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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79화 (179/324)

179화

차민재는 떨떠름한 재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모른 척 입술을 부딪쳤다. 재언은 자신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았지만, 이른 대낮부터 확 트인 수영장의 선베드 위에서 일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키스는 휘몰아치는 것처럼 격렬하고 열정적이었다. 재언은 늘 상대를 누르던 입장이라 그런지, 자신의 위에서 억누르며 압박하는 무게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대체 어떤 점에 꽂혀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민재의 눈동자는 이미 맛이 가 있었다. 그의 눈 안에서 헬파이어가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딴생각에 빠져 있는 재언의 정신을 돌리려는 듯 차민재가 그의 손목을 잡아 위로 올렸다. 그런데 심하게 흥분한 나머지 손에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빠각-.

“…….”

“…….”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재언의 고개가 위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재언의 목에서 흐르는 물기를 혀로 핥던 민재도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다행히 뼈가 부러진 건 아니고 재언이 끼고 있던 손목시계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딱딱한 철제로 된 선베드 뼈대에 부딪히는 바람에 시계 유리가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것이다.

“완전히 깨져 버렸네.”

재언은 혹시라도 유리 조각이 선베드나 수영장 바닥에 떨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손목시계를 풀러 살폈다. 숫자를 알아볼 수도 없게 사방으로 금이 가 있어서 고칠 수나 있을까 싶었다.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거 10년 정도 된 거라 곧 바꾸려고 했거든요.”

말을 멈추고 잠시 고민한 뒤 덧붙였다.

“선물 받은 거긴 한데……. 그래도 오랫동안 썼으니까 그 애도 용서해 줄 거예요. 제가 잘 설명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재언의 말에 차민재가 날카롭게 물었다.

“설마 그 찐따ㅅ… 엔레이드맨이 선물해 준 겁니까?”

그의 말에 못마땅한 기운이 잔뜩 서렸다. 10년 전에 신재언의 자식은 엔레이드맨뿐이었다.

엔레이드맨은 신재언이 구해 주기 전까지 착취당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생일을 축하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20대의 재언은 그런 소년이 너무나도 가여워서 그의 생일을 맞이하여 헤드셋을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그는 처음 받아 보는 선물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 헤드셋이 고장 나서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지금까지도 목에 항상 걸고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재언의 선물에 보답하듯 그는 섬사람들이 거지에게 적선하는 것처럼 섬사람들이 던져 주었던 십 원, 오십 원짜리들을 싹싹 긁어모아 재언에게 시계를 사다 주었다. 2만 원 언저리의 값싼 시계였지만, 재언은 그것을 지금까지도 끼고 다녔다.

“제가 망가트렸으니 꼭 사 드리겠습니다.”

“아니, 굳이…….”

“아니요. 재언 씨 곧 생일이라고 하셨죠?”

“네…….”

차민재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설마 이 부분에서 엔레이드맨과 묘한 경쟁심을 가질 줄은 몰랐던 재언은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생일 선물로 손목시계 하나 드릴 테니까, 그러니까… 형이 사지 말아요.”

급기야 신재언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치자 재언은 얼이 빠져 멍하니 입만 벌렸다. 그의 성격상 받기 부담스러운 선물을 해 줄 것이 분명했지만 미인계로 재언의 거절을 막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오늘 받게 된 손목시계의 가격은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웠다. 거기다가 재언을 기겁하게 만든 건 시계 선물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차민재는 시계가 든 종이가방을 건넨 뒤 그보다 더 작은 가방에서 반지 케이스처럼 보이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케이스를 열자 백금색의 심플한 디자인에 붉은 보석 알이 작게 박혀 있는 반지가 나왔다.

자세히 보니 차민재의 왼손 약지에도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함께 맞추러 간 적이 없었으니 혼자서 구매한 걸 텐데 신기하게도 재언의 왼손 약지에 딱 맞게 들어갔다.

손을 펼쳐 반지를 감상하던 재언이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혼자 준비했어요? 저한테 말하고 같이 하지…….”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레드 헬 파이어와 커플링이라니,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부분이었다. 낯간지럽기도 하고 왠지 들뜨는 기분에 표정 관리가 안 된 재언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에 차민재는 살짝 홍조 띤 재언의 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실 그는 분홍빛으로 물든 재언을 보면서 그의 이곳저곳을 빨고 싶다는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훌륭한 미모는 그마저도 우수에 찬 얼굴로 보이도록 만들었고, 재언은 민재의 음흉한 속내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부끄러워만 했다.

“…안 그래도 민재 씨 연애하는 것 같다고 기사 난 적 있지 않아요? 저랑 같이 찍힌 사진도 좀 있을 텐데.”

“기자들이 찍은 사진은 다 불태워 없애 버리긴 했지만…….”

“저랑 커플링 한 걸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요.”

“저는 상관없는데…….”

“민재 씨야 상관없겠지만 대한민국은 상관 있을걸요…….”

요즘 인터넷 탐정단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듯했다. 레드 헬 파이어가 반지를 끼고 있는 사진이 찍히기라도 하면 같은 반지를 낀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레드-헬-파이어와 커플링이라니…….’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낯선 기분에 차민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반지에 박혀 있는 보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옆에서 답이 들려왔다.

“멈추지 않는 심장의 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아… 설마 그?”

“맞아요. 저주받은 보석가에게 받은 보석입니다.”

빌런이라고 정의하기 애매하지만, 정부와 히어로 협회의 감시를 받는 ‘저주받은 보석가’는 등급이 없는 빌런이었다. 그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보석으로 만드는 특수한 능력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보석으로 만든 전적이 있었다.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능력을 각성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각성 전부터 보석 세공사라는 직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능력을 각성할 당시에 그는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한쪽 팔로 어린 딸을 안은 채 다른 한쪽 팔로 아내의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능력을 각성했지만, 그는 엄청난 격통을 느끼지 않았으며 각성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능력을 각성했고, 그것은 그에게 불행으로 다가왔다.

접시를 건네주며 닿은 손가락부터 아내의 몸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고 그의 품 안에 있던 어린 딸조차도 보석으로 변하고 말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끔찍한 상황에 그는 비명을 지르며 119에 전화를 했으나, 이미 보석으로 변한 가족은 영원히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인지한 순간, 그의 심장도 붉은 보석으로 바뀌었다. 살아 있는 생명을 보석으로 바꾸는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보석 심장을 떼어내 상대를 보석으로 만들었다.

언젠간 그의 보석 심장이 모두 없어지는 날, 그 역시 보석으로 바뀌어 숨이 끊어질 것이다. 세간에서는 그의 능력이 저주받은 것과 다름이 없기에 정부에서 일부러 빌런으로 규정하고 관리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다.

게다가 ‘저주받은 보석가’의 보석은 일반 광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물질과 아름답고 영롱한 빛깔로 부르는 게 값이라고 들었다. 재언은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의 보석이 능력자의 보석 심장을 마모시켜가며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매우 찝찝해졌다.

그의 표정을 기민하게 알아챈 차민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재언 씨. 말했잖아요… 그에게 받았다고.”

“그래요?”

“네. 이전에 그를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가 보석을 하나 줬었거든요. 별로 쓸모없는 것 같아서 서랍에 두고 잊은 채 지냈는데 마침 기억이 나서 세공한 거고요.”

안타까운 사정이 있는 보석이긴 하지만, 자신이 깊게 파고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재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주받은 보석가의 보석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심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서 커플링이나 장신구로 만들어 차고 다니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상술 섞인 뜬소문도 존재했다.

캐럿당 억이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지만, 오로지 대한민국 내에서만 구매할 수 있기에 한정판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사람들 덕분에 떴다 하면 품절이었다. 저주받은 보석가의 보석으로 만든 물품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도 가끔 열리곤 했다.

저번에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아이돌 한 명이 그곳 전시장에 가서 목걸이를 사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저런 전시회도 있구나, 하면서 신기해했었기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궁금한 건 다 해결했습니까? 그러면 저도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힘들었으니 재언 씨에게 선물을 받아도 될까요.”

재언에게 선물도 건넸겠다, 집 안엔 두 사람뿐이고 분위기도 좋다고 생각한 듯 차민재가 재언의 어깨를 잡고 소파 위로 눕히며 눈을 마주쳐 왔다. 은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조금 부끄러워진 재언은 냅다 입을 맞추는 차민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민재 씨는 침대 밖에서 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재언의 상의 안으로 들어가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민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침대로 가자고요?”

“네.”

그 말에 일어선 차민재가 재언을 번쩍 들어 올려 침실로 향했다. 운동까지 해서 몸도 좋은 남자를 이렇게 쉽게 들어 올릴 줄은 몰랐다.

그렇게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침대에 몸이 눕혀진 재언의 얼떨떨한 표정을 똑바로 바라본 민재는 그의 티셔츠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커플링을 낀 손으로 재언의 가슴을 더듬으며 나직하게 한마디 중얼거렸다.

“재언 씨는 피부가 하얘서… 보석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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