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언럭키 네임리스는 몰려 들어오는 기억에 머리가 아픈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재언은 언제나 무감각하고 피곤해하는 표정만 짓던 언럭키 네임리스의 희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떠올리며 죄책감이 섞인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신이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 때문에 그에게 기구한 운명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때, 재언이 끼고 있던 무선 이어폰에서 치지직거리는 기계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레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님… …선생님. 신 선생님. 들리십니까?
“이레일. 내 말 들려요?”
- 아! 이제야 연결되었네요. 예배당으로 들어간다는 보고를 받고부터 계속 전파가 먹통이었어요. 지금은 어디십니까? 서예림 학생은 발견하셨나요?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해 답답하고 초조했는지 이레일이 쉬지도 않고 다다다다 질문해 왔다. 일단 언럭키 네임리스를 눕힐 곳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차근차근 하나씩 설명했다.
“예배당에 갔다가 지하로 가는 계단을 발견해서 내려왔어요. 자물쇠가 걸려 있었는데 언럭키 네임리스 덕분에 쉽게 풀 수 있었고요. 들키진 않았지만 조금 소란이 있어서 불안하긴 한데……. 아직 누군가가 내려오는 기척은 없어요.”
말을 이어 가며 신재언이 손가락을 튕기자 엔레이드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언럭키 네임리스를 내려다봤지만 위대하신 아버지의 명령에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그게 설령 눈엣가시 같은 히어로를 구해 주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이윽고 언럭키 네임리스와 엔레이드맨의 모습이 사라졌다.
당분간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으니 둠(doom) 속에 넣어 데리고 다니다가 정신을 차린다 싶으면 빼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아직 서예림 학생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지하에 문이 굉장히 많은데…….”
재언은 잠시 말을 끊고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인 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곳… 언럭키 네임리스가 어릴 적에 히어로 협회에서 준비해 줬던 복도식 아파트와 구조가 굉장히 비슷합니다. 그는 그때 서예림 학생을 임신 중이었던 임산부를 구해 준 적이 있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뒤 재언은 입을 다물고 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언럭키 네임리스가 쓰러지면서 생긴 작은 소란에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하로 내려오진 않을지 경계해야 했다.
체감상 5분 정도가 지나고도 위쪽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재언은 안심하며 밖으로 슬그머니 나왔다. 그리고 일단 가장 가까운 맞은편 문을 열고 안쪽을 살폈다.
평범한 시민이 결계로 숨겨진 사이비 종교의 지하에 들어가 조사하고 다닌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누가 이런 경험을 쉽게 겪을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이 그저 평범한 시민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첫 번째 방을 조사하고 나오자 그다음 방으로 향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느 방은 생활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었고, 다른 어떤 방은 텅 비어 있기도 했다.
중요한 건 어떤 방도 잠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자물쇠로 잠겨 있긴 해도 누군가를 가두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말 주거공간으로 활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단원들이 머무는 숙소 같은 곳일까 싶다가도 아까 예배실에서 봤던 어머니교 교단원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쟁쟁한 사람들이라는 걸 떠올렸다. 돈, 명예, 사회적 지위를 골고루 가지고 있는 이들이 이런 지하 원룸에서 지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맞다. 이레일에게 히어로 협회 소장과 그 배우자가 교단원이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그런데 여기가 바티칸도 아니고 사이비 종교라고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한국에서 어머니교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범죄가 되나?’
이곳을 나가서 보고 들은 것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몇 명의 과격파 교단주들이 지명수배인 거지 종교 자체가 범죄인 건 아니잖아. 그런데 애를 납치했으니 범죄 조직이 된 건가.’
일단 무엇이든 알아내고 보자는 심정으로 방 곳곳을 살피는 재언에게 엔레이드맨이 말을 걸었다.
- 위대하신 아버지.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립니다.
“어디? 여기?”
- 네. 그런데 이 남자… 곧 깰 것 같군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엔레이드맨은 언럭키 네임리스를 자신의 둠(doom) 밖으로 오물을 뱉듯 휙 하고 던져 버렸다.
다치진 않았지만, 바닥에 나동그라진 언럭키 네임리스는 엔레이드맨의 말대로 몇 번 신음을 흘리더니 눈을 떴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 오한이 드는 듯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둠(doom) 안으로 들어가기 전보다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태우 씨, 괜찮습니까?”
“…응.”
그가 떨리는 몸을 일으켜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여긴…….”
“태우 씨가 기절하고 나름 주변을 돌아다녀 봤어요. 따로 잠긴 방은 없었고 안은 전부 비슷한 구조의 원룸 같은 방이 있더라고요. 지하라고 해서 감옥이나 감금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까지 지하를 돌아다니며 알아낸 내용을 말해 주며 방금 막 들어가려고 했던 방의 문을 열었다. 이쪽은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이 더욱 뚜렷하게 나왔다.
콘센트에는 핸드폰 충전기가 꽂혀 있었고, 냉장고는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중이었다. 싱크대 쪽에는 밥그릇과 국그릇, 접시 하나가 건조대 안에 놓여 있었다. 수저통 안에서 반짝이는 식기들이 금방이라도 방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했다.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저 맞은편 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는데,”
“머리가 아팠어……. 그들이 계속 내게 말을 걸었거든… 당신을 알고 있는 눈치였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그의 말에 재언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인간들을 구분해 내진 못해……. 당신은 오늘 지나가는 개미와 어제 봤던 개미를 구별할 수 있어? 그런 거야… 개미 사이에 특별한 존재가 끼어 있지 않은 이상 그 개미 하나를 기억할 수 있겠냐고.”
비유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레드 헬 파이어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만지고 내 이름을 불러도 저주받지 않아. 그때부터 난,”
“쉿. 언럭키 네임리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 신재언은 언럭키 네임리스의 말을 끊고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잠깐 말없이 눈만 마주하던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켜 엔레이드맨이 알려 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지 않은 문이 쉽게 열리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 눈에 들어왔다. 재언은 핸드폰을 들어 플래시를 켜 더욱 자세히 살피던 중 무언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엔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이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듯한 학생을 똑바로 눕히고 사진으로 봤던 서예림의 얼굴과 대조해 확인한 후 귓가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레일. 이레일, 들려요?”
- 네, 신 선생님. 지금은 잘 들립니다.
“서예림 학생을 찾은 것 같습니다. 외상은 없어 보이고 숨도 쉬고 있어요.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걸 보면 기절한 모양이에요.”
재언은 아무리 흔들어 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서예림을 등에 업고 언럭키 네임리스와 함께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들이 대체 왜 서예림과 안혜지 학생을 납치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신도 수가 항상 일정하다는 말을 들어보면 신도로 들일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 서예림 학생을 찾아서 나가는 중입니다.”
- 네, 신 선생님… 이쪽도 곧 결계가 파괴될 겁니다!
쾅!
이레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들린 큰소리에 재언이 깜짝 놀라 천장을 쳐다봤다.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진동에 불을 켠 것도 아닌데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아무래도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재언은 서예림을 고쳐 업으며 달리는 속도를 더욱 빨리했다.
위층에서는 신도들이 비명 지르며 우왕좌왕 뛰어다니느라 지하에서 올라오는 재언을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다.
“결계가 깨진다!”
교단원 중 한 명이 경악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붉은 달이 떠 있는 하늘에 점점 검은색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엔레이드맨이 몸서리를 치며 짜증 내는 듯 신음을 흘리는 게 재언의 귀에 들렸다. 엔레이드맨의 둠 또한 레드-헬-파이어에 의해 저런 식으로 무식하게 박살이 나 버린 적이 있었다.
결계 능력자들의 결계는 능력자 본인의 힘이 다하거나 의지로 허무는 것이 아니면 보통의 물리적인 힘으로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그걸 재언도 잘 알기에 충분히 엔레이드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드-헬-파이어라는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결계 능력자들은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줄곧 유지해 왔으니까 말이다.
“이리 오세요! 이쪽으로 대피하세요!”
이런 상황에 대한 교육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아까 단상에 올라가 예배를 진행했던 교주 대리가 나타나 소리치며 신도들의 대피를 도왔다.
다른 무엇보다 이번 잠입은 납치된 학생의 구출을 위한 것이니만큼 재언도 다른 용건은 나중에 해결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우선하기로 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서예림을 잠시 벽 쪽으로 기대어 내려놓은 뒤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고 다시 업었다.
대피하는 사람들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오자 맞이한 풍경에 재언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을 몸소 체감했다. 하늘에서 붉은 달의 조각이 떨어지면서 레헬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에 재언은 쉬지 않고 발을 놀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눈동자를 굴려 차민재의 부모님을 찾았다. 다행인지 멀리서도 눈에 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사실 부모가 자식 손에 잡혀가는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건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구조대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이레일이 재언을 보자마자 밴 문을 벌컥 열었다.
“신 선생님! 해내셨군요!”
이레일의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넓은 의자에 서예림을 눕힌 재언은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사이비 종교에 잠입한 자신과 언럭키 네임리스, 납치된 서예림까지 다친 데 없이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으니 무엇보다도 다행이지만 말이다.
‘…정말 찝찝하네.’
재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들어 점차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7층 건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찝찝했다. 마치 신재언이 어머니교 신도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지하에 내려가 서예림을 구할 수 있도록 완벽히 짜인 판에서 놀아난 느낌이었다.
그 순간, 재언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처럼 기절해 있던 서예림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마치 우주를 눈에 담은 것처럼 홍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검게 물든 눈 안에서 작은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 순간적으로 본 광경에 화들짝 놀란 재언이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서예림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방금 목격했던 기괴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서예림은 어느새 겁에 질린 학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저씨들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