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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75화 (175/324)

175화

예배나 미사도 아니고 하물며 논리적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닌 교주 대리인의 지루한 말씀이 끝나 가고 있었다.

‘저쪽에 앉아 있는 건 국회의원 아닌가?’

잠깐 고개를 돌리자 바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재언은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놀랐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국회의원의 옆에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xx도지사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어머니교를 사회 부적응자들이나 과격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그저 그런 집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정·재계 쪽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유명인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히어로 협회나 경찰에서 잡으려고 해도 잡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 듯했다. 내부에서 바가지가 새고 있었다.

‘쯧쯧, 말세네 말세야.’

예배가 완전히 끝나고 혹시 교주가 등장하진 않을까 주변을 살피며 긴장했지만, 교주 대리가 예배실을 나갈 때까지도 교주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교의 이상한 교리만 듣고 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보냈다고 생각한 재언이 언럭키 네임리스를 일으켜 세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범죄 심리학 교수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교주님께서 구제하실 수 있는 사람은 150명으로 한정되어 있기에 신도들의 수는 항상 일정하지요. 한동안 공석이 없었는데 지금 들어온 당신들은 정말 운이 좋은 편이에요. 능력자라면 교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활동할 수 있으니 교단주로 올라가는 것도 시간문제랍니다.”

그러자 새로 온 신도에 대한 호기심인지 재언의 주변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다른 교단원들이 몰려들었다.

“히어로, 경찰, 국회의원, 연예인 할 것 없이 사회에 많은 헌신을 하는 분들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답니다.”

그의 말에 재언은 한 가지 확실하게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자신과 언럭키 네임리스가 이곳에 교단원으로서 숨어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번에 죽은 질퍽이 남자와 B급 히어로 섬광의 블레이드 덕분에 자리가 남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전도를 목적으로 여학생 두 명을 납치하려 한 건 아니로군.’

그리고 그전에는 도통 자리가 나지 않았단 것도 말이다.

“물론… 교주님의 충고를 무시하고 우리 어머니교에 흠집을 내거나 배신하는 교단원들에게 교주님께서 직접 철퇴를 내리시지만, 약간의 조심하기만 하면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당신들을 추천한 교단주님께서는 교주님의 신뢰도 두텁고 우리 사이에서도 신앙심이 굳세 바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짧은 시간 지하에서 믿음을 증명하셨어야 할 텐데.”

“이렇게 의례적으로 들어온 분들이 몇 계시긴 하죠.”

그들의 시선이 레헬의 부모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부드러운 말투로 주의를 주듯 강하게 한 마디 남긴 교수는 친목이라도 다지려는 듯 다른 교단원들을 이끌고 둘에게서 멀어졌다.

어쨌든 레헬의 사무실에서 잠입했던 빨간 머리의 여성은 교단주가 맞았고, 교주에게 제법 신뢰받는 인물인가 보다.

‘가족이 어머니교에 모두 살해당했다고 했나?’

재언이 느끼기에 그녀가 어머니교에 가진 살의는 진심이었다. 그 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예배가 시작되자마자 이레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외부와의 교신을 방해하는 전파가 흐르거나 능력이 발동된 듯했다.

유명한 정·재계 인사들이나 배우들마저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는데 아무런 방해 장치가 없을 리 없었다. 결계 규모나 능력을 따지면 엔레이드맨보다 실력이 비슷하거나 살짝 하위가 아닌가 싶었다.

아직도 거대한 눈을 깜박이며 하늘에 떠 있는 붉은색 보름달이 능력의 실마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재언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예배당을 벗어나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슬그머니 지하로 내려갔다.

“태우 씨, 지하로 가는 입구에 자물쇠가 걸려 있던데… 혹시 무슨 방법 없습니까?”

계단을 내려가면서 옆에서 따라오는 언럭키 네임리스에게 물었다.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엔레이드맨을 시킬 생각이었다.

멍하니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언럭키 네임리스는 지하실로 가는 문 앞에 설 때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면을 썼으니 혈색이 좋아 보여야 하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 때문인가, 이상하게 굉장히 위태로운 느낌을 주었다.

기다리다 못한 재언이 입을 열기 직전, 그가 손을 뻗어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희미하게 회색빛 도는 촉수 같은 것이 그의 주변에서 튀어나와 자물쇠 구멍으로 들어갔다.

진짜 촉수는 아니고 그의 온몸에 감겨 있는 괴생명체의 흔적이 아닐까 싶었다. 이윽고 찰칵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풀리며 언럭키 네임리스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비틀거렸다.

재언이 깜짝 놀라 그를 부축하려고 팔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그에게 닿아서 그들에게 존재가 알려질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평행세계’에서의 기억이 없었을 때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인간보다 ‘상위급 존재’들에게 사랑받는단 저주가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재언이 속으로 끙끙거리는 사이 언럭키 네임리스는 가면 너머로도 티가 날 만큼 창백한 안색으로 변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주변에 사람은 없었죠? 사람들이 아직 예배당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기까지 내려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조금 이상한데…….”

재언은 작게 중얼거리며 지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은 지하실 쪽으로 내려오는 인적이 느껴지진 않지만, 혹시라도 지나가다가 풀려 있는 자물쇠를 보면 곤란하기에 엔레이드맨에게 자물쇠를 다시 잠그라고 신호를 준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계단으로 내려가자 양옆으로 문이 있는 게 느껴졌다. 안쪽으로 복도가 이어지는 것 같지만 너무 어두워서 벽 쪽을 더듬거리며 짚다가 실수로 스위치를 눌러 버리고 말았다.

“핫…….”

순식간에 복도 위쪽으로 형광등이 차례대로 켜지며 사방이 환하게 비쳤다. 재언이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사이 상태가 더 나빠진 듯 언럭키 네임리스가 주저앉으며 신음을 흘렸다.

안쪽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소란을 들을까 얼른 스위치를 눌러 복도의 불을 끈 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은 걸 확인한 재언이 언럭키 네임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태우 씨, 괜찮습니까?”

“머리가 아파……. 난, 여길 기억하고 있어.”

“네?”

“으윽…….”

무언가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언럭키 네임리스는 재언의 물음에도 미약하게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릴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재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잡고 부축해 일어났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 방은 어두웠지만, 원룸 형식의 집으로 꾸며져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3평이 안 되는 공간에 침대, 장롱, 싱크대와 냉장고까지 갖춰져 있는 원룸이었다.

언럭키 네임리스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순간, 재언은 거대한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다잡고 보니 거대한 25개의 그림자가 사방에서 신재언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직접 마주치기라도 하면 영혼에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저 그림자들이 바로 인간의 ‘상위급 존재’들, 통칭 그레이트 올드 원(Great Old Ones)이라는 명칭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눈이 수백, 수천 개이기도 하며, 혹은 아예 없기도 했다.

손이나 발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원히 깨지 않는 멸망의 잠을 자는 존재, 인간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들이었다.

재언은 이런 놈들에게 시비를 거는 인간 차민재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 존재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기 전에 얼른 언럭키 네임리스의 어깨 위에서 손을 치웠다.

그런데 이번엔 어두운 방 안으로 시야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살려 주세요. 아악! 구, 구급차 좀…….’

이제 막 열세 살 정도 되었을까. 가족을 잃고 저주받은 아이로 살아가던 언럭키 네임리스가 방금까지 있었던 지하실과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 복도에서 무언가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열세 살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는 연약한 체구를 가진 그의 앞에는 피가 섞인 양수가 터진 임산부가 부른 배를 붙잡은 채 아파트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작스러운 복통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듯했다.

‘핸드폰이 주머니에 있는데… 도저히,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제발, 구급차에 연락을…….’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가던 여성은 점점 복통이 심해지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계속 방치했다간 산모와 아이 모두가 위험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열세 살의 언럭키 네임리스가 머뭇거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누구, 다른 정상적인 사람이 도와줄 수 없을까 기대했지만, 복도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산모가 세 번째 신음을 삼키는 소리에 소년은 떨리는 손을 그녀를 향해 뻗었다.

저주받을 거야.

내 몸에 손을 댔으니 고독을 사랑하는 ‘상위급 존재’들은 고들을 저주할 것이다. 자신이 구급차를 불러봤자 몸이 닿았으니 아이도 산모도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의 조각이 남아 있었는지 소년 언럭키 네임리스는 울면서 산모에게 거듭 사과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당신과 아이는 죽을 거예요. 나 때문에 죽을 거라고요…….’

그럼에도 소년은 산모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119에 전화해 주소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저주를 두려워하며 후회하는 마음으로 벌벌 떨었다.

하지만 구급대원이 도착할 때까지도 정신을 잃은 산모에게 불행한 일은 닥치지 않았고, 구급차 또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그래도 언럭키 네임리스는 언젠가 그들에게 저주가 내려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죄책감에 빠져 살아갔다. 그런 이유로 히어로 협회에서 그에게 히어로를 권유했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이 히어로가 될 수 없다고 여겨 거절했다.

그렇게 피가 마르는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어느 날 조리원에서 퇴원한 여성 한 명이 아주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복도에서 언럭키 네임리스와 마주친 그녀는 그때의 소년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예림아… 여기 히어로 오빠가 있네. 그땐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남편도 감사하다고 인사하겠다고 돌아다녔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다고 했었거든.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애도 나도 위험할 뻔했다고 하더구나. 정말 고맙단다.’

그녀는 소년에게 허리를 조금 숙여 품에 안은 아이를 슬쩍 보여 주었다. ‘저주’ 받은 자신이 생에 처음으로 구해 준 아이였다.

‘자기를 구해 준 건 아주 멋진 히어로 오빠였다고… 예림이한테 꼭 말해 줄 테니까. 언제 한번 우리 집에 놀러 와 줄래? 여기 아파트에 사는 애니? 이름은 뭐야?’

히어로.

내가 구해 준… 애.

나는…

소년, 언럭키 네임리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앳된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된 재언은 놀란 얼굴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언럭키 네임리스의 어깨에서 손을 뗀 덕분에 우주를 떠도는 것처럼 메슥거렸던 느낌이 사라졌다.

이윽고 정적으로 가득한 어두운 방 안이 눈앞에 나타났다.

자신과 아이를 구해 주어서 고맙다고 웃는 얼굴이 낯익었던 이유가 있었다. 실종된 딸을 애타게 찾으며 전단을 나눠 주던 중년 여성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언럭키 네임리스가 어렸을 적에 구해 주었던 아이, 서예림이 그가 찾던 마음의 조각 중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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