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78화 (178/324)

178화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H 형태의 고층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던 재언은 자신이 잘 찾아온 게 맞는지 여러 차례 모바일 지도를 확인했다. 제가 알고 있는 레헬의 집은 이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웹사이트상에 떠돌아다니는 레드-헬-파이어의 거주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어마어마한 땅값을 자랑하는 서울시 강남구였다. 원래도 땅값이 비싸긴 했지만 레드 헬 파이어가 거주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동산 시세가 더욱 폭등했다는 기사를 이전에 본 적이 있었다.

어떤 시민이 자신이 사는 집 근처에 레헬이 별장이라도 지어 줬으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까지 했었기에 똑똑히 기억이 난다.

하지만 문자에 찍힌 주소대로라면 이 건물이 맞았다. 재언이 기억하기로 이 아파트도 은행의 도움을 99% 정도를 받아도 자신의 벌이로는 살 수 없을 만한 시세를 가진 곳이었다.

재언은 떨리는 마음으로 아파트 관리실에 방문 차량을 등록하고 주차를 마친 뒤 트렁크에서 커피 머신 박스를 꺼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마중 나온 민재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어머니가 구해 주신 곳입니다. 쓸데없이 넓고 화려해서 관리가 힘들더군요. 관리인이 있긴 하지만 집에 외부인이 드나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차민재는 재언이 집들이 선물로 가져온 상자를 개봉하며 의문을 해소해 주었지만, 재언은 그의 얼굴에 정신이 팔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따라 정장이 아닌 흰색 반소매 티셔츠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치고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차민재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욱 어려 보였던 탓이다.

대부분의 만남이 정장을 입은 채였기 때문일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새로운 미인을 만나는 것 같아 정신이 멍해졌다. 이렇게 얼굴을 밝히다가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닐까 슬슬 걱정될 정도였다.

“집들이 선물 고마워요.”

“어차피 있었을 텐데…….”

“고장 나서 마침 다시 사야 했거든요.”

재언은 저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차민재를 파악한 참이다. 그와 사귀기로 한 이후부터 재언의 일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야근하고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과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도시락이나 라면을 사 먹곤 했다. 하지만 이젠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차민재와 함께 자신의 집이나 레헬의 사무실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회사와 집을 반복하는 루틴 사이에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차민재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리고 재언의 집에 있던 슈퍼 싱글 사이즈의 침대는 킹사이즈로 바뀌었다. 워낙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민재 덕분에 잘 때 좁고 불편해서 큰맘 먹고 내린 선택이었다.

킹사이즈라 해도 평균보다 체격이 큰 편인 두 사람에게 넉넉한 건 아니지만 이전 사이즈 침대보다는 훨씬 나았다.

마지막으로 재언이 빌라의 마스터키를 민재에게 건네주었다는 점이다. 한 가구당 두 개밖에 주지 않은 마스터키였다. 그걸로 빌라의 공동현관문과 재언의 집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어쩌다가 아주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한 날이면 차민재가 편안한 복장으로 집에서 재언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재언 씨, 다음 주 생일이네요?”

“벌써요? 시간 참 빨리 가네.”

“이번에 우리 집에서 조촐하게 생일파티를 여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차민재가 집으로 초대하려 할 때마다 거부하며 벽을 쳐 왔었는데, 은근슬쩍 물어 오는 말에 선뜻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다크 카오스인 자신이 무시무시한 레드-헬-파이어의 집에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응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고심하던 재언은 처음으로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정체를 들켰어도 그의 손에 죽진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방문한 차민재의 집은 과하게 넓지 않은 깨끗한 투룸 짜리 아파트였다. 엄청나게 넓고 화려한 곳에 살 줄 알았는데 이런 점은 나름대로 신선했다.

재언은 현관 복도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감상하며 물었다.

“이거 엄청 비싸 보이네요.”

차민재는 집들이 선물로 받은 커피 머신을 조립해 주방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이번에 프랑스에서 사 온 겁니다.”

“얼마인데요?”

“한… 260만 달러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직접 산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 대금을 지불해서 정확한 건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얼추 그 정도란 말이지? 뭐를 그려 놓았는지도 모르겠는 초록색 배경에 나무와 유리잔 같은 걸 그려 놓은 이 그림이 내가 사는 빌라보다 몇십 배나 비싸다는 거지?

“다른 방 구경해도 되나요?”

“네, 마음껏 하세요.”

그림에서 슬그머니 한걸음 멀어진 재언은 눈앞에 보이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상당히 넓어 보이는 화장실이었다.

수건이나 욕실용품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물때 없이 반짝반짝한 것을 보니 차민재가 생각보다 꼼꼼한 성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을 시켜 관리할 줄 알았는데, 이건 조금 의외였다.

유명인을 부모로 두어 어릴 적부터 집안일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그는 평범하게 자기 집을 정돈하고 꾸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투룸이라 해도 역세권의 고급 아파트는 달라도 뭔가 달라서 현관부터 거실까지 이어지는 복도도 그렇고 거실 크기도 보통은 아니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들어간 큰 방 또한 작지 않은 크기였지만 킹사이즈의 침대와 작은 탁자뿐이었다.

방에서 나와 거실로 나오니 차민재가 주방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보고 있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민재처럼 생긴 남자가 말없이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광경이 벽에 걸린 몇백만 달러짜리의 예술품보다도 더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뭘 보고 있어요?”

“재언 씨, 한식과 양식 중에 뭐가 더 좋은가요?”

“저는 한식이죠.”

가까이 다가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엿보니 놀랍게도 요리 레시피가 담긴 책이었다. 레드-헬-파이어가 레시피를 보고 요리를 하다니, 그걸 얻어먹을 수 있는 자신이 사실 세계 최강이 아닐까 하는 감동적인 마음이 들었다.

잠시 후, 재언은 눈앞에 차려진 12첩 반상에 입을 떡 벌렸다. 밥이 주식인 한국인으로서 한식을 고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준비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게 바로 생일이라는 건가…….’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함께 끝낸 뒤 재언은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후식이 든 접시를 들고 다가오는 민재를 쳐다봤다.

“항상 이맘때쯤엔 빌런들이 날뛰고 사고를 쳐 댔던 걸로 기억하는데,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히어로 협회에서도 항상 비상이 걸렸거든요. 지금도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와 마더가 서울 전역을 순찰하며 꼼꼼히 지키고 있다더군요.”

“…하하.”

문득 생각났다는 듯 주제를 이어 가는 그의 말에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전 세계의 히어로 협회가 가장 긴장하는 날이죠……. 아마 다른 곳도 삼엄하게 경비를 세웠을 겁니다.”

“하하…….”

신재언의 자식들은 작은 일에도 호들갑이 심했고 아버지에 관한 일은 더욱 과장해서 생각했다.

사실 재언은 다람쥐 쳇바퀴같이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생일을 대충 넘겨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는데, 자식들은 아니었다. 살아생전 생일을 챙기거나 받은 적이 없었던 이들이다 보니 그에 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혹여 그게 아니더라도 신재언이 매년 자식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간단한 선물을 주면서 축하해 준 게 그들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약 4년 전부터 ‘위대하신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해드리자.’라는 취지로 자식들이 매년 벌이는 일들은 전 세계를 긴장에 빠트렸고, 각국 히어로 협회에 비상이 걸리게 했다.

그중에서도 재언뿐만 아니라 세계를 경악에 빠트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던 크루즈를 위대하신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는 파티로 바꾸겠답시고 하이재킹한 일이었다.

거기에 연루된 빌런들은 하나같이 악명이 높로 유명한 놈들이어서 히어로와 빌런의 해상전으로 번진 사건은 양쪽 다 참혹한 결말로 막을 내렸다.

그 당시 재언은 취업 준비로 토익 점수를 따겠다고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었다. 잠시 휴식 차 흡연실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자식들이 벌인 사건의 뉴스 기사를 읽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외에도 재언의 생일날마다 벌인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씩 나열하자면 하루도 부족했다. 덕분에 재언의 생일은 세간에서 빌런들이 갑자기 난폭해지고 사고를 치는 날로 인식되어 ‘레드문의 시작’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도시 괴담이 생길 정도였다.

“…이번엔 정말 조용히 있으라고, 사고 치지 말고 선물 하나면 끝이라고 말해 뒀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 말에 차민재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우리 애가 지금은 얌전해졌어요.’

재언은 미혼인 자신이 자식에 관한 일에 변명하는 부모가 된 것만 같아 조금 아찔한 기분을 맛봤다. 자식 가진 부모가 하는 변명을 일단 받아 주겠다는 표정을 한 민재가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종이가방을 건네주었다.

재언도 잘 아는 고급시계 브랜드였다. 사실 그가 생일선물로 시계를 마련했으리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전에 재언이 그와 함께 실내 수영장으로 둘이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차민재의 개인 체육관에 딸린 수영장이기에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차민재는 재언과 스킨십을 하는 것을 딱히 참은 적도 없었지만, 그날은 보는 눈도 없으니 완전히 차려진 밥상 취급이었다.

물기로 반짝이는 신체, 가슴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수영모를 쓰지 않아 잔뜩 젖어 있는 옅은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에 두드러지는 홍조까지 신재언의 전부가 차민재의 눈길을 끌었다.

“…민재 씨, 아래에 닿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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