무리 사이비 종교라도 쉽게 입단이 가능했다면 정부에서 이 정도로 어머니교의 꼬리를 잡는 일에 힘들어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교 내에서 그녀가 가진 입김이 나름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피어오를 듯한 그녀의 증오는 가족을 죽인 원수들 사이에서 이를 악 물고 버틸 정도로 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