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81화 (181/324)

181화

코루루와 엔레이드맨의 분노 섞인 연설에 모두가 동의하는 모습을 내비치는 가운데 타락한 추기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예전에 선물해 드렸던 크루즈는 아버지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기억합니까? 그 남자를 이기려면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걸 미리 준비해야 할 텐데, 지금은 여쭤볼 수도 없으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말을 이어 가는 타락한 추기경의 목소리에 탄식이 섞였다. 그러자 옆에서 얼음 조각을 만들며 놀고 있던 코루루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추기경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저 코루루가 아버지께서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을 똑똑히 들었답니다.”

“잘했다, 코루루! 그게 무엇이지?”

엔레이드맨이 얼굴에 잔뜩 화색을 띠며 묻자 코루루가 머뭇거리더니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풀이 죽었다.

“아버지께서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까지만 알아내고 그게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날, 아버지께서…….”

코루루가 회상하는 그날의 광경은 이러했다.

그녀가 봤을 때, 회사-집-헬스장을 반복하는 재언의 일상생활에 레드-헬-파이어와 데이트가 쓸데없이 끼어들어 왔다. 게다가 레드-헬-파이어 그 뻔뻔한 놈은 주말에도 뻔질나게 찾아와 재언과 자식들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다.

그러던 와중에 놈에게 의뢰가 들어왔는지 오랜만에 재언이 혼자 주말을 보내는 날이 찾아왔다.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전날 밤 차민재가 찾아와 저녁을 먹고 나온 설거지 거리까지 처리하기 위해 재언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지금이 기회다. 위대하신 아버지께 잔뜩 어리광을 부리고 코루루의 노래를 들려드려야지.’

코루루는 신이 난 얼굴로 엔레이드맨의 둠(DOOM)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타이밍 나쁘게도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나오는 재언이 통화를 하고 있어서 코루루는 얌전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상대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다음 주에 있는 생일 때문에 약속을 잡기 위해 통화하는 듯 보였다. 생일 전날과 당일은 애인과 보내기로 했다면서 약속 날짜를 조율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재언은 뚱한 표정으로 방 안에 서 있는 코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깨와 턱에 핸드폰을 고정한 채로 쌓여 있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 지금 설거지 중. 아… 그래? 부럽네. 나도 갖고 싶긴 한데…….”

설거지 중 자꾸 흘러내리는 핸드폰이 불편했는지 재언이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런데 돈이 좀 아깝잖아. 적은 금액도 아니고. 내가 고생하고 말지 뭐.”

그 뒤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재언은 통화를 끝마쳤다. 설거지를 끝내고 잠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재언의 무릎에 얼굴을 대고 누운 코루루가 물었다.

“아버지. 필요하신 게 어떤 건가요? 저 코루루가 준비할 수 있는 거면…….”

“아… 아니, 괜찮아. 지금 생각 중이긴 해서… 나중에 더 알아보고 장만하려고…….”

코루루에게 손사래를 친 재언이 간식으로 사 온 과자를 입에 넣으며 TV를 틀었다.

코루루는 현재 무대 한 번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뮤지컬 스타였다. 재언이 원하는 것은 그런 그녀의 재산으로도 살 수 없는 굉장한 몸값을 자랑하는 무언가일까?

왠지 모르게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코루루는 나중을 기약하며 이 일을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그 뒤로 형제들에게 말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던 그녀는 이번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체어맨이 입을 열었다.

“우리 귀여운 코루루의 말이 맞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TV를 보던 중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신재언에게 야근이 없는 날을 세는 게 빨랐던 날들. 대략 2주 정도 전쯤이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레드-헬-파이어와 밖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들어왔는지 오랜만에 정시퇴근을 했으면서도 집에 도착했을 땐 밤 10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그는 항상 들르는 편의점에서 가벼운 안주를 사 와 작은 술상을 차렸다. 그가 즐겨 먹는 마른오징어와 육포, 치즈스틱이었다.

편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와 앉았다. 맥주캔을 따 마시며 TV를 틀어 뉴스를 잠깐 보다가 다시 보기로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골라 재생했다.

요즘 재언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 틀어 놓는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의 집을 소개하고 일과를 찍어 관찰하는 내용이었다. 자취하는 사람으로서 참고할 만한 유용한 아이템이나 내용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고 프로그램의 분위기가 시끄럽지 않고 잔잔해서 좋았다.

게스트로 나온 연예인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color’s의 메인보컬 옐린이었다. 이번에 낸 앨범이 엄청나게 흥행하면서 해외 차트 10위권에까지 드는 기염을 토해 내기도 했다.

TV 안에서 옐린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순간, 체어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께 잠시 보고할 것이 있어서였다.

잠시 후 짧게 보고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체어맨의 귀에 재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꽂혔다.

“아, 부럽네…….”

체어맨이 빠르게 TV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화면이 전환되면서 옐린이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차고 있는 목걸이를 자랑하는 장면이 나왔다.

- 정말 구하기 어려웠는데 힘들게 구했어요. 아는 지인분 통해서 구한 거거든요. 진짜 비싸긴 한데 이번 해를 잘 보내자는 마음으로 스스로한테 하는 선물로 큰맘 먹고 샀어요.

옐린은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목걸이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알고 보니 옐린이 구매한 목걸이는 ‘저주받은 보석가’가 만든 보석을 가공한 것으로 가격도 엄청나고 거의 몇 달은 넘게 줄을 서야 차례가 돌아올까 말까 한 희귀한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주받은 보석가’의 보석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참담하게도 보석가가 처음으로 만든 보석이 된 그의 가족들이었다. 지금은 손톱보다도 작게 산산조각이 나 여러 곳으로 가공되어 팔렸다고 한다.

“사람을 보석으로 만들다니 정말 기분 나쁘네요! 아버지께서 과연 그런 보석을 원하실까요?”

“그의 능력은 생명을 가진 것에 제한하지 않아. 하지만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건 그의 가족들로 만들어진 보석이라고 한다더군…….”

엔레이드맨은 조금 찝찝하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신다고 하시니 의심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생신 선물은 코루루와 체어맨이 말해 주는 것을 토대로 준비해야겠다.

“막내야, 너는 알고 있는 것 없니?”

“아… 저는… 형, 누나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버드맨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탁했다. 그의 생기 없이 흐리멍덩한 표정을 보던 엔레이드맨은 이전에 재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네가 곁에서 잘 보살펴 줘, 부탁할게. 엔레이드맨.”

“위대하신 우리의 아버지. 착취당하기만 하던 저 엔레이드맨의 삶에 내려온 유일한 구원의 빛. 아버지의 부탁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아직은 과거의 일과 사건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테니 가만히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엔레이드맨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귀신들의 성녀가 검은 손톱을 세우며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보석을 어떻게 구하죠? 정부의 감시도 심한 데다가 매물이 나오면 바로 팔려 지금은 전시장에 보석 부스러기도 없는 모양인데.”

귀신들의 성녀 근처에서 섬뜩한 모습의 악귀가 튀어나와 그녀에게 귓속말한 뒤 지옥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이미 악귀들에게 보석에 대한 정보를 알아 오라고 명령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타락한 추기경이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가지지 못할 것이 없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지요.”

“호호… 호호호… 맞는 말이에요.”

그렇게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대 빌런들의 위대한 아버지를 위한 깜짝 생일선물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귀신들의 성녀와 조각난 장난감의 활약으로 정부에서 꽁꽁 감춰 놓은 ‘저주받은 보석가’의 위치를 확인한 그들은 안광을 번뜩이며 그곳에 쳐들어갔다. 한 명만으로도 재앙이 온다는 빌런들의 손에 건물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저주받은 보석가가 있는 곳은 서울 외곽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로 50m 전부터 바리케이드를 세워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었다.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이들 또한 모두 실력이 제법 뛰어난 능력자들이었다.

안쪽에는 더 많은 능력자가 진을 치고 있는 데다 미로처럼 길을 찾기 어렵게 만들어 놨다. 체어맨의 능력이 아니었으면 제법 고생했을지도 모른다.

체어맨의 문으로 미로를 통과하고 나니 홍채 인식을 필요로 하는 문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아주 손쉽게 문을 부수고 지나갔다.

한참을 문을 부수고 들어간 일곱 빌런은 드디어 정사각형 모양의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저주받은 보석가’를 발견해 냈다. 돌덩이처럼 변한 팔다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쭈글쭈글했다.

“이게 저주받은 보석가라고?”

“체어맨 오라버니. 여기로 잘 온 거 맞아요? 이건 사람이 아니라 석고상인데.”

말을 주고받으며 수군거리는 소리에 석고상처럼 변한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치는 건 코루루의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자신을 살펴보는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던 남자는 갑자기 마른 손을 뻗어 체어맨의 옷에 매달렸다.

“꺄아악!”

갑자기 움직여 달라붙는 석고상의 행동에 방심하고 있던 코루루가 놀라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덕분에 방 안에서 사방에 붉은색 등이 켜지며 경보음이 울렸다.

사고 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드디어 떠올린 엔레이드맨은 이곳에서 저주받은 보석가에게 보석을 만들도록 협박한 뒤 몰래 탈출하려고 했던 작전을 전부 수정했다.

그는 저 멀리서 뛰어오는 수백 개의 발소리를 들으며 미로에서 너무 많이 능력을 사용한 덕분에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문을 연 체어맨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파도치는 절벽 위 별장’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일곱 명의 거대 빌런들이 꽁지가 빠져라 후다닥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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