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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77화 (177/324)

177화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겁에 질린 듯 뒤쪽으로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그녀의 모습에 멍하니 서 있던 이레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히어로들이고 너를 구하기 위해 왔단다. 네가 납치되었던 건 기억하고 있니?”

이레일의 설명에도 서예림은 눈앞의 낯선 어른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언럭키 네임리스가 가면을 벗으며 서예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동안 상당히 답답했는지 창백한 그의 얼굴에 홍조가 살짝 깃들었다. 그제야 가면의 존재를 깨달은 재언이 자신의 얼굴에 쓴 것을 벗던 중, 서예림이 몸을 일으켜 언럭키 네임리스의 등 뒤에 숨어 버렸다.

그 모습에 이레일은 무척 당황한 얼굴로 허둥댔다. 하지만 성실하고 남에게 모질지 못한 성품 때문에 차마 그가 저주받았으며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언럭키 네임리스 앞에 대고 소리치지 못했다.

그저 언럭키 네임리스만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온 서예림에게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요즘… 계속 머리가 아팠단 말이에요. 분명 아침에 학교에 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녁이 돼 버렸어요.”

“학생, 괜찮아요?”

이레일이 그녀를 달래려고 한 걸음 다가갔지만, 그녀는 오히려 겁에 질려 언럭키 네임리스의 뒤로 더욱 꼭꼭 숨어 버릴 뿐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계속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누가 계속 기도를 하고 있어요. 제 귓가에 계속… 계속,”

“이레일. 저 학생,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병원에 먼저 데려가죠.”

잠시 고민하던 이레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재언은 다른 히어로들과 함께 밴에서 내렸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밴을 잠시 쳐다보다가 레헬이 신나게 부수던 결계 안쪽의 건물을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7층 건물일 뿐, 사람을 납치하고 이상한 짓을 벌이는 사이비 종교의 본거지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잠시 후, 레헬이 땅으로 내려와 덩그러니 혼자 서 있는 재언에게 다가왔다.

“재언 씨, 어디 다친 덴 없어요?”

“네. 딱 타이밍 좋게 민재 씨가 난동 부려 준 덕분에 무사히 예림 학생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어요.”

밴이 사라진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언이 덧붙였다.

“예림 학생의 상태가 나빠 보여서 병원에 먼저 가도록 했어요. 저는 이제 택시 타고 집에 가려는데 민재 씨는요?”

“바퀴벌레처럼 우수수 흩어진 저 사이비 종교 놈들을 잡아 처넣고 가려고요.”

어머니교를 대하는 차민재의 태도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바퀴벌레 속에 자신의 부모가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평소의 재언이라면 사이비 종교를 향해 온갖 욕을 퍼부으며 미성년자 납치범으로 모조리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차민재를 생각하면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안에 들어가서 봤을 때 거기 사람들은 제게 일부러 얼굴을 보여 준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함정이었을 수도 있어요……. 제법 유명한 정·재계 사람이나 얼굴이 익숙한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재언은 지금까지 가졌던 의문을 차민재에게 꺼내 보였다.

“그런데 미성년자 납치를 교주와 교단주끼리만 꾸몄던 거라면, 그 아래 신도들은 같은 범죄자일까요?”

재언의 물음에 차민재가 잠시 생각하더니 역으로 물어왔다.

“4년 전에 지하철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사이비 종교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다. 뉴스에도 크게 다룬 적이 있었고 사상자를 12명이나 낸 폭동이었다.

동기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범인들은 지하철 내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나마 히어로들이 재빠르게 나서서 시민들을 구조했기에 사상자가 적은 거라고 했다.

“그 사건에서 불을 지른 신도들은 잡혀가고 해당 종교는 그대로 없어졌습니다만, 교주만은 잡혀가지 않고 다른 종교를 만들었고 그게 어머니교라더군요.”

“어딜 가든 폭동을 일으키려는 사람인 거네요. 도대체 왜…….”

“제가 알아본 바론 선천적으로 예지몽을 꾸는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최근 능력을 각성했는지 제법 큰 힘을 부리고 다니는 모양이에요.”

선천적인 능력. 그건 능력자로 분류되지 않는 능력이었다. 예를 들면 귀신들의 성녀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귀신을 보는 힘은 능력자로서의 능력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 더 깊게 들어가면 복잡해지지만 요약하자면 각성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차민재의 설명에 재언은 어머니교 교주가 최근에 능력을 각성한 거라면 왠지 마약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교주가 그런 무시무시한 능력을 얻은 것에 자신이 일조한 셈이다.

“…골치 아프네요.”

사이비 종교와 이탈리아 마피아가 무슨 이해관계를 가지고 손을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둘 다 헛된 믿음으로 똘똘 뭉친 위험한 사상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가진 듯하다.

“민재 씨, 지금 와서 묻는 것도 우습지만, 이쪽 세계에서까지도 저를 따르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은 이제 히어로잖아요. 굳이 제 부하라고 자처할 이유가 없어요.”

그에 차민재는 한참 동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재언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재언 씨는 기억이 다 돌아온 게 아닌가 봅니다. 가장 중요한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사실 재언은 ‘평행 세계’를 멸망시켰다는 기억은 있지만, 아직도 차민재에 관한 것만은 의문투성이였다.

아는 거라곤 그쪽 세계의 자신과 차민재의 마지막이 썩 좋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 인간성도 버리고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커다란 활약을 펼친 차민재를 살해해 세상을 향한 복수를 완성했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어중간한 기억은 찝찝함과 궁금증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사장님! 이쪽에 어머니교 교단원들을 찾아냈습니다! 여기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아까 재언과 함께 밴에서 내렸던 일루미네이션 김수영이 근처 골목에서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도착한 골목 안에서는 처참한 모습으로 버려진 시체 세 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도망치면서 덜미가 잡힌 어머니교 교단원들인데, 잡히자마자 갑자기 피를 토하며 사망했습니다. 입 안에 독이 없는 걸로 보아 교단주들 중 독에 능통한 능력자가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 얼굴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시신들의 얼굴을 확인한 재언은 깜짝 놀라 몸을 흠칫했다. 시신 중 한 사람은 예배당에서 신재언의 옆에 앉았던 범죄 심리학자 교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유명한 교수에 이쪽은 형사입니다. 둘 다 TV에 자주 출연해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는데…….”

말을 이 어가며 김수영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골목은 가로등도 없어서 어두워야 하는데 그녀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빛이 밝은 조명이 되어 어두운 골목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특히 힘을 집중시키고 있는 검지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식으로 쓸 수 있으니 A급 능력자겠지만, 재언은 어두운 밤 골목 안에서는 무척 유용한 능력인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다.

“서예림 학생도 무슨 독을 주입받았을지 모르니 병원에 가서 면밀히 조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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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이레일에게서 서예림의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단기 기억상실인지 이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단 말을 전해 들었다. 수요일마다 귀가가 늦었던 것도, 납치되었던 것도, 최근에 이상행동을 보였던 것까지 기억나지 않는단 말만 반복했다.

재언은 그날 서예림이 눈을 뜬 직후에 봤던 기괴한 모습을 전하며 이레일에게 주의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러자 이레일이 핸드폰 너머로 발랄하게 대답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신 선생님, 그거 알고 계셨습니까? 예림 학생은 각성 전 능력자였더군요. 놀라운 건 그녀의 능력이 각성할 때까지 언럭키 네임리스가 후견을 맡아 주기로 했다는 겁니다. 어머니교에서 예림 학생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저희도 예림 학생을 납치한 이유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알바에 복귀한 안규리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동생도, 동생 친구도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오전 내내 밀려오는 업무에 찌들어 있다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흡연실에 들른 재언은 서예림을 구한 그날, 집 앞에서 마주친 어떤 사내를 떠올렸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레드 헬 파이어는 아니었고 서예림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던 언럭키 네임리스였다. 그는 신재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창백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다.

하염없이 바닥만 보고 있던 그가 재언이 다가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럭키 네임리스?”

“…고마워. 네 덕분이 중요한 걸 기억할 수 있었어.”

“중요한 거?”

“누가 죽든 상관없고… 세계 평화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도… 히어로를 하고 있었던 이유.”

언럭키 네임리스와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눠 보진 않았지만, 지금처럼 희미하게 미소 지은 얼굴은 처음이 아닐까.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야.”

그렇게 자신이 할 말만을 남기고 언럭키 네임리스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이후로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빼앗긴 마음을 찾아 떠날 것이다.

이레일과의 통화를 끊고 그날을 떠올린 재언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좋겠네. 언럭키 네임리스…….”

또 다른 세계의 신재언은 그 마음을 찾지 못했고, 그의 인생은 고통과 증오뿐이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신재언의 입술 사이로 연기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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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하지만 어두운 방 안.

원탁에 앉아 있는 여섯 명의 빌런.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 여자와 아이. 남자와 노인까지.

“그자는 어디를 가든 눈엣가시 같군……. 분수도 모르고 아버지를 탐내 계속 알짱거리고 말이야…….”

아버지를 빼앗긴 자식의 질투심일까.

테이블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남자의 옆에 앉은 여성이 부드럽게 웃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그녀는 세간에서 말하는 어머니교의 교주였다.

“이미 여러 곳에서 그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자는 감히 신을 사랑해 버리고 만 것이죠. 하지만 몇 번이고 방해해도 소용없습니다. 씨앗은 뿌려졌으니까요. 우리가 수놓은 그 아이는 분명 좋은 발화점이 되겠죠. 계속해서 그분을 혼돈으로 물들이고 그분께서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갑시다.”

그녀의 말에 남자, 알례리가 격앙되어 소리쳤다.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더 이상 약자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빌런으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가장 빌런 같은 놈들은 누구지? 경찰과 히어로는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정의라는 규격 아래 있으니 정의의 편이라는 건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악을 죽인 남자는 규격을 벗어났으니 빌런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아주 잘못되어 있어.”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 여자와 아이. 남자와 노인의 시체.

시체들을 바닥에 산처럼 쌓아 두고 살아남은 다섯 명의 빌런과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사람을 죽인 마약왕이 축배를 들어 위대하신 아버지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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