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한 빌런 왕의 기세를 눈치챈 히어로의 왕이 핸드폰을 흔들며 유쾌한 기색으로 미소 지었다. 그의 핸드폰은 누군가에게 쉴 새 없이 연락이 오는 듯 반짝거렸다.
“재언 씨. 그래서 이거 받을까요, 말까요?”
“…….”
자식들이야 정부가 추격한다 해도 충분히 따돌리고 도망갈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레헬이 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언은 눈앞의 무시무시한 애인이 받을 생각도 없으면서 핸드폰 전원을 끄지 않는 이유를 눈치챘다.
신재언이 이대로 생일에 애인을 두고 자식들에게 가 버린다면, 자신이 자식들을 잡으러 가겠다는 협박이었다.
‘…내가 레드-헬-파이어를 잡아 두는 역할을 할 테니 사고 수습은 알아서 잘해야 한다!’
재언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식들에게 의미 없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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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희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 기자들 입막음부터 걱정하시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통화를 이어 가던 히어로 협회의 회장 김의장이 전화가 끊기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졌다.
“녀석들은 찾았나?”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묻는 그의 말에 소파 뒤에 서 있던 광안의 성녀가 대답했다.
“아니요. 위험 규정 S급에 해당하는 체어맨의 능력은 문을 열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추적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엔레이드맨의 둠(doom)까지 합쳐지면 그들을 쫓을 수 있는 히어로는 전 세계에 레드-헬-파이어 그 남자밖에…….”
그 순간, 김 회장이 팔을 들어 올렸고 날카로운 타격음이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가 힘껏 휘두른 둔탁한 손에 그녀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는 뺨에도 광안의 성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원위치로 돌렸다. 사실 김의장의 느릿한 손찌검 따위는 언제든 피할 수 있지만, 세대를 거치며 영혼에 박힌 속박은 말도 안 되는 폭력조차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딴 변명이나 듣자고 물은 줄 알아?! 네 힘이 부족한 건 그릇이 부족해서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저주받은 보석가를 찾아내. 녀석에게 한 일이 바깥에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나 있는 거야? 이번 일에 실패하면 교체다. 실험체 23번이 지금 몇 살이랬지?”
“…열한 살입니다.”
김의장 협회장은 능력이 고작 D급밖에 안 되는 낙하산 인사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그 때문에 S급 능력자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세간에 공개되는 걸 굉장히 꺼려서 줄곧 신비주의를 고수하며 지금까지 버텨 왔다.
물론 그가 사무실을 차려서 돈을 버는 S급 히어로들을 혐오한다 해도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댄 적은 없었다. 히어로 일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한 데다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 또한 무시할 것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안의 성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협회에 소속된 히어로이자 인형이었다. 얼마든지 복제품을 만들어 영혼을 옮기게 하고 백지화된 ‘광안의 성녀’에게 복종을 가르쳤다.
“네 영혼을 담았을 때가 열네 살이었지. 이번에 잘 처리하지 않으면 너 따위는 폐기처분이야. 저주받은 보석가를 회수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 뒤에서 말 안 나오게. 알겠어?”
제 할 말을 마친 김 회장은 광안의 성녀의 어깨를 세게 밀치고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광안의 성녀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주친 것은 때마침 그녀에게 볼일이 있었던 에스트리아 박재원이었다. 집무실에서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에스트리아가 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이 꽤 소란스럽던데 괜찮습니까?”
“네.”
덧붙이는 말 없이 간결한 그녀의 말에 에스트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다크 카오스의 자식들이 벌인 ‘저주받은 보석가’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히어로 협회에서는 에스트리아와 광안의 성녀를 내세웠다. 사실 S급 히어로 중 가장 몸값이 쌌기에 선택된 것이었다.
협회장 집무실 안에서 소란이 일었다는 건 알 수 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듣지 못했기에 자신이 참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스트리아는 그녀의 뺨이 한 대 맞은 것처럼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며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광안의 성녀가 가진 사연을 알 리 없는 에스트리아는 그저 김 회장의 막무가내에 혀를 찼다.
“어차피 저주받은 보석가를 이용하는 건 정부나 빌런이나 똑같죠, 뭐. 그래서 다들 이번 사건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나름의 위로가 담긴 말이었지만, 광안의 성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런은 악이고 우리는 정의니까요.”
감정 없이 대답하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에스트리아는 한참 쳐다보다가 귀걸이에 달고 있는 깃털 한 장을 빼냈다. 작은 깃털을 주먹으로 꾹 쥐고 손을 펼쳐 입김을 불었다.
희미한 빛이 반짝이던 깃털이 나비로 변하더니 오색 빛의 가루를 뿌리며 날아갔다. 에스트리아는 나비를 쫓아 한 걸음 내딛으며 저 나비가 차라리 자신의 님을 찾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라 보러 갈 시간도 부족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흉악한 빌런 놈들이나 찾아다니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 한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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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조금 더 앞선 시각. 전 세계의 뮤즈, 코루루는 삽을 들고 대한민국 대구시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놀이터가 잘 꾸며져 있고 주차장도 넓어 신혼부부나 아이가 있는 가족이 많이 분양받아 오는 아파트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아파트보다 놀이터가 컸고 구석에 작은 모래 놀이터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을 지나 담장을 넘으니 나무들이 쭉 늘어져 있는 화단이 나왔다.
이 화단은 주민들이 직접 관리하는 곳으로 6년 전 처음으로 분양받아 이사 온 사람들이 묘목을 공동 구매해서 심었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묘목을 심으면서 거기에 타임캡슐도 같이 심었어. 부모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진 거라 나도 참여했었고. 그걸 찾아와 주었으면 해.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빨간색 도시락통이야.”
일곱 명의 거대 빌런들을 눈앞에 두고도 남자는 무섭지도 않은지 뻔뻔하게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물건을 찾아 주는 것만이 아닌 태안에 있는 바다에까지 데려다주라는 조건까지 붙었다.
남자의 요구 조건에 타락한 추기경은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던 버릇이 아직 남아 있는지 마지막 남은 자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할 것 없다며 유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엔레이드맨과 코루루는 형제 중에서 가장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이놈을 고문해 버리죠. 제까짓 게 체어맨 오빠의 매서운 고문을 어떻게 버티겠어요!”
“우리를 부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세상에서 위대하신 단 한 분, 우리들의 아버지밖에 없으시다. 그런데 이놈은 너무 뻔뻔하군.”
“하지만 이 남자는 고문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바늘 하나라도 들어갔다간 그대로 심장이 멎을 것 같군요. 정부에서 그의 능력을 쥐어 짜내며 보석을 만들었던 게 분명합니다.”
넘치는 수요에 비해 한없이 모자란 공급량의 값비싼 보석을 만드는 대가로 저주받은 보석가의 심장은 이미 마모될 만큼 마모되어 제 기능을 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조금만 충격을 줘도 금 간 보석처럼 심장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 남자가 죽어 버린다면 아버지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겠다는 자식들의 기특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가위바위보에서 진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삽을 들고 땅을 파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저주받은 보석가는 이미 눈이 멀어 버린 탓에 같이 와 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 대충 타임캡슐이 있는 위치만 듣고 코루루 혼자서 목적지로 향했다.
202와 203이라고 쓰인 주차선 가운데 쪽 화단에 심어진 나무였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어두워서 숫자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힘겹게 찾아낸 코루루가 삽을 들어 올려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나 땅을 팠을까, 나무뿌리가 제법 커졌는지 얼리고 부시는 걸 반복했는데도 저주받은 보석가가 말한 도시락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삽질을 하던 코루루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나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려 했다.
코루루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어린 아들은 제 엄마뿐만 아니라 마을의 여성들을 무시하지 않았고, 코루루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사랑했다.
하지만 코루루는 언젠간 아들도 아버지나 다른 마을 남자들과 닮아 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그녀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고, 지속된 억압에 심리가 불안정했다.
어느 날, 아들은 호숫가에서 삽과 물병으로 흙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딘가에서 작게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일을 하고 있던 코루루가 고개를 들어 아들이 있던 곳을 확인했을 때, 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 차라리 아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고, 신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게 분명했다.
그때 코루루는 웃고 있었던 걸까. 웃고 있어서 남편이 매를 들고 그녀를 매일 때리며 아들을 죽인 비정한 마녀라고 소리쳤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뜨겁게 펄펄 끓는 주전자의 물을 그녀의 등에 붓고 가죽 채찍으로 때릴 다른 이유가 없었다. 생각하기 싫은 게 떠올라 버렸다.
코루루는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점점 흘러 들어오는 나쁜 기억에 잠식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젠장, 그 저주받은 보석가인지 뭔지. 보석을 만들어 내면 이 코루루가 얼려 죽여 버리겠어!’
그때, 삽 끝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