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재언이 아직 잠에 덜 깬 눈으로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던 코루루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아버지께서 데려오신 우리들의 막내를 보고 있지요.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를 독점하려고 하시다니, 정말 너무하세요.”
코루루는 형제 중에서도 유독 동물을 좋아해 인간은 죽여도 되지만 동물은 죽이면 안 된다는 독특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얼어 죽은 인간의 수는 세 자릿수를 넘어가도 동물에게 피해를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신재언도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말 못 하는 짐승에게 함부로 대하는 걸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평행 세계’는 세상이 멸망했다지만 인간들만 잔뜩 죽인 셈이니 결국 지구 생태계인 좋은 역할을 한 셈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너희들, 우르르 몰려다니면 고양이가… 고양이…가…….”
재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검은 고양이는 이미 침대 밑에서 나와 코루루의 손길에 배를 발라당 뒤집고 애교를 부리는 중이었다. 분명히 어제는 털이 엉겨 붙고 뭉쳐 있어서 지저분해 보였는데 얼마나 열심히 털을 골랐는지 벌써 윤기가 뽀얗게 올라오는 중이었다.
집 고양이었던 티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어제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고 겁먹었던 듯했다.
“아버지. 이 고양이 이름은 무언가요?”
“밖에선 까미라고 불렸던 모양인데, 아직 정하진 않았어. 다른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데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네.”
재언의 말을 들으며 코루루가 머리에 묶고 있던 붉은색 리본 끈을 고양이의 목에 둘러 리본을 만들어 주었다. 끈이 목에 둘리는데도 검은 고양이는 얌전히 앉아 코루루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고양이의 눈이 녹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다른 각도에서는 노란빛이 보였다. 송곳니 두 개가 살짝 튀어나온 채로 붉은 리본을 맨 고양이가 코루루를 빤히 쳐다보는 모습에 재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귀… 귀여워.”
“고양이는 싫지 않아요. 동물들은 사람처럼 역겨운 짓들을 하지 않잖아요.”
“사람을 불태우지도, 죽이지도 않지.”
“노예처럼 부리지도 않아.”
코루루의 말을 이어 체어맨과 엔레이드맨도 옆에서 거들었다.
“호호호… 검은 고양이는 저승과 이승을 연결해 주는 영물이라고 하잖아요.”
귀신들의 성녀까지 덧붙이는 걸 보니 자식들은 검은 고양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에 옆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던 버드맨이 재언의 눈치를 보면서 날개깃을 조심스럽게 고양이에게 가져다 댔다.
“저, 저도 만져도 될까요? 제가 만졌다가 망가지면 어떻게 해요?”
“오, 막내야… 생명을 가진 것들은 그 정도로 약하진 않단다. 고양이는 해파리가 아니야.”
체어맨은 망설이는 막내가 가여웠는지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차마 고양이에게는 닿지 못하는 버드맨의 날개깃이 살랑거렸다.
그러자 얌전히 코루루의 손길을 받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날개에 눈을 고정하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납죽 엎드렸다. 엉덩이를 몇 번 살랑살랑 흔드는 고양이의 뒷발톱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와 함께 까만 물체가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날개가 고양이에게 덥석 물린 버드맨이 깜짝 놀라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고양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버린 버드맨의 가슴 위에 올라가 편안한 자세로 납작 엎드렸다.
“하하하, 버드맨. 네 날개가 고양이한테는 장난감으로 보였나 보다.”
그 모습에 재언이 웃으면서 버드맨을 일으켜 세워 준 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침대가 커져서 가뜩이나 좁아진 방에 일곱 빌런까지 모여 있으니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가까스로 부엌으로 가 물을 한잔 마시고 언덕이 만들어진 고양이 화장실을 청소했다.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코루루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아버지. 이 고양이의 이름, 저희가 정해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해. 그래도 너무 정 주지는 마. 내가 키울 게 아니라 임시로 보호하는 거니까. 계속 여기서 살 애가 아니라고.”
“아! 이 고양이가 조각난 장난감 언니의 눈알을 찼어요! 얼른 가져와야 해요. 그러다 상처 나면 어떻게 해요?!”
소란스러운 일요일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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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뜬 재언은 출근 준비를 미리 끝내고 자동 사료 그릇이 잘 작동되는지, 물그릇 두 개에 물을 갈아 줬는지 확인한 후 고양이를 쳐다봤다. 얌전히 앉아 재언의 행동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고양이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작게 울었다.
“애앵.”
고양이에게서 꾸르릉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 장난감 낚싯대를 흔들어 주자 가지고 놀면서도 원하는 건 아닌 듯한 분위기였다.
“원하는 게 뭔데?”
재언이 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쭉 빼면서 오토바이 엔진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고양이에게서 흘러나왔다.
‘만져 주는 게 정답이었던 건가.’
주말 동안 완전히 경계를 풀어 버린 검은 고양이는 재언의 새하얀 침대 위 이불에 올라가 앞발을 쭉 뻗고 뒷다리를 옆으로 누이는 아주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인지 볼록한 배가 더욱 나온 느낌이다.
자식들에게 돌발상황이 생기면 부탁한다고 말해 놨으니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고양이를 봐줄 것이다. 사람을 끔찍하게 싫어해도 동물은 좋아하는 녀석들이니 큰 걱정은 없었다.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밖으로 나온 재언은 까미를 데려오는 데 도움을 주었던 편의점을 찾아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그때 이후로 걱정이 큰지 부쩍 수척해진 김향숙이 재언을 반겼다.
“아, 손님…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그럴 일이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으신지…….”
“네… 많이 나았어요.”
“다행입니다. 범인은…….”
“아직 못 잡았지만, 동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올리는 등 사건을 공론화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야 경찰들도 적극적으로 수사해 줄 거고 사람들이 관심을 둘 거라고… 하지만 이랬다가 범인을 자극하는 게 아닐지 걱정돼요…….”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리다 애써 웃음 지으며 재언에게 물었다.
“까미는 잘 있나요? 우리가 돌봤던 애 중에서 사람을 가장 잘 따르고 경계심이 없는 애라 걱정이 많았거든요.”
“네… 첫날엔 침대 밑에 숨어서 안 나왔는데 지금은 자기 집처럼 누워 있어요. 중성화 수술이나 예방접종은 할 수가 없어서 출산까진 데리고 있을 생각이에요. 새끼까지 낳으면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모르겠지만…….”
“새끼 때는 입양이 잘 되니까 걱정 말아요. 입양 글 올릴 때 도와드릴게요. 이상한 사람한테 보내면 안 되니까.”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어 보인 재언은 그녀를 조금 더 안심시키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켜 사진첩을 뒤적였다.
“어머, 귀여워라. 길거리에 있을 땐 꼬질꼬질했는데 집이라는 울타리가 있으니까 심신이 안정되나 봐요. 털에서 윤기가 흐르네.”
재언의 노력이 먹힌 듯 그녀는 잠시나마 기운을 차리며 다행이라는 듯 손뼉 치며 웃었다. 그 이후로 고양이에 대해 잡담을 떨다가 슬슬 다가오는 출근 시간에 생수를 한 병 골라 계산을 마쳤다.
재언이 김향숙에게 인사를 하며 편의점 문을 연 순간, 들어오려는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부딪친 사람은 손에 커피를 든 남자였는데, 뒤로 물러나 입고 있던 정장에 커피가 묻지 않은 재언과는 달리 그는 상의에 커피를 쏟고 말았다.
남자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문을 막고 있으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끝나면 경찰이 왜 있어?”
정확히 따지자면 재언이 먼저 문을 열었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남자가 억지로 들어오려다가 부딪친 것이었다. 쌍방 과실에 남자 쪽 잘못이 더 컸음에도 그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으로 소리를 꽥꽥 질러 댔다.
편의점 안에서 김향숙이 안절부절못하며 계산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신재언보다 키가 작은 남자는 한참 동안 혼자서 화를 내더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세탁비는 내가 알아서 청구할 테니까 명함이나 주쇼.”
대략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하는 꼴이 왜 저런 식인지 모르겠다. 재언은 커피가 묻은 남자의 티셔츠를 보면서 짜증 나는 마음을 억누르고자 이마를 짚었다.
팔을 올리는 재언의 손목에 걸린 손목시계를 유심히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쌍방 과실인데 세탁비 운운하지 말고, 남의 가게 앞에서 실랑이하지도 맙시다. 그리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다시 한번 더 반말하면 저도 참고 있진 않겠습니다.”
재언이 이를 악문 채 환하게 웃으며 지갑에서 2만 원을 꺼내 남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기본적으로 눈꼬리가 내려가 있고 웃을 때 성격이 좋고 착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당한 게 많았던 재언은 지금,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허세에 찌들거나 습관적으로 호구를 잡는 사람들이 재언에게 막 대했던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있을 때나 긴 사회생활을 위해 유하게 넘어간다지만, 생전 처음 보는 놈에게 돈을 뜯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체구가 큰 상대에게 덤벼 봤자 죽도 밥도 안될 걸 아는 남자는 이만 원을 손에 꼭 쥔 채 쪼그라들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를 지나치며 재언은 아침부터 별짓을 당한다고 혀를 찼다. 생김새로 사람을 구분하려는 건 아니나 남자가 가진 분위기가 너무나도 음침해서 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 위대하신 아버지. 저 무례한 남자를 죽일까요?
“됐어. 손에 때 탄다.”
재언이 고개를 내저으며 떠나가는 동안 남자는 그의 뒷모습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는 재언이 준 이만 원을 찢으려는 흉내를 내다가 팔을 내렸다.
한눈에 봐도 잘 나가는 회사원에 키도 크고 잘생긴 신재언을 향한 열등감과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그동안 신재언이 찬 시계가 짝퉁이라고 현실도피를 해 왔건만 가까이서 보니 나무랄 데 없는 진품인 것 같았다.
남자의 머릿속에는 그런 신재언이 자신을 비웃었고 무시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리고 남자는 그 화풀이를 말 못 하는 동물들에게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