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보석을 감상하던 코루루가 황홀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바로 그 순간, 해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넘겨! 그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만들어서 보석을 갈취하다니……. 이, 잔악무도한 빌런 놈들.”
“오오… 코루루의 남자친구 아닙니까.”
체어맨이 형제들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이자 모두의 시선이 울고 웃는 가면을 쓴 코루루에게 몰렸다.
거대 빌런 여섯 명을 향해 호기롭게 소리친 용감한 남자는 바로 S급 히어로 에스트리아 박재원이었다. 곧이어 그의 뒤를 따라 광안의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귀신들의 성녀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우웩…….”
그때 재언은 그런 히어로와 빌런의 대치를 TV 화면으로 직관 중이었다. 체어맨이 저주받은 보석가의 얼굴을 바닷속으로 빠트렸을 때 저놈들 무슨 끔찍한 짓을 하는 거냐며 소리쳤다가 그들이 빼낸 ‘바다의 보석’을 보고 멈칫했다.
“저… 저 보석은… 저 보석이 대체 왜?”
재언은 저 보석을 알고 있었다. 그건 ‘평행 세계’의 ‘신재언’이 가슴에 차고 있던 그 보석과 똑같았다. 희미하게 그곳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며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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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얻게 된 지 약 10년 동안 8명의 자식만 만든 자신과는 달리 ‘평행 세계’의 ‘신재언’에겐 무수히 많은 부하가 존재했다.
그 부하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쪽은 ‘신재언’의 능력으로 증오를 각성시켜 준 이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그에게 부하를 자처하며 살길을 찾는 이들이었다.
그래 봤자 다 같이 멸망하는 세계이지만, ‘신재언’이 ‘평행 세계’에서 ‘저주받은 보석가’를 만났을 당시엔 나름대로 많은 나라가 제구실을 하며 빌런들에게 대항했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비밀기관. 그런 영화 같은 설정이 진짜 있나 싶었는데 실제로 존재했다. 얼마나 대단한 걸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꼭꼭 숨겨 놓았을지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던 ‘신재언’은 마침 따분하기도 했고 심심풀이로 그곳을 습격했다.
히어로 협회와는 별도로 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이다 보니 S급 히어로들은 없어도 제법 날고 기는 능력자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후문도 없어 몰래 잠입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신재언’은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신재언’을 막지 못했다. 막아야 할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으니 당연했다. 호기심과 심심풀이로 움직이는 것치곤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줬다.
지금의 재언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그런 ‘신재언’의 옆에는 붉은 광대 가면을 쓴 훤칠한 청년이 함께했다. 재언은 단번에 그가 ‘레드 헬 파이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의 말투가 지금의 레헬보다도 더 가볍고 어려 보였다. 옷차림이 캐주얼하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재언이 알고 있는 레헬과는 이미지 차이가 상당히 심했다. 하긴, ‘신재언’과 지금 자신의 차이도 그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신재언’이 도착한 기관의 건물은 조금 희한한 곳이었다. 실험실 같기도 했는데, 안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구조였다.
그곳에 감금되어 있던 ‘저주받은 보석가’는 ‘신재언’이 능력을 각성시켜 주지 않아도 부하를 자처하는 부류에 속했다.
그는 이쪽 세계와 마찬가지로 ‘평행 세계’에서도 각성 도중 아내와 딸을 보석으로 만들었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감옥 대신 이곳으로 끌려와 감금되어 강제로 보석을 만들고 있었다.
사지가 구속된 저주받은 보석가를 내려다보며 ‘신재언’이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별것 없었네.”
그가 미련도 남지 않은 듯이 뒤를 돈 순간 폭발 덕분에 다리 쪽 구속구가 살짝 풀린 저주받은 보석가가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기어 왔다.
“잠깐, 잠깐 기다려!”
저주받은 보석가는 신재언의 발치까지 기어와 바지 자락을 핏줄이 터질 듯 이로 악물었다.
그러자 붉은 광대 가면을 쓴 청년이 한걸음 다가와 그의 얼굴을 발로 차 떨어트렸다. 청년의 주변으로 헬파이어가 도깨비불처럼 타올랐다.
“이게 어디다 손을 대고 있어?”
눈앞에 있는 것을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리는 헬파이어를 막은 건 ‘신재언’이었다.
그는 저주받은 보석가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어디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그에 붉은 광대 가면의 청년, 레헬이 불만 어린 신음을 흘리며 한걸음 물러났다.
“제발, 제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전 힘이 될 겁니다. 전력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이곳은 싫습니다. 가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고… 여기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발!”
“이게 정부에서 꽉 붙들어 매고 있던 자금줄이었군? 덕분에 성가셨단 말이지.”
‘신재언’이 남자에게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레헬이 옆에서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 이놈을 데려가게?”
“재밌는 능력이잖아.”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레헬은 웃고 있는 ‘신재언’의 말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는지 얌전히 저주받은 보석가를 어깨에 둘러메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감옥 같은 그곳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저주받은 보석가는 빌런 왕 다크 카오스의 부하로서 생활했다. 그러나 아직은 정부를 증오하면서도 일반인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우려할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그에게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인간성을 버리는 계기가 될 사건이 일어났다.
저주받은 보석가로 인해 보석이 된 그의 아내와 딸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전시장에 오랜 시간 동안 전시되어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재벌의 손에 거액으로 팔려 갔다.
재벌은 그들을 가공해 액세서리로 만든 뒤 보란 듯이 열 손가락에 끼고 다녔으며 나머지는 여자친구에게 선물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인터넷 사이트에 업로드했다.
일각에서는 실제 살아 있던 사람들인데 잔인한 거 아니냐는 평도 있었지만, 일부는 부러워하거나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저주받은 보석가는 자신의 가족이 눈앞에서 해체되는 영상을 사람들이 유흥거리로 삼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아깝네.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제법 강한 능력을 각성할 만한 증오인데.”
그가 모든 진실을 알아 가는 걸 구경하던 ‘신재언’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신재언과 그가 아주 약간은 닮은 게 있다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걸 싫어한다, 정도일까.
‘신재언’은 저주받은 보석가가 증오로 인해 미쳐 가는 걸 그저 방관하기만 했다. 정부와 히어로 협회의 눈치를 보느라 히어로들이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기에 그는 가족들의 시신조차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저주받은 보석가가 복수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만들어 낸 보석을 내다 팔며 재력을 쌓은 뒤 자신만의 군대를 만들었고, 영상을 찍었던 재벌 남자의 집을 급습해 남자와 여자친구들을 모두 보석으로 만든 뒤 부숴 버렸다.
‘이쪽 세계’에서는 레드-헬-파이어가 눈치 따위 보지 않는 히어로였던 덕분에 그는 가족을 온전히 바다에 수장할 수 있었고, 심장이 마모되면서 죽어 가긴 해도 미치진 않았다.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일까.
그 이후로 저주받은 보석가는 히어로들을 보석으로 만들고, 보석으로 만든 상대의 심장을 뽑아 버리는 기이한 짓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히어로의 심장을 뽑는 날엔 그것을 ‘신재언’에게 바쳤다. 물론 ‘신재언’은 받지 않았다.
“다크 카오스님… 위대하신 분이여. 제가 드린 보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건 다크 카오스님의 앞길을 막은 히어로의 심장으로 만든 보석이었습니다. 분명 마음에 드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으로 만든 보석이라니. 기분 나빠.”
그것만큼은 재언도 동감하는 바였다.
재언은 문득 저주받은 보석가의 행동이 마약왕과 닮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었다. 그리고 복수를 끝냈음에도 넘쳐흐르는 광기와 증오를 갈무리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마음속에 품은 증오를 분출한 방식이었다.
마약왕의 증오는 어긋난 충성심과 합쳐져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만들어 냈고, 저주받은 보석가는 ‘신재언’을 향했다.
“당신… 당신은 알고 있었지! 그 남자가 내 가족들을 해체하는 걸 알면서도 방관했잖아!”
신재언조차도 뜬금없이 헛소리를 내뱉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주받은 보석가는 ‘신재언’에게 종종 화풀이를 했다.
“형. 저런 개소리를 계속 들을 셈이야?”
“가족을 잃었잖아. 어차피 자멸할 거 같은데, 놔둬.”
평상시에도 붉은 가면을 벗지 않는 청년은 시시콜콜 ‘신재언’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저주받은 보석가를 손봐 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신재언’은 자신의 부하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방관한다는 쪽이 더 옳은 표현인 것 같긴 해도 어쨌든 관대한 건 맞았다.
저주받은 보석가마저 위대하신 다크 카오스께선 모르는 일이 없고 자신의 일 또한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걸 방관했다고 여겼다.
그날도 히어로들의 협공으로 ‘신재언’이 머무는 아지트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레헬은 자신과 짧게나마 호각을 이루는 히어로가 쳐들어왔다며 신이 나서 나가 버려 ‘신재언’ 혼자 아지트에 남겨졌다.
그 틈을 타 ‘신재언’의 곁으로 저주받은 보석가가 달려들었다.
파랗게 충혈되어 초점을 잃은 눈을 한 그가 신재언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눈앞에 있는 가슴을 움켜잡자 ‘신재언’이 깜짝 놀라 그를 뒤로 밀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칠 틈도 없이 능력이 발동되었다. ‘신재언’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피를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