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야말로 신이 내린 미모다.
차민재가 사다리 위에 앉아 한 손에는 전동드릴, 다른 한 손에는 못을 든 채 재언을 내려다봤다. 보통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은 살이 몰려서 평소보다 못나 보이는데, 그는 그런 것도 없었다.
“재언 씨, 진짜 못질해요?”
“네? 아… 네.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해도 되는데…….”
“이왕 끝내는 거 제가 한 번에 하면 되죠. 그런데 못질할 때마다 재언 씨 표정이 볼만해져서요.”
“하하.”
재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제 첫 자가인 만큼 아꼈거든요. 지금까지 못질도 한 번 안 하고…….”
“그러면 이건 그냥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계속 키울 것도 아닌데 나중에 해체했을 때 구멍 난 걸 보면 허무해질 수도 있잖아요.”
차민재를 데리고 펫 관련 용품점을 들러 이런저런 용품들과 캣타워를 사 와 집에서 조립하고 있자니 그가 도와주겠다며 발 벗고 나섰다.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포스터를 떼어 내자 조금 허전한 마음이 들었지만, 커다란 캣타워가 들어서면 허전할 틈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데리고 있는 동안 잘 지냈으면 해서요. 임신한 고양이라 새끼까지 낳을 텐데 사실 대책 없이 뚝딱 데려오려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그리고 고양이 용품들 가격이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아 카드 지출에 조금 타격이 컸다. 50만 원이 넘는 캣타워 가격을 보고 얼어붙은 재언에게 차민재가 자신이 사 주겠다며 나섰지만 그런 걸로 애인의 카드에 의존하는 건 재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좁은 집에서도 고양이들의 수직 공간을 충족해 줄 수 있는 벽에 박는 캣타워와 임신한 고양이용 사료, 화장실, 모래 등등 기본적인 것들로만 준비하는데도 백만 원이 넘게 깨졌다.
임 대리가 일단 이 정도만 사 놓으면 된다고 메모해 줘서 다행이지, 아니면 엄청나게 헤맸을지도 모른다.
“사실 재언 씨처럼 구조하고 임시 보호하는 사람도 많이 없어요. 다들 임시 보호자를 먼저 구해 놓고 구조하거든요.”
임 대리는 재언이 아침에 만난 고양이가 눈에 밟혀 임시 보호를 하겠다고 말하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근데… 뭐, 재언 씨가 잘하겠거니 하지만… 입양 보낼 땐 정말 조심해서 보내야 해요. 요즘 이상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내가 아는 지인도 고양이 한 마리를 구조해서 보냈거든요. 일부러 중성화 수술비용까지 보냈는데도 수술을 안 해 줘서 그쪽에 임시 보호 중이던 수컷 고양이 때문에 임신했다니까요?”
그녀가 말을 하면서도 화가 나는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펄펄 뛰었다.
“그곳에 있는 고양이들 전부 중성화 수술이 안 돼 있던 거였어요! 구조자들한테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받아 챙기는 것도 모자라 보내 주는 비싼 사료마저 되팔고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사료를 줬다는 거죠.”
“그 정도면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고 좋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양이 학대로 신고해도 처벌받기 쉽지 않아요. 정말 어려워요. 받아도 벌금형이 끝이니까. 대한민국의 3대 노답이잖아요. 동물 학대, 가정폭력, 음주운전.”
말문이 터진 임 대리는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재언은 회사 동료와 애인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집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사실 그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는 코루루가 자신도 도와주고 싶다고 설레발을 치며 방방 뛰었다. 물론 레헬을 보자마자 귀신같이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재언 씨. 그 상처, 고양이가 할퀸 거예요?”
차민재가 신재언을 보자마자 대뜸 한 말이었다.
“면도하다 다쳤어요.”
“그러면 다행이네요.”
재언의 대답에 천사처럼 방긋 웃는 게 고양이한테 당한 거라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조금 궁금했다. 세계 최강의 타이틀을 가진 레드 헬 파이어가 조막만 한 고양이와 진심으로 싸우려 했을까.
“그래서, 소문의 고양이는 어디 있는데요?”
“아, 사실 아까 집으로 오면서 찾아봤는데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따가 다시 한번 나가 보게요. 저쪽 편의점에서 일하시는 분이 항상 밥을 챙겨 주신다고 했었는데…….”
재언이 사는 빌라에서 1분 정도 걸어가면 골목길 입구 쪽에 편의점 하나가 있었다. 편의점 건물 구석에 고양이들 밥 주는 곳도 마련해 둘 정도로 편의점 주인분이 동물을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이왕 말이 나온 것 또다시 찾으러 갈 생각으로 재언은 민재와 밖으로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안에는 아침에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었던 중년 여성분이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편의점 안으로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 둘이 들어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재언은 물과 사탕 몇 개를 가지고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안녕하세요. 아침에 얘기했던 사람인데… 혹시 검은 고양이가 언제쯤 밥 먹으러 오는지 아십니까?”
“까미요? 까미 아까 밥 먹으러 왔었는데…….”
아직은 고양이가 잘못된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여태껏 많은 고양이를 봐 왔지만, 아침에 만난 녀석만큼 눈에 밟히는 고양이는 처음이었다.
“아… 계속 밥을 챙겨 주시는 분 같은데, 제가 그 검은 고양이를 데려가 보호하면서 좋은 입양처를 알아봐 주고 싶거든요. 임신했다니까 병원에도 데려가고…….”
“어머, 어머.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마음씨도 고운 분이셨네……. 사람 손에 익숙한 아이라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정말 다행이다.”
그녀는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서 고양이를 데려가겠다는데 나중에라도 걱정할까 봐 재언은 편의점에서도 보이는 자신의 집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빌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혹시 걱정되시면 나중에 찾아오셔도 돼요. 그리고…….”
“저기요.”
계산대 앞에서 중년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재언의 뒤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재언보다 한참 키가 작고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모자를 쓴 남자였다.
“계산 안 할 거면 저 먼저 합시다.”
사람을 바라보지도 않고 작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진 못했다. 그러나 남자의 나이가 대학생쯤이고 꽤 살집이 있는 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먼저 계산하세요.”
재언은 계산대 위에 올려놨던 사탕과 물을 치우며 흔쾌히 한걸음 물러났다. 그는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자신이 너무 점원을 붙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속으로 반성했다.
때마침 음료수가 진열된 곳에 서 있던 차민재가 오렌지와 자몽 주스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재언을 힐끔거리던 남자가 헐레벌떡 뒤를 돌아 편의점을 나가 버렸다.
“아마 손님한테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못한 걸 거예요. 저 사람, 고양이를 엄청나게 싫어하거든요. 저쪽 주택에 사는데, 남편한테 자기 집에 있는 화단에 고양이 똥이 많다고 한마디 했었대요. 저기 보시면 알겠지만, 저희가 고양이 화장실도 따로 마련해 놓았거든요.”
편의점 뒤쪽 문으로 통하는 작은 공터에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고양이 쉼터가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건물에 딸린 사유지이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게 막아 놔서 고양이들이 마음 놓고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남편이라고 한 걸 보니 이 건물의 주인 부부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똥과 오줌을 치우고 흙도 다시 사서 채워 주겠다고 하니까 이미 버려서 없다고 소리를 지르더라니까요. 그냥 트집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고양이들한테 밥 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남자는 편의점을 운영하는 부부를 만만하게 보고 한 소리 했던 모양인데, 재언과 일행이 만만치 않은 인상이었던지라 조용히 물러난 게 아닐까 싶었다.
“자연을 개발해서 엉망으로 만든 건 인간인데, 조화롭게 살면 안 되나 싶어요. 그래도 싫어하는 걸 좋아하라고 강요할 순 없고, 그냥 우리 부부가 관리할 수 있는 선에서 버림받은 고양이들을 챙겨 주는 것뿐이에요. 그렇잖아요… 사람이 예쁘다고 데려갔다가 버려 놓고……. 사람에게 의존하던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하소연을 늘어놓던 중년 여성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죄송해요… 손님은 눈이 맑아서 그런가, 믿음직스러워서 까미가 좋은 사람 만날 것 같아요. 아무튼 다음에 밥 먹으러 오면 제가 꽉 잡아 놓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제 연락처인데 여기로 오면 연락 좀 주세요.”
재언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꽤 유명한 명품 브랜드 로고가 떡하니 찍혀 있는 명함이었다. 신원을 묻기 어려워하는 그녀에게 일부러 회사 명함을 준 것이다.
편의점에서 나와 오렌지 주스에 빨대를 꽂던 재언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차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지금 보면 재언 씨는 뭘 줍는 걸 참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동물이든, 인간이든.”
“…하하.”
“이러다 멸망도 주워 오겠다고 설칠까 봐 무섭네요.”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는 거대 빌런들이 고양이와 동급이 되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녀석들도 눈에 밟히니 능력을 각성시키고 지금까지 챙겨 왔던 것 아닐까 싶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꽁냥거리다가 함께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