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98화 (198/324)

198화

삐리릭-.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엉거주춤하게 서서 문을 열던 여성이 잽싸게 몸을 날려 밖으로 나오는 무언가를 낚아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신재언은 문 앞에 멀뚱히 서서 눈만 깜박였다.

다시 보니 그녀가 낚아챈 것은 새하얀 솜뭉치, 아니 털이 길고 덩치가 큰 하얀색 고양이었다. 귀 끝에 검은색 털이 살짝 있는 걸 제외하면 고양이는 정말 눈처럼 새하얬다.

거기다가 한쪽 눈은 노란색, 다른 한쪽 눈은 푸른색인 오드아이에 털도 길고 몸집이 커다래서 멀리서 봐도 아주 예쁜 고양이인 게 티가 났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이런 고양이를 키우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캠핑이를 그렇게 잃어버리고 너무 외로워서 한 마리 데려왔어요.”

여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흰 고양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재언이 사는 집보다는 작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크기의 원룸이었다.

주방과 생활공간을 칸막이로 분리하고, 침대가 가려지도록 선반장을 놓아 남은 공간을 거실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벽면 한쪽엔 방 크기를 고려해 수직으로 높은 캣타워가 설치되어 있었다.

공간을 크게 차지하지 않는 유용한 물건에 재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택이가 카페에서 음료수를 사 온다는데 뭐 드실래요?”

“아, 돈은 제가 내겠습니다. 제가 올 때 음료를 사 왔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제집에 오신 손님인데 제가 내야죠.”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뭘 얻어먹는 게 어색한 꼰대스러운 사고방식을 가진 재언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강제로 남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대로 거절하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자세로 돈을 건네받은 남자는 고개만 끄덕여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제 이름은 광지혜에요. 남자친구 이름은 권 택, 외자고요. 작년에 직원으로 다녔던 타투샵에 손님으로 만났는데 나이도 같고 취미도 비슷해서 친해지게 됐어요.”

음료가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라며 자리를 내준 그녀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때는 전남친이랑 만나고 있을 때여서 택이랑 친해지는 걸로 전남친하고 많이 싸웠어요. 캠핑이를 잃어버린 것도 그 일 때문이에요. 남자친구는 저보고 바람피우냐며 의심하고 화내고 싸우다가…….”

그녀가 휴지로 눈물을 콕콕 찍으며 눈을 깜박였다.

“지금은 제 타투샵을 차려서 나왔어요. 나름 SNS에서 유명해요. 예약도 매일 들어와서 고정적이진 않아도 달에 200만 원 이상씩은 꾸준히 벌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타투 시술이 불법이긴 한데, 합법이 되는 날까지 열심히 달릴 거예요.”.

핸드폰 화면을 들어 보여 준 그녀의 SNS 계정에는 예약 문의 쪽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의 샵 계정을 검색해 들어가 보자 훌륭한 타투 사진들로 가득했다.

팔뚝에 있는 검은 용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재언은 문신이나 타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의 실력이 좋은 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는 스물여섯 살이에요.”

그녀의 나이가 재언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렸다.

“저는 서른한 살입니다.”

“와. 오빠 진짜 동안이네요. 저보다 한두 살 많을 줄 알았어요.”

재언의 나이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속삭였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 엄청나게 놀랐거든요. 너무 잘생겨서 배우가 들어오는 줄 알았어요. 오빠는 이런 칭찬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질리죠?”

“아니에요… 민망해서 그럽니다.”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직업이라 그런가 광지혜는 친화력이 매우 좋았다. 재언은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가 나쁜 마음을 가지거나 악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동물과 함께하기에 좋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에 다녀온 남자친구 권택이 들어왔다. 양손 가득 커피를 든 그의 모습에 재언이 재빨리 일어서서 거스름돈과 커피를 받아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자리에 앉은 네 사람은 다시 이야기를 재개했다.

“제가 샵을 차리고 한창 바쁠 때 전남친이 캠핑이를 데려가 유기했어요. 그래도 필사적으로 찾아봤는데 전남친은 엉뚱한 데다 버렸다고 말해서… 이젠 못 찾나 싶었는데 SNS에서 오빠가 고양이를 주웠다는 글을 본 거예요.”

“오빠?”

권택이 눈을 잔뜩 찌푸리며 되묻자 광지혜가 신재언의 눈치를 보며 그에게 속삭였다.

“우리보다 다섯 살 많으셔.”

“…….”

“아무튼 그래서 희망의 끈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거였어요. 오빠네는 지금 임시 보호중이라면서요. 캠핑이가 하루라도 빨리 입양을 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어요? 새끼들도 제가 다 책임지고 입양 보낼게요. 제 손님 중에 고양이 키우고 싶다는 분들이 계셔요. 물론 인증도 절차도 확실하게 밟을 거예요.”

빠른 속도로 말을 이으며 광지혜가 신재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절대 다시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녀의 눈동자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어렵네… 그런데 검은 고양이라 비슷비슷하게 생겼을 텐데 본인이 잃어버린 고양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거래요?”

“…발바닥에 분홍색 점이 있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맞거든요. 그리고 고양이를 잃어버린 날짜랑 나비가 우리 동네에 돌아다니기 시작한 날짜가 얼추 비슷해요.”

재언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입양 공고를 올리더라도 일주일 안에 원래 주인이 연락하면 돌려줘야 하더라고요. 그걸 빌미로 고양이를 돌려달라 우길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자기도 잘못한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가요…….”

“조금 걸리는 게 있긴 하지만 일부러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전남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고 하니까 돌려보내야 하는 게 맞겠죠…….”

“그렇죠… 그런데 그새 다른 고양이를 들였다고요?”

“네.”

재언은 핸드폰을 들어 어쩌다 보니 광지혜와 주고받게 된 메시지를 임 대리에게 보여 주었다. 광지혜의 집에 다녀온 뒤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고양이에 대한 게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한 대화였다.

신재언이 게이가 아니고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어? 이거 렉돌이네…….”

“렉돌이요?”

“품종묘라고…….”

임 대리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쓰게 웃었다.

“우리나라가 노답인 게 펫샵이에요. 품종 고양이들을 강제로 임신시켜서 만드는 공장이 있어요. 철장에 가둬 놓고 새끼를 낳으면 또 임신시키고, 그런 짓을 반복하다가 더 이상 임신을 못 하면 버리거나 죽여요. 한마디로 새끼 빼는 기계처럼 다뤄지는 거예요. 그런 아이들이 얼마나 오래 살겠어요? 그야말로 지옥이죠…….”

흡연실 구석에서 조용히 말을 잇던 임 대리가 말하다 보니 화가 난 듯 콧김을 내뿜었다.

“요즘 연예인들도 품종묘를 키우고 생김새도 예쁘고 귀여우니까 인기 있는 거예요. 물론 품종묘를 키우는 모든 사람이 펫샵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요. 품종묘들은 유전병이 심해서 병원비가 많이 나온다고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거예요. 펫샵같은 데서 돈을 주고 동물을 사 온다는 인식 때문에 쉽게 버린다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임 대리는 자신이 또 쓸데없이 열을 낸다고 생각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만한 일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요.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고 반성하는 사람도 있긴 한데, 어디서 데려왔든 버리는 게 더 나쁜 일이니, 자신이 그런 시장에 공조했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병원비까지 제대로 책임지고 잘 키우는 게 중요하죠.”

재언이 임 대리와 흡연실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타부서 신입사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입에 물고 저들끼리 핸드폰을 돌려 보다가 이쪽을 힐끔거렸다.

시선이 아주 묘했다. 왠지 히죽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재언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하는 듯했다. 사원증에 달린 줄이 파란색인 게 아직 3개월도 안 된 교육 이수 중인 신입사원들이었다.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중후반대의 남자 사원들의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뭐야? 왜 저렇게 쳐다봐?”

“그러게요…….”

임 대리는 직급이 대리임을 표시하는 검은색 줄을 차고 있고, 그 옆에 있는 재언 또한 그들보다 상사 직급일 게 뻔할 텐데도 그들은 조금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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