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84화 (184/324)

184화

팔에 힘을 빼고 삽으로 위쪽을 살살 긁어낸 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녹슨 도시락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습한 땅속에 묻혀 있었던 탓에 잔뜩 녹이 슬어 만화 캐릭터니, 뭐니 전혀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데다가 색도 바래서 이게 저주받은 보석가가 원하던 게 맞는지 애매모호했다.

뚜껑을 열어서 안쪽을 확인하고 싶은데 뚜껑 사이로 흙이 들어가 열리지도 않았다. 파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일단 가지고 돌아가기로 하고 도시락을 감싼 고무밴드를 살짝 뒤집어 봤다.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지만, 작게 쓰인 글자는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었다. 코루루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비춘 다음 눈에 보이는 글자 세 개를 천천히 읽었다.

‘김해진…….’

저주받은 보석가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도시락통을 들고 생각에 잠긴 사이, 코루루의 뒤쪽으로 나비 한 마리가 살랑이며 날아왔다.

나비는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내며 빛의 가루를 휘날렸다. 마치 길을 찾으려는 것처럼 한참 동안 나비가 코루루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도시락통에 정신이 팔린 코루루는 뒤쪽에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이 들고 온 비싼 명품 가방 안에 흙이 잔뜩 묻은 도시락통을 넣고 발길을 돌렸다. 파헤친 흙은 대충 덮어 놨으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상한 점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그녀는 주차장을 빠져나온 다음에야 곁을 맴돌며 따라오는 나비의 존재를 드디어 인지했다.

‘저게 뭐지? 이 나비…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녀가 아파트 담벼락에 생긴 체어맨의 문으로 향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십니까.”

재빠르게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린 코루루가 잔뜩 긴장하며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거리낌 없이 잠재우고 떠났겠지만, 상대는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운이었다.

“누구… 코루루?”

“…에스트리아.”

코루루의 주변을 맴돌던 나비가 상대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빛나는 나비 덕분에 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코루루가 아주 잘 아는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이었다. 서울에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대구에 있는 아파트 단지까지 와 있는지 코루루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코루루…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는 사람을 만나고 가는 길이에요. 여기에 사는 사람인데 얘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만약 에스트리아가 경계하면서 어디 사는 누구와 만났냐고 꼬치꼬치 캐묻기라도 하면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에스트리아는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운 듯 그가 얼굴을 희미하게 붉혔다.

“아, 그러셨군요.”

“에스트리아 님은 왜 이런 곳에?”

“…나비가 이끄는 대로 왔습니다. 이 나비는 ‘길잡이의 나비’거든요. 비록 느리긴 해도 제가 원하는 상대를 정확하게 찾아 줍니다.”

이전에 에스트리아에 관해 엔레이드맨이 말해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에스트리아의 능력엔 치명적인 한 방은 없지만, 그는 다재다능한 올라운더 형식의 능력자다. 그는 에스트리아라는 이세계에서 가져온 무구(武具)를 자유자재로 실체화해서 사용하지. 복수능력자들보다 까다로운 능력이다.”

에스트리아의 손에서 날갯짓하던 나비가 형태를 바꾸어 깃털로 변했다. 그는 작아진 깃털을 자신의 귀걸이에 다시 걸어 두었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코루루는 그의 귀걸이에 깃털이 한쪽에 세 개씩, 총 여섯 개라는 것을 눈에 새겨 넣었다.

“그 나비가 저를 찾아왔단 말씀이세요?”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란 것도 잠시, 코루루는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정리를 끝냈다. 에스트리아가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 그가 이번에 저주받은 보석가의 납치 사건을 배당받은 히어로이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히어로 협회는 저주받은 보석가에게 말 못 할 짓을 했고, 그건 비윤리적인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형수라고는 하나 이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 협회에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남자는 또 싸구려 값에 의뢰를 받았겠지!’

정부와 협회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말도 안 되는 싼값에 부려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몸값이 천차만별이라는 다른 히어로들과 다르게 에스트리아는 곤경에 빠진 사람이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가 저주받은 보석가의 납치범들을 찾는 중인 거라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시끄러운 코루루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에스트리아는 얼굴만 잔뜩 붉히고 있었다.

“…혹시 감옥에 갇혔던 저주받은 보석가가 탈옥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악의 빌런들이 그를 납치했습니다. 저는 협회의 의뢰를 받고 이번 사건을 책임지게 되었고요.”

‘역시…….’

코루루의 손바닥 안쪽으로 미세한 얼음 결정이 생겼다. 하지만 에스트리아의 무방비한 얼굴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코루루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에스트리아의 얼굴은 터질 듯이 새빨개져 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코루루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나비가 그 마음을 읽었던 모양입니다. ‘길잡이의 나비’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까요.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바라고 말았으니, 나비가 정확히 인도한 셈이죠.”

“…….”

그의 말에 손을 털어 능력을 흘려 낸 코루루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서 저 코루루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어요. 에스트리아 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오늘은 바빠서 놀아드리지 못해요.”

에스트리아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코루루가 노래를 불러드리죠. 그리고 얌전히 집으로 가는 거예요. 아셨어요?”

“좋아요.”

코루루는 왠지 모르게 신나는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노래를 시작했다. 밝고 경쾌한 데다 중독성 있는 반복 구간이 많은 노래였다.

주인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고양이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에서 전사한 용병을 주인으로 둔 고양이가 열두 개로 나뉘어 전 세계 이곳저곳에 묻혀 있는 주인의 몸을 전부 찾아서 이어붙인 뒤 영원히 잠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내용만 보면 슬프기 짝이 없지만, 노래만큼은 고양이 시점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였다.

코루루의 노래가 모두 끝나자 손바닥이 부서져라 손뼉을 친 에스트리아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경쾌한 음률 뒤에 아주 슬픈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에 코루루가 잡힌 손을 빼내며 고갯짓 했다.

“이제 그만 가세요. 저도 돌아가야겠어요.”

“코루루,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제가요?”

“네. 아까 봤을 때 안색이 좋지 않아서 걱정했거든요. 지금은 나아진 것 같지만…….”

아까 삽질하면서 떠올린 기분 나쁜 과거 때문에 얼굴에도 티가 났던 모양이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눈썰미가 굉장히 좋았다.

코루루는 노래를 하나 더 불러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그를 돌려보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난 후 뒤를 돌아 체어맨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건너온 코루루에게 귀신들의 성녀가 다가왔다.

“호호… 호호호, 언니. 막내는 졸리다며 자러 갔어요.”

“어리니까 자러 갈 수 있죠. 그런데 전 요즘 막내가 걱정이랍니다……. 그 애, 요즘 어딘가 계속 멍하잖아요.”

그들이 있는 곳은 ‘어둡고 깊은 산속의 별장’으로 크기는 작았지만, 형제들이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임시 거주지였다. 처음 왔을 때 여기는 음기가 강해 귀신들이 많다고 귀신들의 성녀가 신이 나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도 귀신들의 성녀가 움직일 때마다 귀신들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손톱이 날카로운 여귀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천장 위에서 배회하는 중이었다.

“가져왔어요. 가방 안이 흙으로 엉망이 됐다니까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보석을 넘기지 않는다면 코루루가 가만두지 않겠어요.”

코루루가 가방에서 녹슨 도시락통을 꺼내며 툴툴거렸다. 타락한 추기경이 옆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두 손을 모았다.

“가엾은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다니, 분명 전능하신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이곳에 있는 빌런 중에 누구보다도 자비로워 보이지만, 타락한 추기경은 사실 남자가 조금이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망자로 만들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 시험할 생각이었다.

코루루는 흙이 잔뜩 묻은 도시락통을 보며 한마디씩 거드는 형제들을 지나 아직도 말이 없는 저주받은 보석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가?”

코루루가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든 순간, 뚝 소리가 나며 남자의 머리가 떨어졌다.

“꺄아아악!”

능력을 각성한 이후로 온갖 짓을 저질러 온 코루루라도 호러에는 매우 약했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벌어지는 갑작스러운 순간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코루루는 저도 모르게 형제들 앞에서 꼴사나운 비명을 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던 잘린 목이 눈을 번쩍 뜨는 모습에 다시 한번 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발로 차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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