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빌런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면이나 천, 방독면 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나타났다. 그들 중에 평범하게 일반인으로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에스트리아는 그런 부류를 가장 혐오했다. 평범한 생활을 꿈꾸는 주제에 어째서 다른 이들의 일상을 빼앗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히어로 중에서 보기 드물게 자신만의 정의가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승산 없는 싸움도 절대로 피하지 않았다.
빌런왕 다크 카오스의 직속 자식들인 여덟 명의 거대 빌런 중 7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 아무리 S급 히어로가 2명이어도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에스트리아는 창을 거두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 왜 계속 끈질기게 나만 쫓는 거지!?’
에스트리아는 커다란 눈 결정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귀걸이에 걸린 깃털 하나를 뽑아 양손을 교차했다. 정면으로 날아오던 공격이 그의 앞에 생긴 방어막에 의해 막혔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를 공격하는 냉기와 제안의 마녀는 반짝이는 푸른 드레스에 울고 웃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그녀의 주변으로 반짝이는 눈 결정체가 흩날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가 굉장히 화려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빌런에게 성별을 따질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에스트리아는 자신보다 한참 가녀려 보이는 팔뚝에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에스트리아가 딴생각을 한 순간, 날카로운 하이힐이 그의 방어막을 깨부수고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얼굴에 구멍이 났을 발차기였다.
하이힐 굽에 얼음을 둘러 위력을 더한 듯 스쳤을 뿐인데도 피부가 얼얼한 걸 보니 동상을 입은 모양이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는 뻗은 다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몸을 뒤로 물리고는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고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얼음 기둥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그녀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에스트리아.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남자네요. 혹시 애인 있나요?”
“뭐… 뭐!?”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에스트리아는 상황도 잊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빽 소리쳤다.
“당신! 지, 지금 날 놀리는 겁니까!”
“깔깔깔, 제가 놀리는 것 같나요? 설마 그 나이 먹도록 여자랑 놀아난 적이 없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없습니다!”
누가 봐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비록 겉모습은 카사노바처럼 가볍고 껄렁하게 생겼지만, 에스트리아는 마음에 둔 여자가 인생에서 단 한 명뿐일 정도로 순정적인 사람이었다.
“여자친구는요?”
“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없습니다!”
“…뭐?”
순식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살벌한 기운을 품었다. 마치 바람기가 있는 애인을 앞에 둔 사람처럼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실제로도 그녀의 주변으로 기온이 떨어져 바다가 얼어붙어 빙산이 튀어나왔다. 남극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빙산이었다.
“애인이 없다고? 당신이 만나는 여자가 없단 말이야?! 이, 이 파렴치한 놈 같으니라고…….”
에스트리아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에스트리아는 고양이 앞에 놓인 쥐가 된 것처럼 몰려드는 불안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왜 자신이 빌런과 전투를 하다 말고 이런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게 되었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답은 성실하게 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당신이 사형수를 풀어 주고 저런 꼴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애인은 없어도 짝사랑하는 상대는 있습니다!”
그러자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더욱 소리를 높이며 대답을 보챘다.
“그게 누군데!”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그 사람의 열정적인 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체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겁니까?”
“아하.”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겉으로 봤을 땐 굉장히 우아한 손동작이었다.
“코루루를 좋아하는구나?”
그녀의 물음에 에스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파랗게 질리기를 반복했다. 이제 그에게 상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는 더 이상 방해가 아니었다.
“당신!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가만두지 않겠어!”
“하하하, 호호호호!”
즐겁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뒤에 생겼던 빙산이 스르륵 녹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깔깔거리며 에스트리아가 퍼붓는 공격을 흘려 냈다.
에스트리아 쪽은 무척 필사적이고 진지한 얼굴로 공격하는 중이었지만, 형제들이 보기엔 코루루는 즐겁게 놀고 있을 뿐이었다.
“…코루루는 대체 뭘 하는 거야? 아버지께서 사고 치지 말라는 명령을 듣지 못한 건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염장질을 하는 동생을 본 엔레이드맨이 짜증을 부렸다.
“우리 임무는 끝났어! 이 남자가 만든 보석을 아버지께 바치면 된단 말이야!”
엔레이드맨이 체어맨에게서 저주받은 보석가의 머리를 건네받았다. 머리는 오랫동안 갇혀서 착취당한 사람치고는 미련 없이 매우 후련한 표정을 하고 숨이 멎어 있었다.
엔레이드맨은 그의 입 안에 있는 푸른색 보석을 빼낸 뒤 저주받은 보석가의 머리를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바닷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그의 머리는 해수면 아래로 점점 가라앉아 사라졌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손안에 있는 푸른색 보석을 보며 엔레이드맨은 풀어지려는 얼굴을 몇 번이고 다잡았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눈 색과 비슷한 보석은 아버지께 무척 어울릴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서 아버지께 드리기만 하면 되는데, 철없는 동생들이 자꾸 옆길로 새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사실 놀고 있는 건 코루루뿐만이 아니라 귀신들의 성녀도 마찬가지였다. 귀신들의 성녀는 에스트리아와 함께 온 광안의 성녀와 투닥거리는 중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엔레이드맨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다.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귀신들의 성녀가 가지 방울을 휘두르며 눈을 번뜩 치켜뜨자 바닷속에서 물귀신들이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물귀신들은 모두 퉁퉁 불어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데다 여기저기 물어뜯긴 듯 흉측한 몰골이었다.
물귀신들의 등장에 광안의 성녀가 눈에 두르고 있던 안대를 풀어내 황금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아주 성가시기 짝이 없는 능력이지만, 두 개뿐인 눈으로는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물귀신들을 전부 상대하기엔 힘에 겨웠다.
광안의 성녀는 물귀신들을 정화할 생각인지 들고 있던 작은 구슬을 허공에 띄워 올려 빛을 내뿜었다. 그러나 귀신들의 성녀가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지옥문을 소환해 악귀를 조종해 점점 해변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뾰족한 손톱을 가진 악귀 한 마리가 광안의 성녀의 두 눈을 찌르려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다. 기괴한 비명을 터트리며 악귀가 광안의 성녀의 머리카락 두 가닥을 잘랐다.
가지 방울을 끊임없이 휘둘러 악귀와 물귀신을 부르던 귀신들의 성녀가 창백하고 푸른빛을 띠는 입술을 작게 달싹거렸다.
“그 뺨. 내가 한 짓이 아닌데. 왜 그렇게 빨갛게 부푼 거야? 진짜 때리기라도 했으면 속이 후련할 텐데, 그런 타격감은 없었단 말이야.”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당한 것이 아니니 아쉽겠군요.”
“뭐!? S급이나 됐으면서 맞고 다닌다고? 한심하기 짝이 없네!”
귀신들의 성녀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방방 날뛰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광안의 성녀보다 체구가 작은 귀신들의 성녀를 보고 있자니 마치 엉망으로 털을 관리한 강아지가 아르릉 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귀신들의 성녀는 광안의 성녀의 다른 쪽 뺨이라도 갈기고 싶다는 표정으로 가지 방울을 더욱더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체된 듯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엔레이드맨이 코루루와 귀신들의 성녀를 부르며 소리쳤다.
“냉기와 제안의 마녀! 귀신들의 성녀! 돌아와!”
“…….”
그에 귀신들의 성녀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씨근덕거리면서 손가락질했다.
“다음에 봤을 때 또 그런 얼굴로 왔다간, 내가 아니라 귀신들만 상대하게 될 거야, 미친 눈깔.”
“…….”
다른 쪽에서는 에스트리아와 실컷 놀았는지 냉기와 제안의 마녀가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엔레이드맨의 곁에까지 날아왔다. 에스트리아가 그녀를 향해 창을 날렸으나 엔레이드맨의 둠(doom) 안으로 들어간 마녀에게 닿을 리 없었다.
저주받은 보석가를 죽여 증거를 인멸하라는 게 명령이었지, 거대 빌런들을 체포하라는 말이 없었기에 광안의 성녀는 귀신들의 성녀가 물러나자 얌전히 몸을 물렸다.
그런데 그 순간, 여섯 명의 빌런이 한 곳에 모이자마자 거대한 불의 잉어가 바닷속에서 뛰쳐나와 그들을 한입에 삼켜 버렸다.
바닷속에서 불의 잉어가 나타난 게 놀라운지, 아니면 거대 빌런들이 사라진 게 놀라운지 그 광경을 보던 광안의 성녀와 에스트리아의 눈이 커졌다. 불꽃으로 만들어진 잉어는 그대로 빌런들을 삼키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무인도.
태안 앞바다에 나타났던 거대한 불꽃 잉어가 나타나 무언가를 퉤 뱉더니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물에 홀딱 젖어 버린 여섯 명의 거대 빌런들은 깜짝 놀랐지만, 자신들에게 감히 이런 짓을 했냐고 불평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들의 위대하신 아버지가 섬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크게 한숨을 푹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옆에 웬 개뼈다귀 같은 놈이 있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아버지께서 나타나신 게 더 중요했다.
그들은 불평 없이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위, 위대하신 아버지…….”
엔레이드맨이 변명하듯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재언은 홀딱 젖은 엔레이드맨과 고개를 숙였지만 이쪽을 힐끔거리는 다른 자식들을 돌아보면서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제발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결국 이번 생일에도 대대적으로 뉴스까지 나오는 등 대형 사고를 쳤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게 저 보석이라고 언제 말했냐고. 덕분에 더 골치 아파졌거든! 내가 원했던 건 식기 세척기고, 그건 어제 내 생일선물로 질렀는데!’
재언은 일단 가면을 잠시 벗어 눈물을 훔쳤다. 혼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고맙다…….”
여섯 자식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홀딱 젖은 모습으로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