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띠링-.
주말 아침, 늦은 시간까지 곤히 자고 있던 재언은 문득 들리는 문자 알림음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차민재의 단단한 팔뚝을 지워 내며 팔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 김 대리가 사고를 쳤다거나, 사고 친 걸 숨겨서 복잡해진 일로 주말 출근 호출일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핸드폰 화면을 켰다. 하지만 발신자는 회사가 아니라 어제 번호를 교환했던 편의점 주인이었다.
[까미가.밥.먹으러.왔어요.^^
지금.잡아서.위층.저희.집에.데려다.놧으니까.
이동장.가지고.오시면.병원에.같이.가드릴게요.]
재언이 문자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를 끌어안고 있던 차민재도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재언이 품에서 사라지면 귀신같이 깨어나곤 했다.
지금도 조심한다고 일어났는데 눈을 뜨고 말았다. 무방비한 표정으로 눈을 뜬 차민재의 얼굴은 방금 일어났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뽀송뽀송했다.
어젯밤 야식으로 야채 곱창과 와인을 함께 먹었는데 염분 과다 섭취로 퉁퉁 붓는 건 어찌하여 자신뿐일까. 저쪽은 어떻게 그런 것 하나 없이 잘생긴 얼굴을 유지 중인지 모르겠다.
“일어났어요?”
“네. 벌써 11시네요.”
재언이 하품을 하면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자 민재가 기다렸다는 듯 바짝 붙어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목덜미가 헐렁한 큰 잠옷을 입고 있는 재언의 목덜미에서 이어지는 날개깃을 핥으며 복근을 만지작거렸다.
아침부터 의도가 빤히 보이는 지분거림에 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민재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상큼하게 웃었다.
“편의점에서 문자가 왔어요. 고양이를 데리고 있나 봐요. 이동장을 가지고 오면 같이 병원에 가 주신다고 하는데……. 점심 먹고 출발하면 어떨까 해서요.”
“흐음.”
재언은 일어선 김에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배를 긁적이며 복근을 더듬거렸다.
‘아직 탄탄하긴 한데 아랫배가 살짝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주말이나 쉬는 날마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곤 했던 재언은 차민재와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함께 헬스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운동하다가 ‘인상을 흐릿하게 해 주는 안경’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사람이 꼬여서 제대로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데다 제법 시설도 좋고 회원들도 나쁘지 않아 애용했는데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갈 수 없게 되었다. 잠시 다른 헬스장으로 옮겨서 운동하려다가 회원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자주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운동을 빼먹는 경우도 많아지고 차민재와 야식을 먹는 경우가 이전보다 훨씬 늘어 버렸다.
‘요즘 운동을 안 하긴 했지. 바꾼 헬스장 회원들이 질 나쁜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가 안 가게 돼서……. 원래 다니던 곳으로 가고 싶은데 언제쯤 조용해지려나.’
한숨을 푹 쉰 재언은 까끌까끌한 딱지가 얹은 베인 상처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얼굴에 생긴 상처인지라 눈에 보이지 않아서 별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오히려 회사 사람들이 잘생긴 얼굴에 무슨 흉터냐면서 x디폼을 붙이라고 성화였다.
어째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고 생각하며 재언은 차민재와 편의점 근처에 생긴 콩나물국밥집으로 향했다. 장 보는 걸 까맣게 잊는 바람에 집에서 먹을 수 있을 만한 게 전혀 없었다.
“…요즘 나이를 먹긴 했나 봐요. 20대 땐 소주에 밥을 말아 먹어도 다음날 생생했는데 지금은 와인 한잔만 해도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
“하하하. 재언 씨 아직 나이도 창창한데 그런 노인 같은 말하니까 그런 거예요.”
밥을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싹 해치우고 편의점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인상 좋은 중년 남성이 계산대에 서 있었다. 어제 있었던 여성분의 남편인가 싶었다.
이번에도 물과 사탕을 집어 계산대에 올리며 인사하자 중년 남성이 그를 알아차린 듯 웃으며 반겼다.
“아, 어제 아내가 말했던 분이시군요. 연락해서 내려오라고 하겠습니다. 이동장은 가져오셨는지요.”
“네.”
“요즘 분위기가 흉흉해서 저도 안사람도 걱정이 많습니다……. 까미는 특히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못된 사람한테도 다가갈까 봐 더욱이요.”
남성도 아내와 똑같은 말로 검은 고양이를 걱정했다. 길고양이가 사람을 좋아하면 큰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재언이 외국에 놀러 갔을 땐 많은 고양이가 사람을 피하지 않았고, 그게 걱정거리가 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괜스레 씁쓸했다.
남성이 뭔가 더 말하려 하는 순간, 손님이 왔는지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편의점 문이 열렸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계산대에 커다란 남자 둘이서 있으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남성에게 눈짓한 재언은 차민재를 끌고 편의점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컵라면이나 도시락을 먹을 수 있게 테이블이 마련된 공간에서 손님이 나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두 사람은 물을 한 통씩 놓고 마주 보며 앉았다.
차민재가 눈앞에서 안경을 살짝 내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인상이 모호해지는 안경은 그가 레드-헬-파이어라는 사실만 숨겨 줄 뿐이지 그의 미모는 아이템으로도 가려지지 못했다.
“재언 씨, 저기에 제가 하는 게임 쿠폰을 컵라면에 끼워서 팔고 있는데, 전 컵라면은 싫어하거든요. 쿠폰만 뜯고 컵라면은 버려도 될까요?”
“아깝지 않아요? 뭔데요?”
차민재가 속삭이는 말에 재언은 컵라면 진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려 구경했다. ‘불왕컵라면’이라고 쓰인 컵라면은 붉고 검은색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 굉장히 매워 보였다. 컵라면 뚜껑에 그려진 캐릭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서 불을 내뿜고 있었다.
재언은 그 그림을 보고 무언가가 생각나는 바람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큭…….”
“왜 웃어요?”
“…저 그림 속 남자, 매운 걸 먹고 불을 뿜고 있잖아요. 꼭 누구처럼…….”
“흐음.”
차민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매운 걸 못 먹는 그를 놀리긴 했지만, 재언은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자신과 다르게 못 먹는 게 있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려고 애썼다.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 중 몇 명은 매운 걸 못 먹을 수도 있고, 단 걸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웃는 기색이 역력한 재언에게 컵라면 쪽을 손가락질하며 차민재가 입을 열었다.
“쿠폰으로만 주는 영웅이 있어요.”
차민재가 갖고 싶다던 컵라면과 콜라보한 게임은 저번에 그의 집에 갔을 때 했던 모바일 게임이었다.
확인해 보니 쿠폰 22개를 모으면 5성 영웅 확정권과 일러스트를 따로 챙겨 준다고 적혀 있었다. 분홍색 머리에 남자 캐릭터가 라면을 먹고 매워하는 일러스트였다.
“민재 씨, 그 게임 진짜 좋아하네요.”
차민재는 재언과 함께 있을 땐 핸드폰 게임을 한 적이 없지만, 재언을 기다리거나 혼자 있을 땐 항상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빌런을 태워 죽이는 레드-헬-파이어가 사실 핸드폰 게임 덕후라는 걸 누가 믿을 수나 있을까.
그렇게 잡담을 주고받으며 손님이 갈 때까지 기다리려던 재언은 10분가량이 지났는데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자 눈동자만 굴려 편의점을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온 손님이 아무것도 고르지 않고 신재언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낯이 익다 했더니 어제 편의점에서 봤던 그 남자 손님이었다. 그의 시선이 신재언의 얼굴을 향했다가 손목으로 이어졌다. 차민재가 선물해 준 시계가 있는 그 손목이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까지 확인하는 노골적인 시선에 재언은 혹시 용무라도 있냐고 물어볼 생각으로 눈을 돌려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들고 있던 과자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계산대로 가 담배 한 갑만 계산하고 나가 버렸다.
‘적의가 있었나? 없었나……. 계속 쳐다보기에 같이 봐줬더니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네.’
손님이 나가자마자 재언의 곁으로 편의점 주인이 다가왔다.
“손님,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내가 지금 내려오고 있답니다.”
“꺄아아악!”
그 순간, 밖에서 찢어지는 듯한 여성의 비명이 울렸다. 그에 놀란 주인이 허겁지겁 뛰어가 소리가 들린 물품 창고 뒤쪽 문을 열어젖혔다. 재언도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건물 뒤쪽에 있는 고양이 쉼터같이 꾸며 놓은 곳에 이동장을 든 중년 여성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손을 떨고 있었다.
밥그릇이 있는 곳에 핏자국이 낭자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양이 화장실 안에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새끼 고양이가 누워 있었다.
죽은 고양이는 한두 마리가 아니어서 매우 참혹했다. 재언은 참담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겨우 떴다.
“이럴 수가… 제가… 제가 밥 주는 애들이에요…….”
“일단… 경찰에 신고합시다. 이쪽으로 오세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재언은 경찰에 연락하기 위해 급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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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헉.”
한 남자가 급하게 문을 벌컥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담배에 쩐 냄새와 지린내가 진동했다.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고, 때 탄 이불은 언제 정리했는지 까맣게 색이 죽었다. 과자봉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쓰레기장에서 남자는 잘도 길을 찾아 컴퓨터 앞까지 걸어갔다.
남자는 핸드폰 사진을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글을 사진과 함께 업로드했다.
[시이발 ㅋㅋㅋ
고양이 새끼들 밥 주지 말라니까 주고 ㅈㄹ인 아줌마 참교육해 주고 옴.
사진 인증
<사진>
<사진>
<사진>
세 마리 하늘로 보냄 ㅋ 꿀잼 ㅋ
그것도 모르고 나한테 굽신굽신하는 거 구경함
시이발 근데 여자 후리게 생길 거 같은 x창 새끼 하나가 거기 고양이 데려간다 뭐다 하는데
손목시계도 xxx 브랜드임. 짭이거나 여자 후려서 선물 받은 게 분명함.
그 새끼가 데려간다던 고양이 산채로 털 벗겨서 인증하러 다시 옴 ㅅㄱ]
“히히… 헤헷.”
남자는 게시글을 올리자마자 벌써 네 자릿수를 넘어가는 조회수에 희열을 느끼는 듯 낄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