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더 좋은 영웅을 뽑고 싶으면 뽑기를 돌려야 하는데, 지금은 이벤트 중이라 하루에 한 번씩 무료로 뽑을 수 있어요. 운이 좋으면 5성이 뜰 겁니다.”
차민재가 재언의 옆에 바짝 붙어 자신이 하는 모바일 게임을 설명해 줬다. 핸드폰 화면을 보느라 살짝 고개를 숙인 그의 옆모습이 재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뺨에 내려앉자 거슬리는지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조차도 단아해 보여서 재언은 무심코 그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레드-헬-파이어의 취미 생활이 설마 핸드폰 게임일 줄이야.’
그가 같이 해 보지 않겠냐며 소개해 준 모바일 게임은 PVP 기반의 수집형 RPG 게임으로 이전에 둘이 PC방에서 함께했던 게임과 비슷한 종류였다. 그때부터 게임에 재미를 느낀 것일까.
차민재의 핸드폰 게임 화면엔 뽑기 힘들다는 5성 영웅 카드의 강화가 벌써 +5인 데다 카드가 무지개색으로 반짝이는 걸 보니 강화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더 한 듯했다.
“민재 씨, 강화하려면 같은 카드가 하나 더 있어야 +1이 가능하잖아요? 그런데 민재 씨 카드는 뽑기 힘들다는 5성 카드 중에서도 확률이 극악이라는 1티어짜리 영웅들이 일반강화뿐만 아니라 완전강화까지 끝나 있는데……. 여기에 돈을 얼마나 쓴 거예요?”
재언의 질문에 민재가 싱긋 웃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엄청나게 돈을 투자한 모양이다.
확실히 그래픽도 화려하고 게임 구성도 즐길 거리가 많았다. 재언은 요즘 모바일 게임도 참 잘 되어 있다는 구시대적인 생각을 하면서 차민재의 눈앞에 게임 화면을 들이밀었다.
“여기 랭킹 보면 민재 씨 아이디가 떡하니 있거든요? 랭킹 2위잖아요.”
[2위. 불꽃왕23.]
게임 내 랭킹 1위부터 100위까지는 게임 닉네임 앞에 휘장을 달아 주는데, 1~3위는 다른 순위들보다도 휘장의 화려함이 독보적이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본인임을 알려 주는 닉네임에 차민재는 입을 가리고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한 장 썼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재언은 10만 원이나 100만 원을 떠올렸다가 그 정도로는 차민재가 저렇게 머뭇거리진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천만 원?”
“…….”
“설마 억?”
재언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전 그렇게까지 못써요!”
“그만큼 쓰지 않아도 돼요.”
“게임에 너무 헤프게 쓴 거 아닙니까?”
잔소리를 하면서도 재언은 그것이 차민재에게 그리 큰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레드-헬-파이어의 건당 의뢰비를 생각하면 사실 게임에 돈 쓰는 것 정도는 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즘 의뢰를 대폭 줄였다고 세간에서 떠들고 있긴 한데, 그래 봤자 의뢰 한 번에 신재언의 5년 치 연봉은 훌쩍 넘길 정도이니 말이다.
“여기 한번 무료 뽑기 해 보시겠습니까?”
“후후… 전 ‘럭키 가이’라고요.”
재언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뽑기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뽑기 운이 좋았다.
정확한 수치를 따져 보지 않아서 증명할 순 없지만, 길거리 혹은 문방구나 학교에서 시행하는 추첨 이벤트에선 항상 당첨되곤 했다. 하지만 조금 뒤 보이는 재언의 핸드폰 화면에 보이는 건 뽑기 중 가장 가치가 낮은 3성 카드였다.
“…언럭키 네임리스는 불행했죠. 그와 운명이 바뀐 덕분에 제가 ‘럭키 가이’가 되었고 그는 ‘언럭키’가 됐어요. 그가 마음을 찾아갈수록 뒤바뀌었던 운명이 제자리를 찾아가나 봅니다.”
재언은 뽑기로 나온 카드가 떠 있는 화면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원래대로… 제가 ‘언럭키’고 그가 ‘럭키’였을 때로.”
재언이 게임 내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차민재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재언 씨 말대로라면 ‘그 세계’에서 ‘럭키’ 능력자인 그놈이 아버지에게 살해당해 산속에 묻혔던 운명도 되찾아 가야 합니다. 그나마 이곳에서 운명이 바뀐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던 거고요. 마음을 찾으러 가느니 뭐니 하는 개소리나 하면서 재언 씨를 들쑤시고 있잖아요.”
“민재 씨는 불행이 무섭지도 않은가 봐요?”
“불행은 이미 질리도록 알아서요. 그것이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 갈 이유는 되지 못할 겁니다.”
예상보다 로맨틱한 답변에 부끄러워진 재언은 핸드폰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그러다가 게임에 집중하면서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재언의 얼굴에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신규 접속자 이벤트도 있네요. 지금밖에 못 사는 건데 사야 하나?”
이제 보니 신규 회원들에게 24시간 동안 충전하는 캐시의 50%를 덤으로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3만 3천 원을 결제하면 10+1 영웅 뽑기권을 구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1만 1천 원짜리 월정액을 사면 하루에 크리스털을 450개씩 주는 상품까지 눈에 띄었다.
“…게임이 생각보다 재밌긴 한데 애초에 5성 나올 확률이 너무 희박한 거 아닙니까? 돈을 썼는데 좋은 카드가 안 나오면 손해잖아요.”
“재미로 하는 거니까요.”
“재미로 손가락 한 번에 오만 원을 날리다니……. 평범한 직장인에겐 출혈이 크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언은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이 게임을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재밌게 할 게임인데 가지고 있는 영웅에 따라서 PVP 대전의 승률 차이가 심한 게 마음에 걸렸다.
5성을 하나만 뽑는다고 좋은 게 아니라, 강화까지 마쳐야 하는데 같은 영웅의 5성을 또 뽑는 건 확률적으로 조금 힘들었다.
선뜻 캐시 충전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고민하던 재언은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55분. 이제 5분 후면 자신의 생일이다.
‘그래, 내가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라고 치지 뭐.’
재언은 눈 딱 감고 게임회사의 상술에 이번 한 번만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럭키’가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던지라 10연속 뽑기에 1이 추가된 11연속 뽑기 버튼을 터치했다.
화면 안에서 현란한 색감의 카드들이 휙휙 지나가고 곧이어 뽑힌 11개의 카드가 늘어섰다. 그중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카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황금색이 5성인가요?”
“맞아요. 한 번 터치해 보세요.”
그의 말대로 터치하자 총을 든 붉은 머리의 남자 캐릭터가 나왔다.
“1티어는 아니지만, 초보자 때 쏠쏠하게 키울 수 있는 영웅이네요. 원거리라 싸울 때도 좋고 민첩이 높아서 도망치는 것도 빠르고요.”
“잘 아시네요. 대체 이 게임을 언제부터 한 겁니까?”
“한… 5개월 정도 된 것 같네요.”
예전엔 자신이 게임을 알려 주는 역할이었는데 반대가 되니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재언은 잔뜩 설레는 기분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민재 씨.”
생일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애인의 생일 축하를 듣게 된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만나는 남자마다 쓰레기였던 재언은 연인과의 생일파티가 난생처음이었다.
차민재 직전에 만났던 놈은 바람둥이 기질이 넘쳐났다. 재언과 다른 남자의 생일 날짜를 착각하기까지 해서 파티는커녕 만나기로 한 약속까지 까맣게 잊고 재언을 바람맞혔다.
같이 있는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생일 축하 전화나 문자도 하나 보내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그래서 재언이 조각난 장난감을 시켜 처음으로 애인의 사생활을 조사하게 시켰다.
알고 보니 그놈은 동이 틀 때까지 클럽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 이후 재언은 그런 쓰레기와 만나는 것도 아깝다며 문자로 이별 통보를 보냈다.
덧붙여 이 일을 알게 된 자식들이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의 심기를 주제도 모르는 똥파리가 거슬리게 했다며 그놈을 납치하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었다.
그런데 차민재는 재언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겪게 해 주었다. 커플링을 맞춰 낀 것도, 바텀 역할도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덩치도 좋고 키가 큰 탓인지 자연스럽게 탑이었고, 바텀만 만나 왔었다. 신재언도 그쪽으로는 흥미가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차민재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의문이긴 했지만,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는 중이었다.
“저주받은 보석가… 에게 직접 보석을 받았다고 하셨죠? 무슨 부탁을 들어준 겁니까? 그는 사형수인 데다가 만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아, 바다에…….”
차민재의 말을 들으며 재언은 리모컨을 들어 TV 화면을 켰다.
‘내가 여기까지 레헬을 잡아 뒀으니 녀석들도 지금쯤 잘 해결했겠지?’
하지만 곧바로 보이는 뉴스 속보에 재언은 리모컨을 뚝 떨어트렸다.
화면 안에서 선명한 검은색 손톱, 창백한 손등과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귀신들의 성녀가 어떤 남자의 머리를 들고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저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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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통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빨간색 매니큐어였다. 그리고 랩에 싸여 있는 작은 이빨과 글씨가 잔뜩 바래져 읽기는 힘들지만, 편지로 추정되는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때 코루루가 비명을 지르며 발로 차 버리는 바람에 저주받은 보석가의 머리가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코루루는 형제들 앞에서 또다시 추태를 부렸단 자괴감에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구르던 머리가 멈추자마자 눈을 번쩍 뜨자 비명을 내질렀다.
“코루루 언니, 진정하세요. 이 남자… 살아 있답니다.”
귀신들의 성녀가 창백한 손으로 남자의 목을 들어 올렸다. 피 대신 보석 결정체들이 바닥으로 부스스 떨어졌다. 잘린 목의 단면조차도 보석으로 반짝였다.
눈을 뜬 남자의 머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성대가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그 자리에 있는 빌런들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몸은 거추장스러워서 버렸다. 머리만 이동하는 게 더 편할 테니까.”
그는 눈동자만 굴려 자신을 바라보는 빌런들과 눈을 마주쳤다.
“…마지막 부탁이다. 날 바다로 데려가 줘.”
태안에 있는 바다. 꼭 그곳이어야 한다고 남자는 주장했다. 결국, 남자의 머리를 들게 된 귀신들의 성녀를 필두로 자식들은 해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