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꿀꺽꿀꺽-.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우스로 새로 고침을 하던 남자는 뭔가 다른 느낌을 풍기는 댓글에 흥분한 얼굴로 입에 생수병 주둥이를 가져다 댔다.
방구석에 6개 묶음의 생수병이 굴러다녔고, 마시는 물은 미지근했다. 남자는 병의 1/3 정도 남아 있던 물을 단번에 비운 다음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닦은 뒤 빈 페트병을 뒤쪽으로 던졌다.
툭, 소리를 내며 쓰레기장 같은 남자의 집에 쓰레기 하나가 티 나지 않게 추가되었다.
[Kim82: 얘 우리 회사 다니는 놈인데… 내 부하임]
[ㄴㅇㅇ123: 구라치지 마셈;]
[ㄴㄴKim82: 인증 가능함. 이 새끼 xx 브랜드 홍보팀에서 일함. 일은 좆도 못 하는 새끼가 몸 팔아서 승진했구나. 어쩐지 뒤가 구리다 했음.]
Kim82라는 닉네임을 가진 놈은 말투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남자는 눈을 번뜩였다. 남자가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사진은 편의점에서 나오는 신재언을 몰래 찍은 사진이 떡하니 올라가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그가 편의점에서 사 온 물을 마시는 것까지 찍어서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올렸다. 게시글 댓글 대부분은 잘생겼다느니 몸이 좋아 보인다느니 하는 외모 평가가 줄을 섰고, 어떤 놈은 신재언에게 엿을 먹이겠다는 남자를 응원까지 했다.
그리고 Kim82는 남자가 흡족할 만한 정보를 술술 불었다. 그가 말하는 사진 속 남자는 일머리도 없는데 잘생긴 얼굴을 무기로 싸가지 없이 구는 데다 윗선엔 파리처럼 싹싹 비비면서 아랫사람에겐 행패를 부리는 소위 진상이었다.
학벌도 낮고 일도 제대로 못 하는데 이번에 승진이 약속된 여자 대리에게 몸을 대 주는지 뭐만 하면 그쪽이 땍땍거리면서 지랄을 떨어 댄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 때 그 멍청한 놈이 거래처에 미팅 장소를 잘못 알려 주는 바람에 계약이 무산되었으며, 상사인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다가 팀장에게 걸려 된통 혼났다는 것까지 kim82는 그가 어마어마한 쓰레기라며 장문의 쪽지를 보냈다.
히죽-.
그런 내용은 게시글을 올린 남자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였음은 틀림없었다. 역시 얼굴만 봐줄 만한 더러운 새끼였다. 난 저렇게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여자 후리면서 뒤통수치고 살진 않잖아.’
남자는 엉겨 붙은 머리를 긁으며 kim82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음.”
신재언은 귀가 가려운지 몇 번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털었다. 그에 검은 고양이와 실랑이를 하던 차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 귀가 가려워서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와 자리에 앉으며 재언은 앞에 놓인 오징어 안주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면서도 피곤에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김 대리가 거래처에 주소를 잘못 알려 줘서 미팅이 무산됐거든요. 요즘 떠오르는 인테리어 업체인데, 하청은 아니고 나름 중요한 거래처라 이쪽에서 숙이고 들어가야 할 판이었어요. 부장님도 인테리어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꼭 계약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고요.”
말린 오징어를 입에 넣고 씹는 재언의 눈앞에서 고양이 발바닥이 왔다 갔다 했다. 고양이 발바닥은 모두 분홍색일 줄 알았는데 검은 고양이는 발바닥도 검은색이었다.
고양이가 입술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오징어를 발로 툭툭 쳐대고 있었다. 약 올리듯이 입 안으로 오징어를 쏙 집어넣은 재언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외국계 대기업 몇 군데에서도 컨택하는 곳이라 콧대도 높았고요. 거기 이사가 외국물을 먹은 사람이라고 했나……, 아무튼, 돈이 그렇게 궁한 곳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김 대리가 미팅 장소를 잘못 알려 주는 바람에 거기 사장이 단단히 화가 나서 계약을 물러 버렸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회사가 난리가 났는데, 김 대리가 저를 물고 늘어졌지 뭐예요.”
김 대리는 자기 실수를 눈치채자마자 머리를 굴렸다. 사실 눈치챈 직후에 부장님께 보고했었더라면 발 빠르게 대처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김 대리는 곧바로 뒷공작을 펼쳤다. 신재언에게 뒤집어씌우는 짓 말이다.
거래처와의 미팅 장소로 정해진 곳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정식집이었는데, 김 대리가 거래처에는 인천 남동구 논현동의 한정식집으로 미팅 장소를 넘기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부장은 거래처 사장이 약속에 늦는다며 한참을 기다렸고, 거래처 사장은 예약도 되지 않은 한정식 가게 앞에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 당시에 미팅이 문제없이 이뤄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재언에게 김 대리가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신 주임. 그… 뭐냐, 논현동에 좋은 한식집 있다고 했잖아. 거기 이름이 뭐였지?”
“네? 어디요?”
“아, 저번에 갔었다고 했던 거기!”
재언은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다가도 묻는 말에 대답해 주기 위해 차민재와 함께 갔던 한식집 이름을 쭉 나열했다. 그중에 서울 논현동과 인천 논현동에 있는 한식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김 대리가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재언은 그때까지만 해도 김 대리의 말과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박 부장이 책임자 나오라는 고성과 함께 회사에 도착함과 동시에 신재언이 미팅 장소를 추천한 것으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이해했다.
물론 김 대리의 허접한 누명은 빈틈이 많고 앞뒤가 맞지 않아 금방 들통났고, 박 부장에게 죽을 만큼 까였다. 김 대리 정도 되는 나이의 부하 직원을 저렇게 혼내도 되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가 한 짓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그 양반도 입사 초기엔 그렇게까지 막장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실수 연발에 실패하고 혼나는 걸 반복하다 보니 만년 대리라는데, 사실 전 그것도 믿지 않아요. 회사에서 그 인간을 안고 가는 게 대단하다니까요.”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도 무서울 게 없는 재언을 골탕 먹이는 김 대리의 존재는 여러 의미로 대단한 인간이었다. 진심으로 죽여 버릴까 고민도 수백 번 했는데, 결국 제가 한 짓에 본인이 걸려 넘어지니 처리하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시비를 걸고넘어지는 걸 두고 보자니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화병으로 죽게 생겼다.
“저런… 제가 소리 소문 없이 없애 드릴 수 있는데…….”
히어로가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왜 오금이 저리는지 모르겠다. 농담이 전혀 섞이지 않은 진심이라서 더욱더 무서웠다.
“그건 진짜 매력적이긴 한데요.”
“아니면 두 번 다시 재언 씨한테 덤비지 못하게 손봐드릴까요?”
“와, 그것도 진짜 끌리네요.”
재언은 고양이가 계속 맥주캔을 톡톡 건들고, 오징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다가 땅콩을 발로 차면서 노는 걸 보고 술상을 접었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장난감 낚싯대를 튕기면서 주머니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맞다. 고양이 이름 생각해 둔 게 몇 개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좋아요.”
차민재는 못생기고 머리가 크다고 놀리면서도 고양이가 앞발로 어깨 위를 걸어 다니는데 털어 내거나 떨구지 않았다.
“일단 첫 번째는… 칠흑의 다크시니.”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흠흠.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첫 번째 장에 적혀 있었으니 엔레이드맨의 아이디어가 분명했다. 다음 장을 펼친 신재언은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배신자 유다.”
“고양이한테 배신자 세례명을 줄 생각이랍니까?”
“이것도 넘어갑시다. 다음은 나비.”
“…굉장히 흔한 이름인데 이중에선 그나마 가장 나아 보이네요.”
그나마 자식 중 조각난 장난감이 멀쩡한 작명 센스를 가져서 다행이었다.
“그다음은 막내… 그다음은 블랙 드래곤… 악귀왕…….”
종이를 넘길수록 재언은 이놈들한테 작명을 기대한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며 자책했다. 결국, 고양이의 이름은 나비라고 결정하긴 했지만… 사실 까미가 가장 나은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이후로는 조금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영악하기 짝이 없는 검은 고양이는 원하는 게 있으면 귀엽게 울면서 종아리에 엉겨 붙다가도 간식이나 밥을 얻어먹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틀에 앉아 바깥 구경을 했다.
그러는 동안 배는 점점 더 불러왔다. 동물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오기도 하고, 고양이를 위해 집안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숨을 공간을 몇 군데 더 만들어 주기도 했다.
차민재와 격렬하고 뜨거운 밤을 보낼 땐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저 멀리 도망갔던 고양이가 두 사람이 잠이 들 때면 어느새 가운데에 비집고 파고들어 왔다. 덕분에 차민재는 한동안 신재언을 끌어안고 자지 못했다.
회사에서도 커다란 트러블 없이 무난하게 지나가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김 대리가 유난히 자신을 보면서 히죽거리고 기분 좋아 보이는 게 조금 꺼림칙하긴 했다.
그것만 아니라면 사실 김 대리는 요즘 조용히 회사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저번에 박 부장에게 죽을 만큼 까여서 반성이라도 한 것일까.
그러던 중 어느 날 편의점 주인 김향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신재언입니다.”
- 아… 손님. 저 여기 사거리 쪽 편의점이에요. 까미는 잘 지내고 있죠?
“네. 그저께 사진 보내드린 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배도 더 불렀고요.”
- 입양을 전제로 한 임보는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입양 문의가 있나요?
“아니요. 출산하고 천천히 알아보려고요.”
- 아…….
그녀가 수화기 너머로 짧게 신음을 흘리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 그게… 손님. 까미 주인이라는 분이 오셨어요. 그분이 자기 고양이가 맞다고 우시는데, 손님과 만나서 까미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네요… 혹시 괜찮으실까 해서요…….
“…네?”
신재언이 황당하다는 듯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