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80화 (180/324)

180화

재언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가 꿈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 상황을 꽤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었다.

평행세계에서 또 다른 ‘신재언’의 기억을 엿볼 때 항상 이런 느낌이었다. 꿈속이거나, 아니면 갑자기 두통과 함께 모르는 기억이 찾아온다거나.

사실 재언은 평행 세계의 ‘신재언’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고, ‘신재언’의 행동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신재언’은 심심하면 부하들을 시켜 사람을 죽였고, 멀쩡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망가뜨렸다. 그는 지금의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면모를 가진 대표적인 족속이었다.

‘신재언’에게는 많은 부하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증오가 있으면, 그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상관없이 능력을 각성시켰다. 그리하여 서울은 진작에 폐허가 되었고,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기 힘든 도시가 되어 버렸다.

지금도 저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신재언’의 두 눈동자는 탁한 빛이 감돌았고, 안색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시신들을 밟고 지나오면서도 얼굴에 후회하는 빛이 전혀 감돌지 않았다.

오히려 꿈속에서 그를 따라가던 재언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는 다른 세계의 자신이 왜 저렇게 망가졌는지까진 이해해도 눈앞의 그가 만든 참담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은색 기동복에 붉은 담요를 질질 끌고 있던 ‘신재언’이 어느 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기에 뭔가 있나?

재언이 덩달아 고개를 돌렸지만, 불에 타다 남은 빌딩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재언’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인 뒤 입을 열었다.

‘너도 오겠어?’

그러자 무너진 빌딩의 잔재 속에서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며 튀어나왔다. 온통 검은 재가 묻어 꾀죄죄한 그것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였다.

‘신재언’은 그것이 빌딩 사이에서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기분 나쁘지도 않은지 천천히 등을 돌렸고, 그것은 그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헉!”

재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까지 그가 꿈을 꿨던 기억들은 기억의 실마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별 뜻이 없기도 했다.

방금 꾼 꿈은 ‘아무것도 아닌 기억’이라고 생각하며 식은땀을 훔친 재언은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차민재가 부지런하게도 벌써 일어나 움직이는 모양이다.

재언은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을 손으로 더듬어 찾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자정이 넘지 않은 오후 10시였다.

재언이 나른한 몸을 끌고 방 밖으로 나오자 때마침 현관에서 무언가를 받아 들어오는 차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언 씨, 깼어요?”

“네… 뭐예요?”

“치킨하고 피자에요. 배달 오는 소리에 깬 건가요?”

솔솔 풍겨 오는 치킨과 피자 냄새에 배에서 저절로 꼬르륵 소리가 나왔다. 잠들기 전에 격한 운동을 했더니 벌써 배가 꺼진 듯했다.

“그건 아니에요… 저 좀 씻고 올게요.”

얼른 음식을 먹고 싶지만 잠을 자면서 식은땀을 흘린 바람에 찝찝해서 샤워하고 싶었다. 재언이 샤워실로 들어가는 동안 차민재는 기분이 좋은지 배달받은 음식들을 TV 앞 테이블 위에 세팅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피곤해.’

이상하게 자도 잔 것 같지도 않고, 누워서 더 자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거실에서 풍기는 냄새와 2시간 후면 맞이하는 자신의 생일을 잔뜩 준비하고 있는 애인의 모습에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샤워실의 물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거울을 확인한 재언은 목덜미부터 배까지 이어지는 붉은 자국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말도 못 할 곳이 아픈 건 둘째치고 날개가 살짝 뜯겨 있기까지 했다. 차민재가 물어뜯었던 게 분명했다.

이상하게 그는 재언의 등을 보면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픈 건 아니지만 날개가 자라날 때 드는 간지러운 느낌은 조금 힘들었다.

‘너도 오겠어?’

평행세계의 ‘신재언’이 그렇게 말하자 그의 등을 눈 깜박하지도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것’이 뒤를 쫓았다.

‘갑자기 꿈속 장면이 왜 떠올랐을까.’

어리둥절한 마음을 가진 채 샤워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테이블 세팅을 끝낸 차민재가 맥주를 들고 재언을 반겼다. 자리에 앉아 피자 한 조각을 단 세 입에 먹어 치우며 재언이 입을 열었다.

“그러는 민재 씨는 언제 깼어요? 그리고 제가 깰 건 또 어떻게 알고 딱 맞춰서 배달을 시켰을까.”

“곧 깰 것 같았거든요. 앓는 소리를 내더라고요.”

이번엔 치킨을 집어 한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좀 깨워 줄래요?”

“악몽을 꿨습니까?”

차민재의 눈동자가 재언의 얼굴로 곧게 향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시선은 항상 집요했다. 잠자리에서마저도 그는 한 번도 재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악몽은… 아니었는데…….”

그에 차민재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정말 악몽이었으면 깨우지 않았던 걸 후회할 뻔했습니다.”

재언은 웃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대며 눈동자를 굴리다가 마침 보이는 리모컨을 들어 올렸다.

“TV 틀어도 되죠?”

“네. 뭐 볼 거 있어요?”

“뉴스 좀 보다가 영화를 틀고 싶은데……. 제가 생일 때마다 보는 영화가 있거든요.”

TV 전원을 켜자마자 익숙한 뉴스 내용이 흘러나왔다. 미성년자 납치부터 어머니교 신도로 추정되는 시체 세 구의 발견까지. 대한민국이 어머니교로 인해 아주 떠들썩했다.

“교주가 우리를 눈에 불을 켜고 찾지 않을까요.”

정확히는 형제로 분장했던 신재언과 언럭키 네임리스를 말이다.

“부하들에게 보고받았을 땐 조용했다 하더군요.”

“아직 모르는 걸까요?”

“그건 아니고…….”

차민재가 맥주를 들어 한 모금 홀짝였다. 그가 입 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씹어 삼킨 뒤 느리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재언은 오히려 입에 음식이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걸 매우 싫어했기에 그의 음식 예절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재언 씨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

“교주는 재언 씨의 정체, 알고 있죠?”

“아마…….”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마약왕의 밑에 있는 빌런들은 재언의 얼굴을 알고 있다 해도 무방했다. 재언의 힘으로 능력을 각성한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적은 평행 세계를 포함해도 처음이었던지라 마약왕을 떠올리면 재언도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맥주를 들이켜던 재언은 다음 뉴스 속보로 넘어간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콜록!”

음식이 목에 걸렸는지 재언이 기침을 하며 휴지쪽으로 손을 뻗었다. 입 밖으로 음식물이 흘러내렸다.

“조, 죄, 죄송합니다.”

식도에 치킨과 맥주가 걸려 따끔거리고 말을 잇기 힘들 정도로 기침이 쏟아졌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기침을 겨우 진정시킨 뒤 재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TV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 오늘 저녁, 히어로 협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다크 카오스의 거대 빌런들이 저주받은 보석가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국은 보석을 노리는 빌런의 소행이라며 그들의 뒤를 추적 중이지만…….

뉴스 화면에 잡힌 건 기절한 한 남성을 끌고 가는 코루루와 타락한 추기경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변장한답시고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들이 냉기와 제안의 마녀와 타락한 추기경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고 안 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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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언이 뉴스를 보기 약 여섯 시간 전, 마약왕을 제외한 다크 카오스의 선택받은 일곱 자식이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원탁에 모여 앉아 있었다.

결계 능력자 중 최강이라 알려진 엔레이드맨.

바티칸이 낳은 수치, 모든 성직자의 주적인 타락한 추기경.

다크 카오스의 귀와 눈이 되는 조각난 장난감.

어느 곳이든 문을 열 수 있는 체어맨.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사람들을 얼려 죽이는 냉기와 제안의 마녀.

지옥의 문을 열어 악귀를 조종할 수 있는 귀신들의 성녀.

마지막으로 제 또래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다닌다는 학살자 버드맨까지.

한 명만 움직여도 세계를 혼돈에 빠트릴 수 있는 거대 빌런들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했다. 이윽고 엔레이드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시건방진 자식이… 감히 아버지의 탄생일에 위대하신 아버지를 독점하고 있다.”

“아버지의 생신을 독점하다니!”

“엔레이드맨 오빠의 능력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건가요?”

“보이지 않는 헬파이어가 집을 감싸고 있어서, 놈의 허락 없인 들어갈 수 없다. 아버지께서 괜찮으니 기다리라고 하셨지만…….”

사고 치지 말고 기다리라 했었던 재언의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엔레이드맨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아버지께 선물을 드린다고? 어림없는 소리. 감히 아버지를 독점하는, 시건방 떠는 저 레드-헬-파이어 자식보다 훨씬 대단하고 값진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맞아요. 그 자식의 기고만장한 얼굴을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 올라요. 이러다가 아버지께서 그 자식과 결혼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엔레이드맨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며 언성을 높이자 코루루 또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아니, 됐어! 준비하지 마. 사고 치지 말라니까! 그리고 대한민국은 동성결혼제도가 없어서 못 해!’

신재언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테지만 그는 지금 애인의 집에 놀러 가 있느라고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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