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피비린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의 앞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넓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재언은 사방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에 깜짝 놀랄 틈도 없이 복도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는 언럭키 네임리스의 뒤를 허둥지둥 쫓아야 했다.
이곳은 피비린내도 그렇고 복도 벽에 걸린 그림들조차도 하나같이 기괴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득한 얼굴들 사이로 흰 손이 튀어나와 있거나 잘린 목을 들고 서 있는 검은색 그림자 같은 끔찍한 광경들뿐이었다.
그림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신재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좋은 그림이죠? 이번에 새로 오셨나 봐요.”
부드러운 목소리.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앞집 교회에 잠깐 구경 온 사람에게 가벼운 대화를 거는 줄 알겠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재언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그녀의 목소리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가 유명인사인 것도 있지만… 어머니교 교단복을 입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사람이 바로 차민재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유명 여배우 이민정은 50대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천재적인 연기실력과 우아한 분위기를 타고난 덕에 젊었을 때부터 안방 드라마의 여주인공부터 천만 관객의 영화까지 두루두루 출연하며 인지도를 쌓아왔다.
현재는 거기에 더해 세계 최고의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의 어머니라는 명성까지 더해져 대한민국에서 인지도와 관련하여 그녀를 따라올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어머니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본거지에서 능청맞게 다른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는단 말인가.
- 신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재언이 기겁해서 입을 다문 사이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이레일이 다급하게 물어 왔다. 하지만 재언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차마 레헬의 어머니가 어머니교 신도라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민정의 목소리가 무선 이어폰에 담기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 건가 싶었다.
재언이 무어라 할 말을 잃고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자 그런 시선에는 익숙한지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많은 분이 이곳에서 저를 보고 놀라곤 하죠. 그래도 우리는 어머니 앞에서 평등한 존재. 잘 지내봐요. 이제부터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눈앞에 내밀어진 이민정의 손을 마주 잡고 살짝 흔드는 동안 재언은 흔들리는 동공을 결국 숨기지 못했다. 가면을 썼다 해도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그녀 앞에서 의연한 표정을 짓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재언과 악수를 끝낸 그녀는 복도 끝에 있는 예배실 안으로 들어가며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중년 남성의 손을 잡았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재언은 무심결에 남성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을 떡 벌렸다.
그는 바로 차민재의 친아버지인 차의열 소장이었다. 1세대 히어로라 불리며 능력자인 그는 현재 히어로를 은퇴하고 히어로 협회에서 소장 직위를 맡은 유명인사였다.
사실 그의 유명세에는 히어로인 것도 한몫하지만 영화로 남겨질 정도로 로맨틱한 배우 아내와의 연애 스토리가 가장 유명했다.
이민정이 젊었을 적에 스토커에게 시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스토커가 골치 아프게도 능력자였다. 그것도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면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한동안 스토커 때문에 고생하는 그녀를 현역 히어로였던 차의열이 보호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민정이라는 이름은 예명이었고 그날 이후로 그녀의 본명은 극비에 부쳐져 가족들이나 소속사 사장 외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아서 큰 화를 피했다.
그건 그렇고 지명수배가 되어 있는 어머니교에 전직 히어로이자 현재 히어로 협회 소장과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배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게 맞을까. 만약 저 사람들이 잡히기라도 하면 차민재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본거지가 결계로 꼭꼭 숨어 있으니 히어로 협회에서도 꼬리를 잡지 못했던 거겠지……. 차민재는 자기 부모님이 어머니교 신도라는 걸 알고 있을까?’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
이레일의 설명에 의하면 어머니교는 신도들을 교단원, 그보다 높은 급은 교단주, 그리고 가장 우두머리는 교주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배당에 모인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검은색 로브는 교단복이라 불렀다. 어두침침한 로브를 쓰고 모여 있으니 정말로 어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사이비 종교 그 자체였다.
꽤 넓다고 생각했는데 못해도 100명은 거뜬히 넘어 보일 듯한 인원이 예배당 안에 가득했다. 이런 정신 나간 사이비 종교가 어떻게 신도들을 이만큼이나 모았는지 궁금해졌다.
아직까지 이레일에게 이렇다 할 지시사항이 없었기에 재언은 주변을 돌아보며 서예림이 어디에 있을지 파악하기로 했다.
“태우 씨. 지금은 조심히 움직여… 태우 씨?”
재언이 뒤를 돌아보며 언럭키 네임리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분명히 방금까지 뒤를 졸졸 쫓아오던 비쩍 마른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건지 의아해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그는 예배당 입구 옆쪽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
재언은 언럭키 네임리스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계단 아래쪽에 지하로 향하는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계가 걸려 있는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미세한 공간의 균열이 보였다.
계단 아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탓에 재언은 보지 못하고 지나간 걸 그가 귀신같이 잡아낸 것이다.
“수상하네요……. 들어가 봅시다.”
그전에 먼저 엔레이드맨에게 지하실을 조사해 오라고 명령하려고 하는 순간, 두 사람 뒤쪽에서 불쾌하다는 듯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뭣들 하는 겁니까. 당신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단정하고 지적으로 생긴 지긋한 나이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가 아니고 대학에서 교단에 올라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폴폴 풍겼다.
“길을 잘못 들어서요.”
재언이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내뱉은 대답에 중년 사내는 수상쩍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다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이번에 교단주님 추천으로 새로운 교단원이 온다고 하던데 당신들입니까? 내가 충고하는데 여긴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그러다 교주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당신은 새로운 낙원으로도 가지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곧 예배가 시작되니 어서 자리로 돌아가세요. 교주님께서 이 광경을 보셨을까 매우 두렵군요.”
보는 눈이 많기에 여기서 괜히 이목을 집중시켜 봤자 좋은 것이 없었다. 재언은 중년 남성의 말에도 아무 말 없이 퀭한 눈으로 자신과 중년 남성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하는 언럭키 네임리스를 이끌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무엇을 흉내 내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예배당이라 불리는 곳은 예배를 위한 공간치고는 지나치게 어둡고 우울했다. 그것만 빼면 완벽하게 교회 예배실 같았다.
그런데 교회와는 교리가 매우 달랐다. 교주는 세상 만물이 어머니의 뜻에서 나오며 자신이 세상을 파괴하는 아버지의 대리인이라는 해괴망측한 교리를 전파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괴상한 논리로 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꼬여 냈는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레드-헬-파이어의 부모로 유명한 히어로 협회 소장과 유명 여배우까지. 레헬의 사무실 소속 스파이 히어로는 이 사실을 이레일에게 알렸을지 궁금해졌다.
“우리 새로운 형제들을 맞이하기 전. 우리들의 어머니께서 신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세상은 곧 혼돈으로 차오르고 무고한 사람들이 비통에 찬 절규를 내뱉을 것이다. 오로지 나를 따르고 섬긴다면 다른 세상에서 낙원에 이를 수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따르라…….”
얼떨결에 예배당의 맨 앞자리에 앉아 버린 재언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나 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예배를 경청했다. 교주 대리인이라는 남성이 교단에 서서 교주가 내린 말씀을 전한다며 경건한 말투로 예배를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예배 내용을 듣던 신재언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변했다. 신의 뜻에 거스른 다른 세계는 이미 멸망했으며 이곳 역시 언젠간 위대하신 그분의 심판 위에 서게 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내용이었다.
신재언의 미묘한 표정이 가면을 넘어서 드러나 버렸는지 옆에 앉아 있던 교단원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고 저희는 항상 같은 환각을 봐 왔습니다. 지금 세상은 교주님을 의심하고 있으나 우리는 더 좋은 낙원의 세계를 찾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말을 이어 가는 동안 감정이 격해졌는지 교단원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른 세계에서 신은 화를 내시며 기회를 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교주님 덕에 분명 더 나은 낙원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 교단원의 얼굴을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유명한 범죄 심리학자였다. 나이는 50대가 넘어가지만 정정한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서울의 유명한 모 대학교 범죄심리학 교수이기도 하며 범죄자 프로파일링을 주제로 다루는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해 재언이 알 정도로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범죄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추리해 내고 사건의 동기를 알아내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약을 펼친 덕분에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이런 사이비 종교에서 광신도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일까.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건…….
“분명 그곳은 신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곳이었겠죠. 아아, 다행입니다. 우리에겐 교주님이 계시고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알려 주시니 심기를 거스를 일도 없고…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교주님! 교주님!”
그 모습에 신재언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분’이라는 게 설마 ‘나’는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