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97화 (197/324)

197화

여성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2년 전 여름에 여성은 남자친구와 놀러 간 캠핑장에서 홀딱 젖은 새끼고양이를 구조했다. 눈도 못 뜰 정도로 어린 새끼 고양이가 전날 내렸던 비 때문에 계곡물이 차올라 떠내려온 것 같다고 했다.

다른 형제 고양이들은 모두 죽고 운이 좋아 홀로 살아남았다. 그마저도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걸 여성과 그녀의 남자친구가 구조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품에 안아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에서는 라인도 잡을 수 없는 새끼라서 이만큼 쇠약해졌다면 살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들다고 얘기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려 집에 데려온 여성은 고양이를 캠핑장에서 주웠으니 이름을 캠핑이로 지었단다.

새끼 때부터 몸이 약해서 그런지 고양이는 잘 다치고 뼈가 부러져 병원에 자주 데려가야 했다. 그러던 중 동거 중이었던 남자친구가 바람피우는 걸 들켜 쫓겨나면서 캠핑이를 데려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데려간 게 아니라 화풀이로 산속에 유기해 버렸다고 했다.

“캠핑이를 유기했다는 걸 알았을 땐 너무 늦었어요……. 이번에 입양 글을 보고 알게 됐어요. 우리 캠핑이라는 걸요.”

재언이 편의점에 도착하자, 상당히 화려한 외모의 여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지색 모피 옷에 배꼽티, 짧은 팬츠, 손톱에는 길고 요란한 손톱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외모와는 달리 여성은 신재언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더니 그간의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자친구가 유기한 걸 알았을 땐 이미 몇 달이나 지나 있었고 산 주변을 고양이 탐정까지 고용해서 찾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고 했다.

설마 여기까지 고양이가 내려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울먹였다.

“…중성화 수술도 안 됐던데. 정말 고양이를 챙긴 것 맞습니까?”

“캠핑이가 새끼 때에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몸이 약하고 뼈도 잘 부러져서 병원에 자주 갔었어요. 몸이 작아서 중성화 수술을 하지도 못했고요. 6개월이 지났을 무렵엔 탈구가 일어나서 중성화 수술보단 슬개골 수술을 먼저 해야 했어요.”

여성은 증거라며 그동안의 병원비 영수증을 꺼내며 눈물을 훔쳤다. 확실히 고양이와 관련된 병원비 지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중성화 수술 예약을 잡았을 땐 이미 남자친구가 데려간 뒤였어요. 저는 남자친구한테 캠핑이를 돌려달라고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만나 주지 않더라고요. 그 자식한테 새 여친이 생기고 집 앞에서 기다리니까 그제야 버렸다고 이실직고했어요…….”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정말 보고 싶다고 애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재언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캠핑이 임보중이시라면서요. 제가 데려갈게요. 제가 입양할게요! 저, 홍대에서 타투샵을 하고 있어서 수입도 높고, 자취해서 고양이 키우는 걸 반대하는 가족도 없어요. 새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동거는 하지 않고요.”

“나비가, 아니 캠핑이가 임신한 건 알고 계십니까?”

재언의 물음에 여성은 눈을 부릅뜨더니 더욱더 서럽게 울어 젖혔다.

“임신했으면 제가 더 데려갈게요! 캠핑이한테 더 빨리 적응할 집을 주고 싶어요. 두 번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돌려주세요. 제겐 정말 목숨보다 소중했던 가족이었어요.”

“…….”

옆에서 편의점 사장도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손님… 아까 이 아가씨가 보여 준 사진을 봤는데 정말 똑같이 생겼더라고요. 까미를 한번 만나게 해 주는 건 어떨까요?”

“…일단 저도 생각할 시간을 주셔야…….”

재언은 침음을 삼켰다. 편의점 사장까지 저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어쩐지 자신이 악역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빌런이 맞긴 하지만, 이런 대우는 조금 낯설었다.

“일단, 내일 다시 뵙는 걸로 하죠. 어디 사십니까? 제가 한번 댁에 방문하고 싶은데…….”

“저 인천 논현동 xx 아파트에 살아요.”

자신이 사는 곳이라며 그녀가 말해 준 곳은 재언도 잘 아는 신축 아파트였다. 그곳은 방이 넓고 구조가 좋게 나왔다고 입소문 난 청년 주택이었다.

그렇게 내일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재언은 그녀와 핸드폰 번호를 교환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막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는 차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뽀송뽀송하고 수염이 없어진 걸 보니 씻고 나온 모양이다. 그런데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고양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런 차민재를 향해 달려와 주변을 돌아다니며 울었다.

“애앵!”

고양이라면 무조건 야옹, 하고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무슨 의미의 울음소리일까.

“빨리 왔네요.”

“네. 얘기만 하고 헤어졌거든요.”

만약 그녀가 고양이가 보고 싶다면서 무작정 집으로 오겠다고 했으면 남자 애인의 집에서 태평하게 늘어져 있는 레드-헬-파이어를 목격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목덜미가 오싹했다.

재언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자 침대 위로 올라간 검은 고양이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고양이는 모두 도도하고 제 할 일만 하는 동물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스토커 같은 기질이 있었다.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얼굴과 턱을 긁어 주자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롱고롱하는 소리를 냈다. 귀가 쫑긋거리는 게 재언의 손길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시옷 모양으로 다물어진 입 사이로 작은 송곳니가 조금씩 보였다. 재언은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차민재에게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말을 들어 보면, 일부러 버린 것도 아니고 고양이를 계속 찾아다녔던 모양이에요. 이번에 입양 글을 올렸을 때 한걸음에 달려온 것만 해도요. 가족과 생이별을 한 셈이니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언 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저는…….”

점심으로 파스타를 해 주겠다며 냉장고에서 마늘을 꺼내던 차민재가 물었다.

재언은 레드-헬-파이어가 작은 마늘을 붙잡고 칼로 슬라이스를 치는 장면을 흥미로운 심정으로 구경했다. 저 모습은 사진으로 연출한다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 같다.

“잘 모르겠네요. 제가 키울 여건이 좋지 않으니까 무조건 좋은 곳에 입양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막상 데려간다는 사람이 나타나니 괜찮은 건가 싶은 마음이 앞서네요.”

“만약 입양이 무산되면, 우리 집에 데려가도 되고요.”

냄비에 물을 넣고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차민재가 옆으로 다가와 검은 고양이의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다. 어느새 눈을 지그시 감은 고양이가 괴상한 자세로 누워 잠이 들었다. 분명히 작은 체구였는데 어떻게 늘어나는 건지 고양이의 몸이 길게 뻗어 있었다.

차민재와 검은 고양이가 같이 있는 모습이 의외로 어울려서, 재언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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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헬-파이어, 계속되는 잔인한 그의 행보. 이대로 괜찮은가?]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하루에 하나 이상씩 인터넷 뉴스로 올라왔다. 그도 그럴 게 빌런을 아무리 잡아넣어도 꾸준하게 새로운 나쁜 놈들이 등장했다.

빌런 연합이라는 개떡 같은 이름의 연합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크 카오스’를 방패로 삼아 그의 부하를 자처하면서 온갖 쓰레기 짓을 저지르는 통에 신재언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빌런이 날뛸수록 히어로들의 활약도 더욱 빛났다. 대한민국의 히어로 협회는 상부가 쓰레기인 것과는 별개로 인재가 많았고, 인재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다.

명예나 국가를 위해 싸우는 인재가 아니라 돈을 받고 움직이는 레드-헬-파이어조차도 서울 한복판에 빌런이 나타나면 직접 나섰다. 그런데 대응이 잔인하고 지나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번에는 곤충을 이용해 죄 없는 시민들을 죽인 빌런을 잡아 곤충 다리를 떼 버리듯이 사지를 오체분시해 버렸다며 어마어마하게 비난을 들었다.

비록 그 빌런이 지나가던 일반인들의 뇌에 벌레를 심고 쓰레기 같은 짓을 조종한 나쁜 놈이었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레드-헬-파이어보단 평범한 타투샵을 운영하는 여성 쪽이 고양이를 키우기에 더 좋은 환경이라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루를 꼬박 고민하다가 임 대리에게 따로 연락해서 물어보자 그녀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 일부러 버린 게 아니라면서? 여태까지 찾고 있었던 데다 고양이한테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고. 가정방문도 흔쾌히 허락했다니까……. 고양이만 괜찮으면 임보보다는 입양이 낫긴 하지.

다음날까지 고민을 거듭하던 재언은 혼자서는 결정하기가 힘들 것 같아 차민재에게 부탁해 함께 여성의 집에 찾아가기로 했다.

그녀에게 연락해 동행인과 함께 찾아간다고 하면서도 남자 둘이 혼자 사는 여성의 집에 찾아가는 걸 불안해하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남자친구가 와 있어서 괜찮다며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그녀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남자친구는 좋게 말하면 터프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느 유흥가의 뒷골목에서나 볼 법한 양아치처럼 생겼다. 그는 에스트리아 박재원같이 가벼운 날라리 스타일이 아니라 살집이 있어서 그런가 체구가 좋고, 팔뚝에 커다란 문신을 새겨 넣었다.

명품 클러치백을 들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그는 자신보다 훤칠하게 큰 재언과 차민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허세에 물든 험악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의 표정 변화에 여성이 깔깔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얘가 생긴 건 이래도 엄청 소심해요. 지금도 남자 둘이 온다니까 한껏 무게 잡는 거예요. 저한테 허튼짓할까 봐 걱정된다나 뭐라나……. 아무튼, 여기 14층이 제집이에요. 들어가요.”

“뭐 그런 걸 말해.”

여성의 말에 남자는 부릅뜬 눈을 풀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재언은 그의 수줍은 표정에 어안이벙벙해졌다가 여성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갑자기 방문 요청을 했는데도 흔쾌히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지인인데 불편하시면 차에서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여성은 지상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고급 외제 차를 힐끔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같이 들어가도 상관없어요. 아… 맞다. 제가 애완동물 한 마리를 더 키우고 있어요.”

‘애완(愛玩)동물? 요즘은 그런 단어 잘 안 쓰지 않나.’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그녀의 손가락을 유심히 보던 재언은 이마를 문지르며 고리타분한 생각은 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요즘 세상이 어떤데 길고 화려한 손톱을 가졌다고 의심부터 하다니, 나이를 많이 먹지 않았다 해도 꼰대 회사에서 3년간 구르면 사고방식도 꼰대가 되는 모양이다.

다른 SNS를 돌아봐도 본인을 한껏 꾸밀 줄 아는 멋쟁이 젊은 세대들이 함께 사는 반려동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 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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