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90화 (190/324)

190화

-♩♪♬

오늘따라 알람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재언은 가까스로 팔을 뻗어 핸드폰 알람을 끈 뒤,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일, 이, 삼, 사, 오… 육…….’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잠 기운이 몰려왔다. 열까지 숫자를 다 세기도 전에 핸드폰에서 다시 알람이 울렸다.

“…하아아…….”

1분 단위로 맞춰 둔 알람을 3개 정도 더 끈 후에야 재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단단하게 잡혀 있는 등 근육을 뽐내며 스트레칭을 한 재언이 그나마 잠이 깨는 듯 고개를 좌우로 탈탈 털었다.

어젯밤에 데이트하면서 맥주에 닭꼬치를 곁들여 먹고 잤더니 눈이 퉁퉁 부었다.

“출근하기 싫다…….”

취업 준비생일 땐 그렇게 가고 싶던 직장이었는데, 이젠 퇴사가 절실했다.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 동안 물소리가 이어진 뒤 밖으로 나온 재언의 턱에는 빨간 줄이 짧게 그어져 있었다.

원래 쓰던 면도기가 어제 고장 나는 바람에 급하게 사 온 일회용 면도기를 쓰다가 살짝 베였다. 아침부터 피를 보다니,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정장 바지와 셔츠로 옷을 갈아입은 후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다가 혀를 찼다. 선명하게 보이는 빨간 줄에서 피가 조금씩 몽글몽글 나오는 데다 따끔거려서 계속 신경 쓰였다.

“요즘 누가 면도하다 다친다고 이러냐.”

상처 부위에 자꾸 손이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재언은 밖으로 나섰다.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이라도 먹고 갈 요량으로 일찍 나선 덕분에 이른 새벽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요즘따라 심해진 미세먼지 때문에 막 상쾌하진 않지만, 인적이 드문 푸른 공기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핸드폰을 꺼내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며 걷던 재언은 발에 무언가가 걸려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다.

“헉!”

재언이 휘청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다리에 붙어 애교를 부리는 중이었다. 초록빛 눈을 가진 고양이는 눈이 마주치자 입을 벌려 야옹, 하고 울었는데, 성묘라기엔 체구가 작고 배가 볼록했다.

“어… 안녕. 어디서 왔니?”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는 기대하고 건네는 말은 아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던 재언은 그대로 쪼그려 앉아 고양이의 턱과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사람 손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수리를 부딪쳐 가며 열정적으로 엉겨 붙었다.

“…잠깐 기다려 봐.”

고양이를 쓰다듬던 재언은 몸을 일으켜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매대에 있는 오백 원짜리 소시지를 골라 계산대로 가져가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계산대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재언이 밖에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걸 봤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손님. 혹시 저 고양이한테 이걸 먹이시게요?”

“네? 네…….”

“이건 염분이 있어서 고양이에게 좋지 않아요. 저쪽에 보면 고양이 전용 사료나 간식이 있거든요. 한 번 보시겠어요?”

혹시라도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까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중년 여성이 고양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져 재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인상이 유순하고 착해 보였다.

“아…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군요.”

“가장 좋은 게 전용 사료를 먹는 거긴 하지만… 사실 허기진 고양이한텐 뭐든 먹는 게 중요하긴 해요. 손님께서 나쁜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살짝 웃어 준 재언은 그녀가 말해 준 동물용 사료 캔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확실히 제법 종류로 많고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같은 회사여도 재료나 성분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재언을 따라온 중년 여성이 붉은색 캔을 들어 올리며 말을 걸었다.

“요즘은 편의점에서도 이런 건 팔거든요. 성분이 엄청 좋은 건 아니지만, 길고양이들은 늘 배가 고프잖아요. 이게 열량도 높고 건더기도 많아서 괜찮을 거예요.”

여성은 마음이 좀 편해진 듯 사료 캔을 계산하면서도 계속 말을 걸었다.

“까미는… 아, 저기 검은 고양이를 제가 까미라고 불러요. 갑자기 이 근방에 나타난 걸 보면 누가 유기한 것 같더라고요. 몸집이 작고 겁도 많아서 동네 고양이들한테 맨날 치여요.”

재언에게 카드를 받아 계산하면서 여성이 편의점 너머로 손가락질을 했다.

“저쪽에 보면 시에서 운영하는 길고양이 집이 있는데, 까미는 그쪽 고양이들 때문에 끼질 못해서 요 근처만 왔다 갔다 하거든요. 중성화 수술을 하려고 병원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임신해 버렸지 뭐예요.”

“안타깝네요.”

“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게 길에서는 생활할 수 없을 아이 같은데…….”

계산을 마치고 여성에게 인사를 하며 나온 재언은 아직도 밖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쳐다봤다. 재언이 무엇을 위해 편의점으로 들어갔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귀여워…….’

재언이 편의점 밖으로 나와 캔을 따 주고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고양이가 달려오듯 걸어와 캔에 얼굴을 박았다. 굶주렸던 모양인지 한참 동안 쩝쩝거리며 캔을 비운 뒤 재언의 종아리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재활용 쓰레기통에 캔을 넣고 고양이를 쓰다듬던 재언은 시계를 확인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아침은 물 건너갔네.’

아침을 먹지 못하게 한 죄로 검은 고양이는 재언에게 붙잡혀 강제로 사진 찍히는 벌을 받았다. 재언은 그 뒤로 버스정류장까지 졸졸 쫓아오는 고양이를 애써 무시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 뒤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들고 탕비실로 직행했다.

어제 맥주를 마셔서 얼큰한 컵라면을 먹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삼각김밥으로라도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삼각김밥을 우물거리고 있으니 탕비실 안으로 임 대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신 주임,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왔네요?”

“안녕하세요.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죠.”

재언은 어깨를 으쓱하며 들고 온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붓는 임 대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에서 커피 사 마시는 돈까지 아낀다던 그녀는 개인적으로 사 온 분말커피 스틱을 텀블러에 타서 아침마다 마시곤 했다.

그녀가 뜨거운 물을 휘휘 저으며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내가 4년 동안 아침마다 마신 커피라고요. 같은 브랜드의 같은 맛으로 드디어 정착했는데, 이번에 이 맛이 단종된대요. 이렇게 맛있는데 대체 왜 생산을 중단하는지. 아침마다 마실 커피를 다시 찾아다녀야 한다고요.”

“안 됐네요.”

“사실 이 커피가 제일 가격이 저렴한 것도 이유였거든요. 진하고 탄 맛이 너무 심해서 스틱 하나를 두 개로 쪼개 먹었단 말이죠.”

임 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휴… 이번에 우리 집 고양이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해요. 아홉 살인데 슬슬 건강 챙겨야 할 노묘라서요. 방광염에 걸려서 병원에 두 번 입원했는데, 백만 원이 넘게 깨졌어요. 사람 입원비보다 비싸다니까요?”

약 10년 전, 임 대리는 길거리를 떠돌던 유기묘 한 마리를 구조해서 키우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엔레이드맨을 만나서 데리고 다닌 시기랑 비슷하네.’

베이지색 무늬의 수컷 고양이로 그녀는 하얀색에 가까운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을 넣은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말에 재언은 아침에 만났던 검은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길에서 유기묘 한 마리를 만났어요. 검은 고양이가 애교가 많더라고요. 편의점에 갔는데 캔 종류가 많아서…….”

오늘 아침에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재언은 고양이와의 만남을 줄줄 읊었다. 그런데 잘했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석연치 않았다.

“임 대리님?”

“음…….”

재언의 의아한 표정에 임 대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키우던 동물을 길거리에 버리다니, 진짜 죽일 놈들이에요. 고양이가 신 주임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네? 왜요?”

“길거리에 사는 고양이가 사람을 피하지 않는 건 사실 위험해요. 걱정돼서 그렇기도 하고… 임시 보호해 줄 사람이나 구조할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임 대리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어휴… 내가 구조할 것도 아니면서 오지랖만 부려 뭐 하겠어요……. 그냥 그 애가 나쁜 일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길 기도해야지. 여유 있는 임시 보호자가 나타나거나 민간단체에서 잘 구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재언은 임 대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했다.

그의 집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종종 밥을 챙겨 주던 고양이 두 마리가 잔인하게 살해당해 길거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둘 다 사람을 피하지 않는 애교가 많은 고양이었다.

범인도 아직 붙잡지 못했을뿐더러 길고양이를 죽인 거로는 큰 처벌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임 대리의 말에 아침에 만난 검은색 고양이가 새삼스럽게 걱정된 재언은 핸드폰을 들어 동물보호소 몇 곳에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전부 직접 포획해서 데려오거나 임시로 데리고 있지 않으면 보호가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재언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임시 보호요?

핸드폰 너머로 근사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언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피우며 대답했다.

“네. 이 근방에 고양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거든요. 동물 학대범은 아직 안 잡힌 모양인데 눈에 밟혀서요. 어차피 집도 내 집이어서 동물 키우는 걸 허락받지 않아도 되니까……. 계속 키울 건 아니고 입양처가 구해질 때까지 보호만 하려고요.”

- 흐음…….

“그래서 고양이 물건을 좀 사고 싶은데 오늘 시간 됩니까?”

- 절 운전기사로 쓰시려고요?

“제가 오늘 차를 안 가져와서요.”

재언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털며 하하 웃었다.

- 없어도 있게 만들어야죠. 누구 부탁인데…….

“고마워요. 그럼 이따 봐요.”

고양이 데리고 있을 땐 금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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